영화 리뷰 < 로마 (Roma, 2018) >
<본 리뷰는 영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시작부터 평범하지 않다.
약 4분간의 롱테이크 신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롱테이크 신의 소재는 바닥청소다.
영화 주인공 '클레오'의
중심 일과기도 하다.
평범하고 잔잔한 것에서 출발해
깊은 감동을 주는 영화 '로마'의 리뷰다.
영화감독 '알폰소 쿠아론'은
이 영화가 유년기 시절을
반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영화가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라면 감독은 틀림없이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을 것 같다.
여느 영화가 그렇듯, 로마 역시
인간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주로 중산층 '소피아'의 가정부로
일하고 있는 클레오의 이야기다.
소피아와 클레오는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지만 공통점이 있다.
슬픔을 겪는다는 점이다.
이 점이 인간으로서 둘의 관계를
동등하게 만들어준다.
소피아의 가족은
화목한 일상을 보내는 듯하다.
가족들이 함께 모여
밥을 먹고 TV도 본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남편의 외도가 숨어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그저 행복하지만
소피아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다.
클레오도 비슷한 아픔을 겪고 있다.
그저 열심히 일하고 평범한 일상을
꿈꾸었던 클레오에게
아이가 생겼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의 아기가 아니라며
찾아오지 말라는 아이의 아빠도 있다.
이런 상황에도 클레오는 그저
자신만의 일인 양 묵묵히
이를 받아들인다.
클레오의 안타까운 상황을
부각시키는 부분이다.
이렇게 소피아와 클레오라는
두 슬픈 여인들이 아픔을 공유하며
안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영화가
바로 로마다.
임신이라는 소재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대부분의 영화나 소설,
현실 세계에서는 '임신' 은
곧 행복에 가까운 말로 취급됐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는
단어기 때문에 그럴 거다.
그러나 이 영화 속에서
임신은 의미가 변화한다.
불행, 행복, 슬픔 순이다.
먼저 클레오는 원치 않은
임신에 적잖이 당황한다.
아이의 아빠인 '페르민'에게
임신 사실을 말하자
그는 도망쳐버렸다.
클레오는 겨우 입을 열어 소피아에게
자신의 임신 사실을 말한다.
자신의 임신 소식을 말하면서
"저를 해고하지 않으실 거죠"라고
되묻는 그녀의 모습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다행히도 소피아는 좋은 사람이었고, 클레오를 병원에 데리고 가
검진을 받게 도와준다.
이후 그녀의 임신은
더 이상 불행이 아니게 된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임신을 축하받고,
소피아의 친정엄마는 클레오에게
아기 침대를 사주려고 한다.
원래 임신의 의미였던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작용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감독은 이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슬픔을 만들어낸다.
아기의 침대를 보고 있는 도중
클레오는 무장단체로부터
습격을 받는다.
이 무리 중에는 아이 아빠인 페르민이
섞여있었다. 페르민은 클레오에게
총구를 겨누는데, 이때 클레오의
양수가 터지기 시작한다.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빠르게
병원에 가지 못했던 클레오는
아이를 잃고 만다.
정치적 불안정과
개인적 불운이 클레오에게
동시에 겹치는 순간이다.
클레오는 출산이란 엄숙한 순간에
혼돈을 맞았고, 혼돈 속에서
태어난 아이는 빛을 보지도 못한 채
사라지고 만다.
쿠아론 감독은 이렇듯
임신을 여러 의미로
변화시키면서 관객들에게 섣부른
해피엔딩을 기대하지 않게 만든다.
이 상황을 표현하는 카메라 기법들은
담담해서 더욱 비극적이다.
영화가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평범함이다.
클레오가 일을 하는 장면,
가족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모두가 평범한 일상 속이다.
그러나 감독은 이 평범함 속에서
비극을 잡아낸다.
그리고 그 비극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
가령 이런 부분이다.
영화의 중간쯤
산불이 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이 산불이 나기 전
영화의 외재 음향에서는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나다가
한동안 카메라는 멈춘다.
그리고 잠시 뒤 누군가
산불이 났음을 알린다.
이렇듯 평범한 불꽃놀이에서
'산불'이라는 비극이 드러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산불의 원인이 꼭 폭죽이
아니었을 수는 있지만 말이다.
그렇게 모두 함께 불을 끈 다음 날
불타버린 숲을 보며 클레오는
고향 생각이 난다고 말한다.
만족감을 느끼는 듯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불타버린 숲과 건조해진
공기를 보면서 고향 생각이 나는
상황 역시 비극적이다.
이 외에도 쿠아론 감독이
평범함에서
비극을 만들어 내는 모습은
대단하다고 평가할만하다.
이 영화의 연출은 참 세련되어 있다.
앞서 말했던 평범함 속 비극을
강조하기에 딱 알맞다.
먼저 과장이 없다.
영화 초반에는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느린 전개가 이어진다.
인물의 일상을 스케치하고,
인물 하나하나의
자세한 묘사도 이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전개 방식은
시간이 뒤로 갈수록
감정선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특유의 멀리서 관조하는 듯한
카메라 샷을 통해
클레오의 감정을 드러낸다.
이를 통해 클레오의 감정이
관객에게 더욱
선명하게 전해진다.
대조도 잘 활용하고 있다.
클레오가 아이의 아빠인 페르민을
찾으러 가는 과정에서
두 가지 상황이 대조된다.
한적한 멕시코의 시골 풍경과 함께
다른 한쪽에서는 정치인을 홍보하기에
급급한 모습이다.
이렇듯 평화롭지만
혼란스러운 이 영상은 클레오가 처한
상황을 더욱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클레오가 페르민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는 극장 장면에서도
이와 유사한 대조가 일어난다.
클레오와 페르민은
영화관에서 키스를 나눈다.
클레오가 페르민에게
임신 사실을 통보하자
페르민은 자리를 뜨게 된다.
이 상황을 모르는 클레오는
마냥 페르민을 기다리게 되는데,
엔딩 장면까지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엔딩 장면에서 영화 속 인물들은
키스를 나누지만, 결국 클레오는
혼자가 되었다.
이렇듯 대조를 통한 감정 묘사는
관객들이 클레오의 감정에
몰입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빈번한 롱테이크, 카메라 패닝 등도
적절하게 이용되었다고 생각한다.
1인칭에 자극적인 카메라를 선호하는
우리나라 영화에서도 이렇듯
관조적이고 느린 템포의 영화가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
인간에 관한 이야기라 함은
결국 생명에 관한 이야기다.
누군가가 살고, 누군가가 죽는
어렵지 않은 구조라는 의미다.
영화 속에서 클레오의 아기는
안타깝게 살아남지 못한다.
멕시코 정치 환경 속에서 많은 희생을
겪는 국민들도 마찬가지다.
페르민으로 대표되는 폭력집단이
그들을 무참히 살해한다.
클레오는 그저 이 죽음을
받아들이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감독은 이 '죽음의 환경'에
저항하려 했다.
평범하고 약한 클레오라는
캐릭터를 통해서다.
클레오는 아기를 잃은 이후
소피아의 가족과 여행을 떠난다.
이 여행의 목적지는 바다다.
바다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
소피아의 자녀들이
물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파도에 휩쓸린 아이들을 본
클레오는 수영도 하지 못하면서
겁 없이 물로 뛰어들어간다.
파도가 멕시코의 정치적 상황이나,
클레오의 아이를 빼앗아 간
죽음이라고 비유한다면
클레오는 이에 저항하기로
결정한다.
그 방식은 총을 들고 싸우는
폭력적인 방식이 아니라
그저 물에 뛰어들고
생명을 구해내는 평화로운 방식이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도
이와 관계 깊다.
혼란은 언제, 어디서나 발생할 수 있다.
클레오같이 평범한 우리들이
버텨내기 힘든 어려움일 수 있다.
그러나 주저해서는 안 된다.
클레오가 수영을 못하지만
물에 뛰어든 것처럼
이 파도에 부딪혀 봐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야만 생명을 지켜낼 수 있다.
아니, 지켜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도전했다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