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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저편의 순간들
by 율시 Jun 10. 2018

포괄연봉제인 회사에 절대 가지 마세요

반년 차 신입 중도퇴사일기 1회

퇴사를 결심한지 5개월이 되었고, 입사한지는 6개월이 되었다. 입사 한 달도 되기 전부터 퇴사를 마음 먹은 내가 정한 기한이 바로 '반 년만!'이었는데, 정말 반 년이 된 것이다.


반 년 동안의 회사 생활을 뒤로 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고신입이 되기 전까지의 이야기. 그리고 기억은 미화되고 잊혀지기 마련이니까 쓰는, 퇴사까지의 에피소드.




'포괄연봉'이라고 할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 몇 주만에 계약서를 썼다. 사실 계약서를 쓰기 전, 나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갔다(고 생각했다).


신입들끼리도 다 연봉이 달라 계약서는 한 명 한 명 인사팀을 만나 따로 작성했고, 내 순서는 점심시간 20분 전의 어느날이었다.


사실 들어오기 전, 현직자와 퇴직자의 회사 리뷰 포털인 잡***에서 후기를 보았었다. 하지만 그때는 "퇴직자들이 좋은 말은 하기 힘드니까..."하고 생각했는데, 내가 인터스텔라 속 5차원으로 간다면 면접 날의 나에게 찾아가 다리를 분질러서라도 말릴 것이다.


입사한 회사에서 직원들은 저녁이 되고 밤이 되어도 아무도 퇴근을 하지 않고 있었다.


"연장근로 한 만큼 돈은 주겠죠?"

"에이~포괄연봉제인걸요~"


그렇다. 세상의 근로자들을 등쳐막기 위한 제도인 포괄연봉제. 이것이 무엇인가하면, 말 그대로 '연봉을 포괄적으로 준다'는 뜻이다. 내가 야근을 몇 시간을 하든, 연봉은 처음에 정한 것 그대로, 퉁쳐서 준다는 뜻이다.


사실 이 연봉제 자체는 근로간 계산을 명확히 상정하기 힘든 직업군에서 사용하는 제도로, 제도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제도를 사용할 수 있는 직업군에 대한 법적 규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출퇴근 시간, 심지어 점심 먹고 돌아오는 시간까지 일일이 다 기록에 남고 회사 곳곳에 CCTV까지 있어 농땡이를 부릴 수도 없이 소처럼 일하는 이 회사도 포괄연봉제의 은혜를 입게 된 것이었다.


회사 입장에서 보면 엄청나게 축복적인 제도가 아닐 수 없다. 몇 백 명 직원들이 하루 십여시간씩 일하고도(원래 정규근로시간은 8시간이어야 한다)돈은 더 주지 않아도 되니...



따지면 먹힐줄 알았다

출근길의 지하철 창밖

근로계약서 작성 당일, 우선 나는 정규근로시간이  9시간이라더나(원래는 8시간) 퇴직금이 연봉에 포함되어 있다거나 하는 것들에 대해 인사팀에 물었고, 인사팀은 내 질문에 조금 당황한 듯보였다. 하지만 이내 평정을 찾으며 이렇게 답했다.


"저희가 매년 감사를 나오는데 한 번도 불법으로 걸린 적이 없어서요. 그러니까 여기 있는 건 모두 합법으로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말이야 방구야 싶은 이 말은 내가 과장한 것도 왜곡한 것도 아니고 정말 인사팀 직원이라는 자가 한 말이었는데, 그의 그 한마디에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점심시간을 맞아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몇 주가 흘렀다. 짧은 시간 동안에도 나는 팀 내 퇴사자를 여럿 보았다. 신입외에 연차가 몇 년 된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하루 십수시간의 근로를 몇 년 간 한 끝에 병이 생겨서 나갔다.


알바 사기를 여러번 당하면서 근로조건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에 노이로제가 걸린 나는, 회사가 자랑스레 내세우는 포괄연봉제의 허점을 찾아 법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찾아낸 건 두 가지였다.


1. 포괄연봉제더라도 최대 주당 연장근로시간 12시간을 넘기면 안된다.

2. 포괄연봉제더라도 실 연장근로시간에 상응하는 금액과 연봉계약에 명시된 금액을 비교하여 후자가 확연히 낮을 경우, 회사는 근로자에게 차액을 지급해야 한다.


그렇게 나는 인사팀에 다시 컨택을 했다. 나의 실 근로시간과, 포괄연봉제와, 제도상의 수많은 불법 지점에 대해서 담은 메일을 보냈다. 인사팀에서는 일주일 간 내 메일을 읽씹했다.


나는 다시 메일을 보냈다. 그러자 인사팀에서는 또 일주일 간 내 메일을 안읽씹했다. 내가 한 번 더 메일을 보내자, 그제서야 답이 돌아왔다. "일주일 안에 연락 드릴게요." 그리고 또 일주일이 지났다.


또 메일을 보내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무렵, 인사팀장에게 연락이 왔다. 이번에도 점심시간 직전이었다. 이때 그와의 대화를 녹음하지 않은 것은 정말이지 천추의 한이다.


그렇게 인사팀장과의 면담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에게 회사제도의 불법에 대해 조곤조곤 말했다. 어떤 점에서 회사가 법을 어기고 있으며, 그를 위해 회사는 어떻게 해야 하며 하는 것들. 나는 그가 불법을 부인하기 위해 애쓸 줄 알았고, 문서로 나와 있는 법적 조항과 판례들 앞에서 무릎 꿇을 줄 알았다.


그런데, 내 말을 들은 그는 말했다.


"율시 씨가 하는 말이 다 맞아요. 원래 법적으로는 그게 맞죠."


뭐지? 나는 그럼 해결을 해 달라고 말했다. 법대로 12시간 이상 추가근로를 못하도록 조항을 마련하고, 실 추가근로시간에 해당하는 정당한 급여를 지급하고...


그러자 인사팀장은 말했다.


"그게 이상적이지만 현실은 다르죠. 회사 입장에선 포괄연봉제가 훨씬 효율적이라 어쩔 수 없구요. 노동청에서도 이런 건 못 잡아요."


"효율적인 것보다 불법을 저지르지 않는 게 중요한 거 아닌가요?"


그러자 인사팀장은 이렇게 답변했다.


"율시 씨의 근로 시간을 제대로 체크해서 그에 맞는 급여를 주려면, 율시 씨가 화장실 가는 시간, 담배피러 가는 시간까지 일일이 다 체크해야 하는데, 저희 인사팀 직원들이 매일 율시씨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그걸 체크하라구요? 그건 솔직히 말이 안되잖아요. 노동청에서도 그렇게 못하니까 못 잡는 거예요."


"그럼 지금 인사팀에서는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거네요?"


"연장근로시간이 너무 심한 경우에는 팀장에게 주의를 주는 등, 저희 인사팀도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팀 단위의 재량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근로자 개개인에게 제도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건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렇게 불합리하다고 생각된다면, 퇴사하시는 사유가 될 수 있습니다."


꼬우면 퇴사하라는 그 앞에서, 이번에도 역시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인사팀장은 대화를 마무리하며 말했다.


"궁금하신 점에 대한 답변이 되었을지 모르겠네요."


나는 전혀 답변이 되지 않았지만, 대화를 지속해봤자 인사팀에서는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껏 나는 법에 무지하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그래도 최소한 이 나라에는 법이라는 울타리가 있으니, 법을 알고 그를 내세울 수만 있다면 공정성이 보장되겠지, 불합리가 해결되겠지하고 생각했다. 얼굴에 철판을 깐 큰 조직 앞에서 작은 개인이 무너지는 건 드라마 속 얘기겠지, 현실에서는 최소한의 법적 양심은 가지고 있겠지,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큰 조직은 소송을 하지 않는 한 무너지지 않을 거란 배짱이 있었고, 불법을 저지르면서도 당당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자르면 그만인 일개 사원인 나는 너무도 무력했다. 불합리가 있다면 내가 바꾸면 된다는 자신감은 패기일 뿐이었음을 슬프게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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