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습니다만, 소극적인 태도를 벗어던지려고 합니다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는 향기처럼 짙게 남겨진 회사생활에 대한 트라우마, 그 속에서 생명력을 가지고 꿈틀대는 두려움과 불안, 나는 매일 이것들과 맞서며 바둥대고 있다. 그래도 2년 전에 비하면 지금 나는 많이 회복되었나, 부디 회복의 문제이기를 회복만 되면 모두 해결될 수 있기를.
나는 소극적 삶의 태도라는 굴레에 갇혔다.
소극적인 태도는 족쇄와도 같다.
나의 10대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삶을 관통해 온 소극적 삶의 태도는 20대 중반쯤에 잠시 맞이한 전성기를 제외하고 오늘날 나의 생활 속에 전반적으로 녹아들어 현재까지도 나의 하루 중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다.
2년 전, 모션그래픽 디자인 회사와, 영상프로덕션 두 번의 짧은 회사생활을 겪으며 , 소극적인 삶의 태도가 나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봤다.
나는 소극적이라서 큰 도전을 주저했다. 더 좋은 기회나 더 좋은 상황이 마련되기 위해 더 나은 노력을 했어야 했으나, 앞날이 불안해서, 생활비가 없으니까, 등의 염려와 고민 따위로 노력에 쏟아야 할 시간은 삶의 비관적 관점으로 보이는 현실 속에 넋두리를 늘어놓으며 기력을 낭비하며 흘러갔다 그냥 눈앞에 합격의 문턱만 넘으면 넘은 곳 중에서 한 곳을 골라 들어갔다. 좀 더 담대하게 수개월, 아니 몇 년을 준비해서라도 좋은 퀄리티의 포트폴리오와 전문지식을 쌓았더라면 더 나은 상황을 살았을 텐데, 소극적으로 상황을 바라보니, 내 주변사람들로부터 오는 인생에 대한 조언과 여러 선택지 안에서 내게 내민 그들의 의견을 뒤로하고 주최적으로 주도권을 쥐기가 왜 이렇게 힘든지, 주변 사람들의 기대와 나란 사람의 사회적 책임감을 외면하고 묵묵하게 도전을 이어가기에는 나는 너무 소극적이라, 그냥 현실에 맞춰서 회사를 들어갔고 나의 인생을 그냥 이렇게 남의 의견대로 단정 지으려고 했다. 그래서 모션그래픽을 공부할 당시, 어쩌면 딱히 큰 포부나, 목표 따위는 애초에 없었던 것 같다, 그냥 저거면 어느 정도 인생에 재미를 챙기며 굶어 죽지 않을 것 같았고 주변 반응이 좋았다 뭐 비전 있어 보인 다랄까, 잘할 거 같다랄까, 그런 반응이었다.
그래서 결국 난 딱 내가 한 노력만큼의 결과 같은 회사를 들어갔다. 복지랄 것도 딱히 없고, 그냥 일하고 점심때되면 밥 먹고 퇴근때 되면 퇴근하고 일 못 끝낼 거 같으면 야근하고 야근수당은 없는 회사.
그래도 첫 회사다 보니, 내 안에 책임감이 꿈틀댔다, 피해 주면 안 된다는 강박이 있었다.
맡은 일에 대한 책임의 무게로부터 전해지는 강박과 불안으로 매일같이 숨고 싶었던 순간들, 숨이 턱 막히는 강남 한복판에서 수많은 인파를 헤집고 집과 회사 그 사이를 뱅글뱅글 돌아가는 인생을 돌아보면, 삶은 누더기 그 자체다. 밟혀도 밟힌 줄 모를 만큼 조금 더 상처 나도 크게 아랑곳하지 않을 그런 누더기 같은 상태다. 나를 상실하고 정처 없이 떠돌던 나는 당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결론을 지었다. 그러면서 무작정 버텨보자는 오만한 판단을 내렸다.
직장생활은 버티는 것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버티다 결국 스트레스로 돌발성 난청이 생겼다, 건강마저 무너지니 수문을 개방한 보에서 흘러나오는 물살을 주체할 수 없듯이 내가 꼭 잡고 있었던 버티자는 한 줌에 의지는 알아차릴 새도 없이 어디론가 떠내려가고 있다. 좌절감과 상실감으로 인해 무너진 마음을 추스를 수 없어 밤잠을 설치고 새벽녘 먹먹한 귀를 달고 출근하는 출근길에 지하철 2호선을 타고 합정에서 당산역 사이에 한강을 지나치는 풍경을 매일 넋 놓고 바라보았다.
새벽빛이 강물에 비쳐, 푸르스름한 한강을 보고 있자면 물결 따라 사는 단순한 삶을 살고 싶다는 열망에, 그럴 수 없는 현실의 벽을 이겨내는 게 너무 힘들어 보여서 사무치게도 서글펐다. 돌발성 난청은 나를 더욱 위축시키게 만들었다.
나 빼고 모두 잘하고 있는 것만 같은 회사생활,
그러나 알고 있다, 이 문제는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모두들 견디고 버티고 있는 거라는 것을 말이다.
알면서도 스스로를 각자의 언어로 정죄한다. 자기혐오란 값싼 사색이다, 대상은 나만 깎아내리면 되니 죄의식도 비교적 적은 편이다. 감상 또한 지극히 단편적인데 주로 원색적인 비난이 주된 내용이다. 타인에게 들으면 기분이 나빠서 몇 날 며칠을 곱씹을 거면서 나 자신에게는 어째 이렇게 야박한가, 근데 마냥 싫지만은 않다, 바보 같고 어리석고 한심하다고 나 스스로에게 욕 해줄수록 그런 내가 익숙하고 정겹기까지 한다. 이런 나라도 나라는 사실이 반갑다랄까, 어쨌든 이렇게나마 내가 확인이 된 거라면 된 걸까?
어쩌면 이 값싸고 얄팍하게 찾아오는 자기혐오로부터 주어지는 소극적인 삶의 태도에 중독된 것 일 수도 있다.
혐오는 부족하고 못난 나를 마주한다. 혐오하는 대상이 나 자신일 때 그 뒤에 순수하고 맑은 영혼이 마음의 눈에 들어온다. 그림자 뒤에 서있는 나는 그 존재를 확인한 순간 빛의 형상을 마주한 듯하다.
한겨울에 샤워를 하고 나와, 벌거벗은 몸으로 급히 두꺼운 겨울 이불 속에 들어가 이불을 돌돌 말고 꼭 웅크리며 추위로부터 해방하려는 행위자체에 기쁨을 얻는 어린아이 시절의 모습, 추위를 마주하는 유년시절 나의 표정을 보면, 함박웃음을 띄고 있다.
사람이 한기를 느낄 때,
그 본연의 의미인 따뜻함 속으로 들어간다.
나를 정죄하는 것, 정죄의 언어는 한기가 서려있다. 그런데도 멈추지 못하는 이유는, 정죄를 통한 안락함을 알고, 또 익숙하기 때문이다. 마치 보기만 해도 시린 겨울날 공원 벤치에 곧장 떠난 누군가의 온기를 통해서 편안함을 느끼는 경험이 좋은 감정으로 기억되듯 나의 온기가 나를 정죄하는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또 그 자리에 앉는다.
"한심한 놈, 아무것도 못하는 자식, 정말 폐급이네" 등 육안에는 보이지 않는 영적 언어로 스스로에게 익숙한 듯 한 말로 내면에 울림을 주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안정을 취한다. 자기혐오로 안정감이라니, 참 음침하다.
나 자신은 메마른 탈피 껍데기처럼 속이 텅 빈 껍데기 같은 것인 줄 알았는데, 내 알맹이는 날아가고 없는 게 아닌 웅크리고 숨어있던 것이었다. 눈을 감고 내면을 들여다본다, 어린 시절 유난히 발그레하고 동그란 볼살을 지닌 내가 이불로 온몸을 꽁꽁 싸매고 고개만 빼꼼 내밀고 나를 쳐다보고 있다. 다 커서 누더기 같은 차림이 된 나를 쳐다보고 티 없이 맑은 미소를 띠고 있다. 혐오로 마주한 내 유년시절은 찬란하게 맑고 투명하다. 그래,
부끄럽고 면목없다. 어쩌면 나는 숨 쉬고 살고 있는 거 자체가 세상 속 아이러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치 모기나 바퀴벌레가 왜 살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쓸 모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있을 거면 나 스스로는 도대체 왜 살고 있는 건지 당최 알 수 없다.
한때 학원 강사일을 하면서 한 달에 두세 개씩 공연 일정을 소화해 내며 숨 가쁘게 밝은 조명 앞에서 춤을 추며 살아왔던 나는 이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더 깊숙한 곳으로, 피하고 떠돌고 도망쳐 왔다. 그때의 나는, 이젠 나 조차도 어색하고 애써 떠올리려고 하지 않는다, 20대 중후반에 나는 마치 현실을 사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인생에 모든 것이 술술 잘 풀리는 듯한 순간 그건 현실이 아니다. 꿈이다. 꿈인데, 박탈감이 느껴지는 꿈,
너무 만족스러운 꿈을 꾸면 깨어나기가 싫다
다시 꿈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서 베개에 고개를 파묻고 온갖 노력 끝에도 그 꿈 안으로는 도저히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니 늘 박탈감이 든다. 내건 줄 알았는데 한 순간 모두 잃어버렸으니까, 이건 자기혐오에도 용납이 안 되는 영역이다, 웃기는 말이지만 비하에도 나름의 철칙이 있다.
"밝은 열정으로 똘똘 뭉쳐 힘차게 살아왔던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내가 넘어야 될 산이자, 라이벌이다."
과거의 나, 내가 넘어야 할 큰 산이란 걸 알겠지만, 열의란 피곤한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수개월을 자기혐오의 늪에 빠지면서 유튜브나 보며 침대 속에서 빈둥대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특별한 계기 없이 정신을 차리고 3~4개월 국비지원학원교육 준비를 했다.
나는 3D 모델링을 배웠다.
배운 기술로 최근에 회사에 취업하고 일자리를 알아보면서 이곳저곳 나름 몇 군데 면접을 볼 때 “왜 3D 모델링을 준비했냐,” 하면 진지하게 그것에 대해서는 고민을 해본 적이 없어서 대충 뻔하고 상투적 인말로 둘러댔다. 하지만 지금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했고 명료했다. 하지만 면접관에게는 발설하기 조심스러운 내용이긴 하다.
나 같은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에서의 삶이 익숙한 이런 개선의 여지가 전혀 안 보이는 인간도 무언가 빠지면 다른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다. 혐오할 기운을 3D로 표현할 대상에 쏟아붓고, 방법이 막히면 고민하고 구글링 하고 방법을 찾아내면 그 쾌감에 이어서 작업을 하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흘러 낮부터 밤이 된다. 집중하고 몰입하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었다. 작업을 할 때는 사색에서 벗어나 3D 자체에만 몰입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니, 서서히 극심한 자기 비하 중독치료가 되어갔다.
다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서대문구청 앞 편의점에서 야간아르바이트를 할 때는 내면의 동요를 다스리기 힘들었다. 그렇게 약 1년 8개월의 시간이 흐르고 포트폴리오를 모두 완성시키고 이력서를 여기저기 넣었다. 처음에는 게임회사 위주로 넣었다. 게임에 대단한 열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당시 다니던 학원이 게임학원이라 게임캐릭터 포트폴리오를 제작했었다. 포트폴리오 제작을 집중해서 하다 보니, 어느덧 두 개를 완성시키기는 했는데, 앞으로 두 개는 더 만들어야 취업이 어느 정도 보장돼 보였다. 뭐 만드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다만 하나 완성하는데 5개월~6개월 걸리는데 1년을 버틸 자본도 없었고 왜 이렇게 고생해서 회사를 들어가야 하지 이 노력을 더 나를 위해서 할 수는 없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1년 8개월이라는 시간 동안에 꿈이 생겼다. 1인서비스를 운영하고 싶다
1인개발로 위안이 되고 안정이 될 수 있는 서비스를 운영해서 사람들에게 선보이고 싶었다. 내가 뭐라고 감히 누군가에게 위안이 될 수 있을까 싶었지만, 감히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고 싶고 위로가 되고 치유가 되는 그런 사람, 그러면 나도 행복할 수 있을 거 같아서 나로 인해서 누군가가 웃으면 그 웃음으로 내가 더는 음침한 생각하지 않고 떳떳하게 인생을 보람되게 살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래서 1인서비스를 개발하고 싶어서 구직활동을 잠시 멈추고 느닷없이 게임 개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프로그래밍이라던지 기획이라던지 내가 아는 분야가 아니었다. 어설퍼도 원화까지는 그림을 그려왔었으니까 어떻게 하겠는데 도무지 어떻게 진도를 나가야 할지 몰랐다. 그렇게 또 몇 개월의 시간이 흐르고 내가 백수로 있는지 어언 1년 10개월이 넘어가는 시점이다. 어머니가 갑자기 팔이 부러지셨다. 일을 하시다 계단이 미끄러워 넘어지신 것이다. 그래서 집에 어머니와 둘이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우리 엄마는 말이 굉장히 빠르고 날카롭다. 밖에서는 안 그러는 거 같은데 마음이 편한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그렇게 변하신다. 나 또한 밖에선 음침하고 소극적인 내가 가장 대범해지는 순간도 엄마와 마주 할 때다.
거의 매일 엄마의 조언을 듣고 있자니 마음이 평온치가 못했다. 그러니 개발을 위한 준비기간에도 대부분의 시간을 그냥 앉아서 정신 차리기 위해 시간을 허비했다. 어머니의 잔소리가 들리면 공부를 하다가도 혼미해지는 심경을 바로잡는다는 핑계로 나약하게 침대 위로 몸을 늬우는 것이 습관이었다. 그리고 또 자기 비하가 끊임없이 시작됐다. 그러다 생활 패턴이 망가지고, 건강이 악화되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고독이 좋지만 이때 찾아오는 고독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또 그렇게 약 3개월 정도시간이 지나고 난 후 난 이러고 있으면 아무것도 안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찰나에 내가 면접을 봤던 회사 중 느낌이 좋았던 한 곳에서 임원면접을 진행하자고 연락이 왔다. 이전에 다른 회사는 합격통보를 받고도 다시 일을 하자니 마음이 잡히지 않아, 사정이 생겼다며 다 피해 다녔지만 이곳만큼은 괜찮아 보였다. 그래서 임원면접을 보러 갔었다.
조금 특이해 보일 수 있지만 문화재 회사다. 공무원은 아니고 문화재청에서 용역으로 일하는 회사다 내가 할 일은 국가유산 3D 원천 자원 에셋 보급이다. 실측 스캔데이터를 기반으로 3D로 문화재를 모델링하면 된다. 연봉은 직전회사 연봉으로 동일하게 가고 포괄임금제로 하기로 하고 약 한 달 정도의 텀을 두고 입사를 했다.
지금은 입사한 지 2개월이 지난 시점이다. 퇴근하고 나서 글을 쓰니 몇 날 며칠을 나눠서 쓰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2개월 동안 광역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하고 있다.
광역버스는 의외로 사람이 없어서 늘 쾌적하고 버스 전용차로가 있어, 상당히 빠르다. 생각보다 광역버스 출퇴근은 교통비를 머릿속에서 지우면 참 할 만하다. 나는 회사에서 내가 엄청 대단하게 성장하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물론 성장을 애써 마다하는 건 아니지만 승진과 진급에 목숨 걸진 않을 것이다. 또 나의 공이 다른 사람의 것이 되는 것에도 전혀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생각이다. 전혀 아깝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경력을 쌓고 다른 대기업에 취직한다는 계획도 없다. 나는 단지 내가 꿨던 꿈, 사람들에게 유익한 게임을 만드는 것을 위해 이곳에 들어왔다.
그럼 그 꿈과 이 회사가 무슨 상관이 있냐고 묻는다면 나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곳에서 일하는 게 내 꿈과 직접적으로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건지 나도 미스터리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나는 내 꿈을 지키기 위해서 놓인 상황에 최선만을 골라서 선택해서 이곳으로 물 흐르듯 흘려 들어온 것이다.
2년 전 물길 가는 데로 살고 싶다던 나는 지금 현재, 어째 바람대로 물 흐르듯, 삶을 이어가고 있다.
내 인생에 제2의 전성기가 안 와도 좋다. 내가 꾼 큰 꿈이 꼭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실현되지 않아도 된다. 근데 다만,
내 안에 숨 쉬고 있는 어린 시절 해맑은 미소를 띠며 나를 바라보는 나에게, 내가 동경한 나에게 더 이상 죄스럽고 면목없는 자세로 살 수는 없다. 이불을 싸매고 있는 내 안에 순수한 영혼, 그 앞에서 나는 떳떳해질 것이다.
매번 넘어지고 매번 계획은 실패 투성이다. 대단한 결심을 했다고 해서 내면의 변화가 절대 결심의 크기에 비례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속하려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 그토록 동경한 나의 순수함을 닮아가는 것, 어쩌면 그 사실로도 삶을 살아갈만하지 않을까,
23.11.26
용기 내어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사실 글을 쓰며 이야기를 하는 게 부끄럽다. 솔직하게 쓰다 보니까 , 내가 헐벗은 느낌이 든다. 약 2주간 고민만 하다가 올리는 글, 계절은 겨울로 가고 있고 나무들은 망설이듯 옷 벗기를 주저한다. 2023년이 못내 아쉬운 건 사람이나 나무나 마찬가지다.
-브런치연재를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