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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 '외로움' 단어의 발생과 사용에 대하여

19세기에서야 정립된 '외로움'이 어떻게 고대 문서에 적용되고 있는가?

by KEN

그저 외로움의 근원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느 시점에서든 외로움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김만권 교수는 그의 책 〈외로움의 습격〉에서 현대인의 약 25%, 그러니까 네 명 중 한 명이 일상적으로 외로움을 경험한다고 말합니다.


외로움은 단순히 고요함을 누리는 즉, 자기 자신을 향한 깊은 성찰에 요구되는 ‘고독’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이 외로움은 사회적 관계가 끊겼을 때, 경력이 흔들릴 때, 누군가와의 연결이 약해졌을 때 찾아오는 관계적 단절의 고통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외로움은 결코 일부 사람만의 문제가 아닐 겁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겪는 시대적 경험이며,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인간 보편의 정서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외로움'이라는 것을 들춰보고 싶었습니다.

시작해 보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외로움'으로 번역된 성서 속 '고립 개념'에 대한 생각, 생각들...


Intro...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고자 하는 주제는 바로 신·구약 성서의 원문이 ‘고통스러운 고립의 상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더 덧붙여, 현대 영어 단어 ‘loneliness’—‘외로움’이라는 말이—어떻게 고대의 개념을 번역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는가 하는 언어학적 질문도 함께 다루어보겠습니다.


여기에는 한 가지 흥미로운 모순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loneliness’라는 단어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심리적 의미를 갖게 된 것은 19세기 이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단어가 수천 년 전의 고대 문헌, 성서를 번역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을까요?


이 문제는 아주 간단한 구분 하나로 풀립니다. 즉, 원문이 묘사하는 ‘현상’과 번역자가 선택한 현대적 ‘표현’은 서로 동일한 차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성서는 인간의 ‘고립’을 단순한 감정상의 문제가 아니라, 타락 이전부터 존재했던 근본적인 인간 조건의 결함으로 제시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창세기 2:18)고 선언하시는 장면,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고립이 결코 개인의 도덕적 실패 때문이 아니라, 인간 존재 깊숙한 곳에 자리한 관계적 갈망의 표현임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구약 히브리어 ‘야히드(yāḥîd)’라는 단어도 단순한 ‘혼자 있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비참함, 고통, 상실, 이런 정서적 색채를 아주 강하게 품고 있습니다. 신약의 그리스어 ‘에레모스(erēmos)’ 역시 비슷합니다. 흔히 ‘광야’로 번역되지만, 이 단어 속에는 물리적 고립과 관계적 단절, 다시 말해 ‘버려진 상태’라는 깊은 정서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해설됩니다.


그렇다면 번역가는 왜 이런 고대의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굳이 현대적 의미를 가진 ‘외로움(loneliness)’을 선택했을까요? 그 이유는, 현대 번역이 더 이상 문자적 일치만을 중시하는 ‘형식적 등가’를 따르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대신 원문이 주려는 정서적 충격과 경험적 의미를 오늘의 독자들에게 가장 생생하게 전달하는 ‘역동적 등가’ 번역 원칙을 따르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다시 말해, 히브리어 ‘야히드’가 담고 있는 그 깊은 비참함과 절박함을 현대 독자에게 가장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단어가 ‘loneliness’, 바로 ‘외로움’이었다는 것이죠 (해석적 적용). 이것은 시대착오적 번역이 아니라, 고대의 경험을 현대 언어의 틀 속에서 가장 충실하게 재현하려는 의도적이고 신중한 선택이었다는 얘깁니다.


결국 번역이란 단순히 단어를 옮기는 작업만이 아니라, 한 시대의 인간 경험을 다른 시대의 독자에게 살아 있는 언어로 다시 되살려내는 작업이라는 웅변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loneliness’라는 단어의 성서적 사용은 바로 그 과정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그러면 그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 보시죠.



1.


외로움은 단순한 개인적 감정의 문제만이 아니라, 흡연에 비견될 정도로 큰 공중 보건 위기로까지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고려할 때, 한 가지 흥미로운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그렇다면 성서는 이 현대적 심리 상태를 어떻게 다루고 있었을까?"


여기서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영어 단어 loneliness, 즉 ‘외로움’이라는 말은 16세기에 처음 등장했고, 지금 우리가 이해하는 부정적이고 심리적인 의미는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리 잡았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근대에 형성된 개념이 어떻게 수천 년 전의 고대 문헌인 성서 번역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 이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근본적인 언어학적 의문이 제기됩니다.


이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 아주 중요한 용어 정리를 먼저 하고자 합니다. 바로 성서 원문이 실제로 묘사한 ‘현상(Phenomenon)’과, 이를 오늘의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번역자들이 선택한 ‘표현(Label)’을 분리해서 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원문은 고대인의 언어와 세계관 속에서 특정한 경험을 서술합니다. 반면 번역은 그 경험을 오늘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의미적으로 대응시키는 과정입니다. 이 둘을 구분하지 않으면, ‘고대인이 어떻게 현대 심리 개념을 썼을까?’라는 혼란이 생기지만, 두 차원을 분리해 보는 순간 문제는 명확하게 정리됩니다.


성서가 다루는 ‘고립’이라는 주제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게 될 세 가지 핵심 개념을 먼저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첫째, 고독(Solitude)입니다. 고독은 자발적으로 선택한 격리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기본적으로 긍정적이고, 때로는 매우 명상적인 경험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기도하기 위해 광야로 물러나셨던 장면이나, 유대교 전통에서 수행자가 하나님 앞에서 혼자 묵상하는 ‘히스보데두스(hisbodedus)’ 같은 사례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즉, 스스로 선택한 고요함, 그것이 고독입니다.


둘째, 황폐함 혹은 버려짐(Desolation/Forsakenness)입니다. 이것은 고독과 전혀 다릅니다. 타인이나, 혹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도움과 보호가 박탈된 상태, 다시 말해 본인이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겪게 되는 강제적 고립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강제적이고 고통스러운 고립—이 성서 원문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핵심 주제입니다. 단순히 혼자 있다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기대지 못하고, 아무도 나를 붙들어주지 않는 상태, 이것이 성서가 묘사하는 황폐함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우리가 현대적으로 말하는 외로움(Loneliness)입니다. 이 개념은 비교적 최근에 형성된 심리적 용어로, 자신이 원하는 관계와 실제로 갖고 있는 관계 사이에 생겨나는 불일치에서 비롯되는 부정적인 정서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우울감, 소외감, 마음속의 공허함이 바로 여기에 포함됩니다.¹


정리하자면, 고독은 원해서 찾아가는 고립, 황폐함은 원치 않았는데 강제로 맞닥뜨린 고립, 그리고 외로움은 관계가 충족되지 않을 때 마음속에서 발생하는 정서적 고립입니다. 이 세 구분을 염두에 두고 나면, 성서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고, 현대 번역이 무엇을 재현하려는지 훨씬 선명하게 보이게 되는 것이죠.



2.


성서가 말하는 고립은 단순히 죄의 산물로 축소되지 않습니다. 성서는 고립을 인간 존재의 구조 속에 내재한 근원적 결함, 다시 말해 인간이 애초부터 극복해야 할 조건으로 다룹니다. 이 점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본문이 바로 창세기 2장 18절입니다.

[창세기 2:18] 최초의 불완전성

창조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좋지 아니하다”라는 평가를 내리신 때가 바로 인간이 혼자 있는 상태를 바라보셨을 때입니다. 여기서 ‘혼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lĕbaddōw(레바도)인데, 이 단어는 ‘분리’, ‘고립’을 뜻하는 어근 B.D.D(badad, 바다드)에서 파생되었다고 합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고립을 창조의 순간부터 문제적 상태로 선언하신 것입니다.²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이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고립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죄 이후에 등장한 결과가 아닙니다. 오히려 타락 이전, 곧 인간이 아직 죄를 짓기도 전에 이미 해결이 필요했던 구조적 불완전성으로 제시됩니다.


이 말은 곧, 인간은 관계를 향하도록 설계된 존재이며, 고립의 고통은 개인의 도덕적 실패가 아니라 배고픔처럼 본질적 필요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신호라는 뜻입니다. 성서는 이 점을 매우 일찍, 그리고 매우 명확하게 선언합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고립의 개념은 단지 특정 단어가 몇 번 등장하는 문제를 넘어, 성서 이야기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적 경험으로 계속 나타납니다.


예를 하나하나 살펴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욥기를 보시죠. 욥은 극심한 고난을 겪는 과정에서 몸이 아픈 것만이 아니라, 친구들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하는 고립감, 그 외로움 속에서 몸부림칩니다. 에스더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스더는 화려한 궁궐에 있지만, 정작 “왕에게 나아가지 못한 지 이미 삼십 일”이라고 말합니다. 권력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철저한 물리적·정치적 고립을 겪는 것이죠. 그리고 성서가 보여주는 가장 깊은 고립의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을 때, 이는 단순한 고통의 표현이 아니라, 신으로부터의 절대적 단절, 곧 신학적으로 가능한 가장 깊은 형태의 고립을 경험하는 순간입니다.



3.

구약 (히브리어)


이제 구약 성서가 사용한 핵심 어휘 자체를 살펴보면서, 성서가 고립을 어떻게 언어적으로 표현했는지를 좀 더 깊이 이해해 보겠습니다. 구약 성서는 사실상 매우 제한된 어휘 안에서 강렬한 고통을 수반하는 고립 상태를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묘사한다는 평가입니다.


먼저, 개인의 고립 상태를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히브리어 단어가 바로 yāḥîd(야히드)입니다. 이 단어의 특징은 서로 정반대처럼 보이는 의미를 동시에 품고 있다는 점입니다.


첫째, 긍정적 의미입니다. yāḥîd는 ‘오직 하나’, ‘단 하나뿐인’, ‘대체 불가능한 존재’를 뜻합니다. 예를 들어 ‘독자(only son)’나 ‘사랑받는 존재(darling)’처럼, 귀하고 유일한 가치를 강조할 때 사용됩니다.


그런데 둘째, 부정적 의미도 아주 강하게 나타납니다. 시편 25편 16절에서 시편 기자가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라고 고백할 때, 바로 이 yāḥîd가 사용됩니다. 여기서 yāḥîd는 고독한, 황폐한, 비참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시편 기자는 죄와 고난 속에서 하나님과 단절된 느낌을 경험하며, 자신을 yāḥîd 상태에 놓여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죠.³


흥미로운 점은 yāḥîd의 어근이 ‘연합하다’를 뜻하는 yāḥad(야하드)와 같다는 점이라는군요. 이 말이 무엇을 시사할까요? 바로, yāḥîd로 표현된 존재는 본래 ‘연합(yāḥad)’의 상태에 있어야 했는데, 그곳에서 끊겨 나와 고립된 상태로 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yāḥîd의 고립에는 단순한 외로움 이상의, 관계가 끊어졌을 때 발생하는 존재론적 고통이 담겨 있습니다.


이제 또 하나 중요한 어근을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어 어근 B.D.D(badad)는 ‘떨어져 있다’, ‘분리되다’, ‘고립되다’는 기본 의미를 가지고 있답니다. 구약 성경 곳곳에서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상태를 묘사할 때 반복적으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어근은 상태의 묘사에 초점을 둡니다. 즉, 누군가가 실제로 분리되어 있다, 고립되어 있다는 바로 그 조건 자체를 말하는 것이죠.


이제 두 개념의 차이가 명확해집니다. B.D.D는 그냥 고립되어 있는 상태, 즉 조건을 말하고, Yāḥîd는 그 조건이 사람에게 미치는 정서적·존재적 영향, 곧 고통과 비참함, 황폐함을 표현합니다.


그래서 번역가들이 심리적 고통을 더 정확하게 드러내고자 할 때, yāḥîd를 ‘외롭다(lonely)’라고 번역하는 경향이 생겼다는 겁니다. 단순히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떨어져 있음으로 인해 마음이 무너지는 상태를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죠.³



4.

신약 (그리스어)


이번에는 신약 성서가 고립을 어떻게 표현하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구약이 감정적 어휘를 통해 고립의 고통을 드러냈다면, 신약은 조금 다른 방식 즉, 공간적 개념과 관계적 단절을 통해 고립을 묘사합니다.



신약에서 고립과 관련해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바로 erēmos(에레모스), 즉 ‘광야’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거의 언제나 물리적 장소, 사막이나 황폐한 지역을 가리킵니다. 예수께서 기도하고 영적으로 재충전하기 위해 혼자 물러나셨던 곳 그 장소가 바로 erēmos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에서 고독은 먼저 ‘어디에 있는가’라는 공간적 조건으로 표현됩니다.⁶


그런데 이 단어가 사람에게 적용될 때는 조금 달라집니다. 개인의 내면 감정보다는, ‘버려졌다’, ‘지지 기반이 끊어졌다’와 같은 외부적 상황, 즉 관계적 단절을 의미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erēmos는 단순히 “외롭다”라는 감정보다도 도움이 사라진 상태, 보호 장치가 제거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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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주목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신약 성서는 현대적 의미의 ‘외로움’을 가리키는 단어나 감정 어휘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신 관계가 끊어지는 순간, 바로 그 관계적 파열을 통해 고립을 드러내게된다는 말입니다.


그 절정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 절규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아람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외침은 단순히 인간적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졌다는 경험, 신학적으로 가능한 가장 깊은 고립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자발적으로 고독을 선택하셨지만, 십자가에서는 의도치 않은 버려짐, 관계의 단절을 몸소 겪으신 것입니다.


신약이 고립에 대해 직접적인 감정 표현을 적게 사용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신약 성서는 철저히 공동체적 관점, 즉 교회(corporate body)의 관점에서 인간을 이해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신약에서 고립은 심리적 감정으로 정의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 혹은 교회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상태, 이 두 가지가 신약이 말하는 고립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 해결책 역시 감정을 달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공동체적 연결, 성령 안의 연합을 통해 제시됩니다. 그렇게 신약의 관심은 외로움 자체보다 고립을 극복하게 하는 관계의 회복에 있다고 해설되더군요.



5.


이제 성서 번역에서 자주 제기되는 중요한 질문 하나를 살펴보겠습니다. 바로 영어 단어 ‘loneliness’, 즉 ‘외로움’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성서 번역에 사용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이해하면, 이 언어적 모순이 자연스럽게 풀리게 될 것입니다.


16세기 이전 — 단순한 ‘물리적 상태’

먼저, 13세기 영어에서 lone이라는 단어는 그저 동반자가 없는 상태, 즉 물리적으로 혼자 있는 상황만을 의미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오늘날 말하는 심리적 외로움의 뉘앙스가 전혀 없었습니다.


16세기 후반 — ‘loneliness’라는 명사 등장

16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오늘날 형태의 명사 loneliness가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 단어 역시 지금의 의미와는 달랐답니다. 그 당시 loneliness는 ‘oneliness’, 다시 말해 혼자 존재하는 상태라는 뜻으로 사용되었고, 여전히 부정적인 정서나 심리적 고통을 담고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19세기 — 현대적 의미의 탄생

그러다가 19세기에 이르러 의미가 결정적으로 바뀌었다는군요. 산업화, 도시화, 개인주의의 확산이라는 거대한 사회 변화 속에서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달라지면서, loneliness라는 단어는 처음으로 관계의 결핍에서 오는 우울감, 소외감, 고통을 의미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집니다. 바로 이때 비로소 우리가 오늘 사용하는 심리적 개념의 ‘외로움’이 형성됐다는 겁니다.⁴


이제 이 역사적 흐름을 염두에 두고 성서를 다시 보면 중요한 사실이 보이게 됩니다. 성서 저자들은 분명히 yāḥîd 같은 단어를 통해 고통스러운 고립의 ‘현실’을 묘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현대적인 심리 용어에 해당하는 표현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즉, 고통스러운 고립이라는 경험은 존재했지만, 그 경험을 설명할 현대적 심리 단어는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따라서 번역자들이 yāḥîd를 ‘loneliness’로 번역하는 것은 고대의 경험을 현대의 언어 안에서 가장 가까운 방식으로 재현하려는 의도적이고 신중한 번역 전략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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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제 마지막으로 오늘 주제의 핵심 가운데 하나인 성서 번역의 이론적 선택을 살펴보겠습니다. 현대 성서 번역은 단순히 단어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고대 텍스트의 의미를 현대 독자에게 어떻게 가장 충실하게 전달할 것인가를 두고 이루어지는 신중한 선택의 결과입니다.


먼저 두 가지 번역 철학을 구분해 보겠습니다.⁵


형식적 등가(Formal Equivalence)는 원문의 단어, 문장 구조, 문법적 형태를 가능한 한 그대로 유지하려는 접근입니다. 예를 들어, yāḥîd를 ‘유일한(one and only)’으로 번역하는 방식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원문을 가장 가까이 보존하는 방식이지만, 때때로 원문이 전달하려는 정서적 깊이가 약화될 수 있습니다.


반면 역동적 등가(Dynamic Equivalence)는 원문의 형태보다 의미와 정서적 영향(impact)을 현대 독자에게 기능적으로 전달하는 데 초점을 둡니다. 이것은 “원문이 당대 독자에게 어떤 효과를 주었는가?”를 고민하며, 그 효과를 오늘 독자에게 똑같이 전달하려는 접근입니다.


시편 25편 16절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NIV나 NASB 같은 현대 영어 번역본은 yāḥîd를 “외롭고(lonely)”라고 번역합니다. 이 선택은 역동적 등가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왜일까요?


yāḥîd가 단순히 ‘혼자 있다’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참함, 고난,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비롯되는 깊은 정서적 고통을 담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대 영어에서 “solitary(고독한)”는 긍정적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가 표현한 절망은 단순한 고독이 아니라 황폐한 내부 세계의 무너짐에 가깝습니다. 이 상태를 현대 독자에게 가장 정확하게 전달하는 단어가 바로 “lonely”인 것입니다. 그래서 번역자들은 고의적으로 이 단어를 선택합니다.


물론 이런 번역이 위험을 동반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즉, yāḥîd가 본래 의미하는 외부적 조건(버려짐)보다 내부적 감정(심리 상태)에 초점을 옮겨버릴 위험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택은 정당화됩니다. 그 이유는, yāḥîd가 묘사하는 고통의 본질을 현대인이 실제로 느낄 수 있는 언어로 가장 효과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번역은 단순한 문자 전달만이 아니라 고대의 경험을 현대의 정서 체계 속에서 살아 있게 재현하는 작업이라는 것입니다. ‘lonely’라는 번역어의 사용은 그 작업의 결과이며, 성서 번역의 깊이 있는 고민이 담긴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7.


이제 전체 논의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성서가 말하는 고통스러운 고립의 경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성서에서 고립은 단순한 주변적 주제가 아닙니다. 창세기 2장에서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아니하다”는 선언으로부터 시작해,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근원적이고 반복적인 주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립의 경험은 히브리어 원문 속에 매우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는 설명입니다.


그런데, 이 경험을 현대 독자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언어적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영어 단어 ‘loneliness’, 즉 ‘외로움’이라는 개념은 19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심리적 의미를 갖게 된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단어가 고대 히브리어의 고립 개념을 번역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을까요?


그 답은 역동적 번역(dynamically equivalent translation)에 있습니다. 번역가들은 히브리어 yāḥîd 같은 단어가 담고 있는 비참함과 절박함의 깊이, 그 감정적 강도를 현대 독자에게 그대로 느끼게 하기 위해, 현대 심리학적 의미를 지닌 ‘loneliness’를 의도적으로 차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원문을 오해한 것이 아니라, 원문의 체험을 현대의 언어로 가장 충실하게 재현하려는 번역적 선택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 중요한 점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고립은 단순히 인간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진단이 아니라는 것이죠. 성서는 인간을 관계를 위해 창조된 존재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고립은 우리가 실패했기 때문에 생긴 부끄러운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과 공동체와의 연결이 부족할 때 울리는 신호, 즉 회복으로 이끄는 신학적 메시지인 것입니다.


성서 속 인물들을 떠올려 보시죠. 욥이 느꼈던 소외, 에스더가 경험한 정치적 고립,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주하신 궁극적 버려짐 등 이 모든 고립은 개인이 가진 결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더 깊은 관계, 더 큰 성숙으로 초대하시는 자리였던 것입니다.


성서는 끊임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연결시키며 고립을 치유하는 길을 제시합니다.


정리하자면,

고립의 ‘경험’은 성서 자체에서 출발했고,

‘loneliness’라는 번역어는 그 경험의 깊이를 현대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한 언어적 다리,

그리고 그 고립의 목적은 인간을 다시 하나님께, 공동체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돌이키도록 초대하는 신학적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외로움을 다스릴 수 있을까요?

거창한 변화보다 아주 작은 관계의 회복이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조금 더 마음을 열어보는 것,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누군가에게 짧은 안부를 전하는 것, 그렇게 관계의 끈을 하나씩 다시 이어가는 것, 이런 작은 실천들이 외로움을 서서히 녹여내는 첫걸음이 되는 것 아닐까요?


여러분 각자의 삶 속에서 평안과 행복이, 그리고 건강한 관계들이 더욱 깊게 자리 잡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1) Loneliness, 2018, Thomas Dixon

2) The Problem of Loneliness, 2023, Jason Gaboury

3) HEBREW WORD STUDY – LONELINESS, 2020, chaimbentorah.com

4) Loneliness Is a Modern Invention. Understanding That History Can Help Us Get Through This Pandemic, 2020, Fay Bound Alberti

5) Against the Theory of ‘Dynamic Equivalence’, 2012, Michael Marlowe

6) Eremos: Guide to the Wilderness, 2024, Dr. John Bech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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