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끝나는 곳에서 감각은 시작된다.

하라리의 다보스 포럼

by 정웅

유발 하라리는 올해 다보스에서 흥미로운 공포를 선물했다. AI가 인간의 언어 능력을 빼앗고 있다는 것이다. 법, 종교, 철학, 계약—언어로 짜인 모든 것이 AI에게 넘어가는 순간, 인간은 스스로 정의해온 자기 자신을 잃는다는 논리였다.


청중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도 잠시 끄덕였다. 그런데 잠깐—그 전제가 정말 맞는 걸까?

하라리의 주장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언어로 생각하는 존재'라는 가정 위에 서 있다. 그 가정이 흔들리면 논지 전체가 흔들린다. 그리고 나는 그 가정이 생각보다 훨씬 흔들리기 쉽다고 생각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C8dig2h8cvU&t=501s

[2026 다보스 대담: 유발 하라리] "인류 역사상 가장 크고 무서운 심리 실험이 시작되었습니다"_ [출처] Colorado Times


I. 문자는 발명품이었다


인류가 문자를 발명한 것은 기원전 3,200년경 수메르에서였다. 호모 사피엔스가 처음 등장한 시점을 30만 년 전으로 잡으면, 우리가 문자와 함께 산 시간은 전체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나머지 99%의 시간 동안 인류는 불꽃의 모양을 보고 위험을 감지했고, 짐승의 발자국을 읽었으며, 하늘의 색으로 내일을 예측했다. 타인의 눈빛 하나로 적인지 동료인지를 판단했다.

이것을 프랑스 미디어 이론가 레지스 드브레는 '비디올로지(Vidéologie)'라고 불렀다. 문자 이전에 이미지와 감각으로 세계를 파악하던 방식. 이건 원시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류의 가장 오랜, 가장 깊은 인식의 층위다. 문자는 그 위에 얹힌 비교적 최근의 발명품이다.


예술과 신화는 인간의 욕망을 가장 감각적이고 굴절없이 드러내보이는 통로이다. 정밀한 언어는 언제나 틀리다. 언어가 정밀할수록 실체는 왜곡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하라리가 경고하는 것, AI가 언어 능력을 빼앗는다는 것은 사실이라도, 그것이 곧 인간 정체성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잃는 건 99%의 역사 위에 얹힌 1%의 발명품에 대한 독점적 지위일 뿐이다.




II. 토큰으로 살 수 없는 것들

AI가 언어를 잘 다루는 것은 맞다. 초당 수백만 개의 토큰을 처리하고, 법률 계약서를 쓰고, 철학 논증을 구성하고, 하라리 본인의 문체로 글을 흉내 낼 수도 있다. 이 영역, 즉 기호와 논리의 세계에서 AI는 이미 인간의 처리 능력을 구조적으로 넘어섰다. 이걸 부정하는 건 고집이다.

그런데 AI는 아직 한 가지를 못 한다.


세계를 몸으로 거주하는 것.

AI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어떤 맥락에서 어떤 단어와 함께 나타나는지 수십억 개의 문서에서 패턴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몸의 두근거림—그것이 어떤 냄새의 기억과 연결되는지, 어떤 빛의 각도에서 더 선명해지는지 '알지' 못한다. AI가 쓴 사랑 편지가 왜 어딘가 이상한 느낌을 주는지, 그게 그 이유다.


철학자 메를로-퐁티가 '지각의 현상학'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의 앎은 언어 이전에 이미 신체에 새겨져 있다. 자전거를 어떻게 타는지 언어로 완전히 설명할 수 없듯이, 삶의 핵심적인 앎들은 언어의 그물 밖에 있다. AI가 언어를 완전히 장악해도 이 층위는 여전히 인간의 것이다—적어도 한동안은.




III. 백남준은 이미 알고 있었다


1965년, 백남준은 「사이버네틱스 예술」이라는 짧은 선언문을 썼다. 인터넷도 없던 시대에, 그는 기술이 통제 사회를 만들어낼 것을 내다봤다.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 제안한 것이 놀랍다.


사이버네이티드 된 삶 때문에 나타나는 좌절과 고통은,
사이버네이티드 된 충격과 카타르시스를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 백남준, 「사이버네틱스 예술」, 1965


독으로 독을 치료한다. 플라톤이 말한 파르마콘(pharmakon)—독이자 동시에 약인 것—의 논리다. 백남준은 기술 통제 사회의 해독제로 더 많은 기술을 쓴 게 아니라, 감각적 충격을 썼다. 음극관의 빛, 전자 신호의 리듬, 신체가 직접 받는 이미지의 타격. 이건 언어적 논증이 아니라 몸으로 받는 충격이다.


그가 '열린 회로(open circuit)'라고 불렀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이버화된 세계에서 흐름이 특정 목적을 위해 포획되고 절단될 때—오늘날로 치면 알고리즘이 우리의 주의를 특정 방향으로 흘려보낼 때—예술은 그 절단된 흐름을 다시 열어 자연스러운 접합이 가능하게 하는 기제였다.


반세기 전 이야기가 지금 더 정확하게 들린다.



IV. 애도, 그리고 귀환

하라리가 「호모 데우스」에서 신처럼 강해질 인류를 그렸다면,

나의 연재글, '호모데우스를 위한 애도.'는 기획의 실패를 미리 슬퍼한다.

AI에게 지적 왕좌를 내어준 인간의 불가피한 상실을 애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애도는 슬픔으로 끝나지 않는다. 성숙한 애도는 더 단단한 주체를 만든다. 상실을 통해 비로소 자신이 무엇인지 더 분명하게 보게 되는 것이다.


AI에게 언어의 왕좌를 내어주는 것—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언어에 너무 오랫동안 위탁해온 삶을 돌려받는 계기일 수 있다.



V. 그래서 무엇이 남는가

하라리의 경고를 다시 읽으면, 그가 실제로 두려워하는 것은 좀 더 구체적이다. 특정 기업이 AI를 장악하고, 그 AI가 인간의 언어적 사유를 대리하며, 결국 소수가 다수의 인식 틀을 통제하는 상황. 이건 타당한 정치적 경고다.

하지만 이 경고를 '인간 정체성의 붕괴'로 과장하는 것은, 결국 하라리 스스로가 테스톨로지적 함정—언어가 곧 인간이라는 편견—에 빠져 있다는 반증이다.


AI가 언어를 장악하는 시대에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이제 무엇으로 살 것인가? 그리고 그 답은, 아이러니하게도, 언어보다 훨씬 오래된 곳에 있다. 신화가 살아 있고, 의례가 작동하며, 예술이 신체를 직접 흔드는 비디올로지의 지층. 그곳은 AI가 아직 완전히 도달하지 못한 영역이다.


백남준이 1965년에 말했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건 AI보다 더 빠르게 언어를 처리하는 능력이 아니다.

AI가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방식으로 세계를 느끼고 사유하는 능력이다.


언어가 끝나는 곳, 바로 거기서 인간이 시작한다. 어쩌면 항상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