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크리스티나 Aug 19. 2021

기분 좋은 날...

그런 날이 있다. 아무 이유 없이 기분이 좋은, 그런 날......


오늘이 내겐 그렇다.


다른 날 보다 조금 늦게 일어난 아침, 오늘은 여느 때보다 많은 꿈을 꾼 날이었다. 쳐다만 봐도 아찔한 절벽에 매달려 있는 나를 영화 속에서나 보던 어느 멋진 장면처럼 척척 구해낸 남편이 그 속에 있었고, 명확한 기억은 없지만 나를 향해 달려드는 악어와 같은 무서운 동물도 있었던 것 같다. 꿈속에서 여러 모험을 한 탓인지, 나는 새벽에 잠깐 잠이 깼다. 시계를 확인하니 너무 이른 새벽이라 찬물을 벌컥 마시고 다시 잠에 들었는데, 또다시 스며든 꿈으로 결국, 잠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 덕에 덩달아 늦게 일어난 남편을 간신히 준비시켜 회사에 보낸 후, 나는 잠시 한강공원에서 산책을 했다. 이렇게 많은 꿈을 꾸고 늦게 일어나기까지 한 기이한 날인데, 공원에서 바라본 하늘은 그저 맑기만 했다. 오늘따라 구름은 또 왜 이리 새하얀지 무뚝뚝했던 내 심장까지 설레게 만들었다.




점점 강해지는 햇살에 바쁘게 발걸음을 옮기는데,  자꾸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꿈이 하나 있었다. 마지막에 꾼 꿈, 그 속엔 10년 전 돌아가신 우리 외할머니가 계셨다.  


외할머니는 나를 참 아끼고 사랑하셨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우리 집에서 생활하셨는데, 내겐 항상 따뜻하셨다. 내장으로 불편했던 시력으로도 할머니는 나를 단번에 알아보셨다. 내 투박한 목소리로, 그리고 체취로...


할머니가 생전에 특별히 좋아하셨던 음식이 하나 있는데, 패스트푸드점에서 판매하는 치킨너겟이었다. 이가 불편하셨던 할머니는 딱딱한 음식을 싫어하셨지만, 부드러운 너겟은 쉽게 잘 잡수셨다. 사실, 왜 좋아하셨는지 물어본 적이 없으니, 이는 왜곡된 기억일 수도 있겠다. 기억은 가끔 세월에 퇴색되기도 혹은 미화되기도 하니깐. 이유야 어떻든 내 기억 속엔 할머니가 좋아했던 치킨너겟이 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의 나는 참 텁텁하고 떫은 감과 같은 사람이었다. 세상을 모르는, 그래서 시야가 좁디좁은 아주 덜 자란 어른.


할머니가 돌아가실 무렵엔 수술과 병원 출입이 잦았다. 그때 할머니의 병간호를 우리 엄마 혼자 오롯이 버티어냈다. 나는 직장 때문에, 다른 누군가는 또 그들만의 이유로... 모두들 무심했고, 세심하지 못했으며, 배려가 없었다. 어느 날, 피곤한 엄마 대신 하루, 겨우 단 하루... 나는 할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입원실에 갔던 적이 있었다.


수척해진 할머니의 얼굴엔 삶에 대한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는 나를 보자 희미한 웃음을 지으셨는데, 오래 지나지 않아 입원실 침대를 다 적실만큼 하혈을 하셨다. 그렇게 많은 피를 처음 본 나는 혼비백산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하기만 했었다. 다행히 간호사가 발견하곤 도움을 주었는데, 그때 내 머릿속을 꽉 채운 건 아픈 할머니가 아니라 우리 엄마의 고단한 얼굴이었다.


며칠 후,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의사의 진단과 함께 할머니는 우리 집으로 다시 돌아오셨다. 그리고 그날, 나는 모진 말 한마디를 할머니 앞에서 쏟아부었다.


"할머니... 요양원에 가시면 안 돼?"


나는 아픈 할머니보다 힘든 우리 엄마가 더 안쓰럽고 애처로웠다. 이젠 우리 엄마가 그만 힘들었으면 좋겠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날 바로 몇 시간 뒤에 할머니가 숨을 거두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는 할머니를 기억나게 하는 모든 것들에 눈물을 흘렸다. 너무 죄송해서, 면목없어서 그리고 보고 싶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치킨 너겟은 할머니가 보고 싶을 때마다 찾아서 먹는 음식이 되고 말았다. 마지막 내가 뱉었던 그 말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아마 마지막으로 내가 눈을 감는 날까지도, 나는 평생 그 말을 후회할 것이다.


가끔 할머니가 꿈에 나온 적이 있다. 한없이 어두운 할머니의 표정엔 항상 외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꿈에서라도 너무 보고 싶은 날, 할머니는 그런 모습으로 내게 왔다. 내가 우리 엄마를 생각했던 마음은 우리 엄마가 할머니를 생각했던 마음과 닮아있었다. 나는 미처 힘들어도 할머니를 직접 모시고 싶었던 엄마의 사랑과 정성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덜 자란 떫은 감이었으니깐.


오늘 내 마지막 꿈에 할머니가 나타나셨다. 생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할머니는 내게 오셨다. 해맑은 미소로 내가 할머니의 손을 붙잡자, 할머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우리 집으로 끌려오셨다. 할머니가 함께 있던 그 집은 참 따뜻하고 밝았다. 나는 그 자체로 행복해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맑은 하늘과 새하얀 구름이 있는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기다림 그리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