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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BI 와비 Jan 06. 2022

시가 앤 시가렛

담배는 극혐이면서 시가는 왜 사랑하는데?

 흡연에 대해 호불호를 가르자면 나는 ‘불호’에 손 드는 사람이다. 흡연 행위에 대한 낭만이나 스트레스 해소 효과에는 어느 정도 공감하나, 간접흡연으로 인한 민폐와 불쾌한 냄새만은 도저히 좋게 볼 수 없다. 주변에서 담배 냄새가 나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홱홱 돌아보며 불쾌함의 진원지를 찾는다. 길빵 하는 사람을 보면 연기를 따돌리기 위해 걸음을 재촉한다. 앞지르는 순간에 비매너 흡연자를 째리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특히 신선한 아침 공기로 간신히 정신을 깨우고 있는 출근길에 마주치는 몰상식한 길거리 흡연자에게는 복화술로 욕을 뱉어주는 것이 일과였다.


 이런 사람이 시가를 사랑하게 되다니, 놀라운 모순이었다. 스스로 납득이 필요했다. ‘시가(Cigar)’와 ‘시가렛(Cigarette)’의 차이가 무언지 생각하기 시작한 이유다. 사전적 구분은 100% 담뱃잎으로 제작한 궐련이 시가, 담뱃잎과 불순물이 섞인 궐련이 담배다. 불 붙이고 입으로 빨아들이는 행위는 유사하나 결코 같다고는 할 수 없는 이유를 원료 함유량의 차이로 구분 짓기엔 부족함이 있다. 이 무용한 매력을 평소 비흡연자이면서 9년 차 시가 스모커이기도 한 사람의 관점으로 들려주고 싶다.


 시가를 태우는 장소는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시가 바(Bar)나 펍(Pub)에 들어서는 순간 쿰쿰하게 스며든 시가의 숙성된 향미는 공기의 결계를 만든다. 시가를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기꺼이 들이마시는 연기의 결계 속에서는 누구도 흡연을 불편해하지도, 방해받지도 않는다.  

시가 박스들. Copyright 2020. xxwabixx All rights reserved.

 시가를 제대로 취급하는 곳은 휴미더(Humidor)라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와인 가게의 저장고처럼 시가에 최적화된 온도와 습도를 갖춘 보관소인데, 규모가 큰 곳일수록 시가의 종류가 다양하게 진열되고 손님이 직접 들어가서 고를 수도 있다. 담배는 편의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돛대일 때 빼고는 아무도 소중히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시가는 신선식품처럼 온도와 습도를 맞춘 특별한 공간에서 하나하나 향미를 맡아보며 고르는 인상 깊은 과정이 있다. 휴미더에는 옅은 물안개 자욱한 이른 아침의 가을 숲 냄새가 배어있다.

시가 클럽에 있는 휴미더. Copyright 2020. xxwabixx All rights reserved.

 마음에 드는 시가 한 대를 골라 값을 치르고 원하는 자리에 앉으면, 테이블에는 사면에 작은 홈이 파인 묵직한 재떨이와 토치(Torch) 라이터 그리고 시가 커터와 자처럼 생긴 빳빳한 종이 두께의 기다란 나뭇조각들이 놓여있다.


 엄지와 검지로 양쪽 칼날을 여닫는 커터로 입이 닿는 부분인 캡(Cap)의 끝을 싹둑 잘라 반듯한 단면을 만든다. 시가는 담배와 달리 흡연하는 부분이 막혀있어서 반드시 이 과정이 필요하다. 이어서 나뭇조각을 잡고 토치를 켠다. 화아악 하면서 내뿜는 강렬한 불길 끝에 얇은 나무를 대고 불을 옮긴다. 시가 보디(Body)를 집게손가락으로 잡고, 끝부분인 풋(Foot)에 불을 붙인다. 캡을 지그시 문 상태에서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빠르게 반복하면 풋이 적당히 타들어 가 한동안 불티가 살아있다. 불을 붙이는 과정은 여기까지. 이때부터 위스키를 곁들이며 천천히 시가를 음미할 수 있다. 단, 연기는 입 안에 머금다가 뱉어야지 들이마시면 안 된다. 뜨겁고 매캐한 지옥을 맛보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지만…  

커터와 시가 Copyright 2020. xxwabixx All rights reserved.

 시가를 고르고 태우기까지 대략의 과정은 이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경험이 없는 사람에겐 굉장히 번거롭고 복잡해 보이겠지만, 한 두 번만 해보면 금방 익숙해진다. 시가 애호가에게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과정이고 설레는 작업이기도 하다.  마치 기다리고 기다리던 택배 포장을 벗겨내는 것처럼 순식간이니까.


 또한 시가와 시가렛은 무엇보다 향미가 다르다. 담배는 맛을 느끼기 위해 피우지 않는다. 연기를 폐까지 들이마신 후 코로 내뿜지만 음미하진 않는다. 시가는 입 안에 머금다가 내뱉지만, 충분히 연기의 향을 음미한다. 흡연자가 시가를 시도할 때 많이 헷갈리는 부분이다. 어떤 이는 습관처럼 연기를 삼켜서 매우 괴로워한다. 담배에도 물론 맛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긴 하다. 멘톨 캡슐, 포도 캡슐 등 필터를 깨물면 톡 터지면서 인위적인 향이 입 안에 퍼진다. 딸기 '맛' 우유 같은 것이다. 가성비를 따지면 딸기 맛 우유도 나쁘지 않고 심지어 맛있을 때도 있지만, 진짜 딸기를 갈아 넣은 우유를 먹으면 그 인공적인 맛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소주와 위스키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소주는 삼겹살이나 곱창과 마실 때는 환상적인 궁합이다. 인생이 쓸 때는 이만큼 다디단 술도 없지만 강소주만을 즐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에 비해 위스키는 그 자체에 고유한 향과 맛이 있어 안주 없이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소주가 시가렛이면, 위스키는 시가인 것이다.   


 이따금 멀리 떠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손쉽고 무용한 이런 짓들을 즐긴다. 여행지에서의 시간은 즐겁지만, 실제 여행의 전후 과정은 너무나 번거롭기 때문에, 여의치 않을 때는 시가처럼 속성 여행을 보내주는 취미 활동을 좋아한다. 쿠바에 가보지 못한 사람이라 오히려 마음껏 스테레오 타입을 펼치는 황홀한 여행이다. 한 호흡 한 호흡 태울 때마다 그동안 마음에 담아둔 이미지들에 상상력을 더해본다. 비비드한 색채의 건물과 야자수 사이로 작열하는 태양 빛이 연기 사이로 아른거린다. 하나를 거의 다 태울 즈음 니코틴 과다로 살짝 핑 도는 순간, 나는 한쪽 눈썹을 치켜 세운 채 페도라를 눌러쓴 쿠바 사람이 되어 세상 맛있게 시가를 음미하고 있다.


 오늘도 양치질만 꼼꼼하게 하고 잠들면 되는 편의적이고 황홀한 일탈을 만끽했다.

       서울시가클럽. Copyright 2020. xxwabixx All rights reserved.
서울시가클럽에서. Copyright 2020. xxwabixx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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