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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 같은 발음, 프리츠

에세이

by 희원이

“Fritz,”

선생님은 내 이름을 발음하며 따라해 보라고 했다. 모두에게 한 번씩 자기 이름을 각인시켜주는 수업이었다.

고1 회화수업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프리츠라는 이름은 발음할 때도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프’에서 시작해 ‘리’에서 짧게 멈추고, 마지막 ‘츠’에서 딱 떨어지는 느낌.

그 소리는 나름 경쾌하지만 어딘가 단호하고 무뚝뚝했다.


나의 평소 말투와는 사뭇 다르게 들렸고,

그 어감은 독일어 수업의 냉랭한 분위기와 어딘가 모르게

닮아 있었다.

발음을 내뱉는 순간, 그 단어에 담긴

짧고 굵은 힘을 느꼈다. 마치

전장 속에서 신호를 보내는 목소리처럼.


독일어 이름이 ‘프리츠(Fritz)’로 정해졌을 때, 나는 그 이름이 주는 간결함과 기묘한 어감을 그저 받아들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이름은 내게 점점 악몽과도 같은 과제로 남았다.


그 이름이 불릴 때마다 내 머릿속은 마치 고요한 새벽의 모닝콜 소리에 깨는 듯한

불쾌한 울림이 있었다. 딱히 정말로 객관적으로 싫은 발음이라기보다는

내게만 싫은 느낌의 단어. 원래 방학 숙제는 다 싫은 법이듯.


마음속으로 그 소리를 따라 했지만,

발음은 혀에서 쉽게 풀려나오지 않았다.

낯선 언어와의 싸움, 그리고

작은 패배를 상징하는 이름이었다.


그 발음은 마치 얼음장 같은 냉기를 품고 있어 매번 입을 얼게 만들었다.

억지로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는 것처럼,

억지로 내 목소리를 끌어올려 “프리츠”를 발음했다.


“다시 한번 해보세요, 프리츠,”

선생님은 다시 한번 ‘프리츠’라는 이름을 바로 내 앞에서 또박또박 강조하듯 발음했다. 독일어 단어들은 혀 위에서 서로 부딪히며 굴러 떨어졌다. 그 발음들은 차가운 눈발처럼 입안에서 휘몰아쳤고, 나는 결국

어색하게

멈췄다.


그 순간 심장이 얼어붙었다. 프리츠라는 이름은 마치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비틀며 나를 놀리는 아이처럼 느껴졌다.


선생님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미소는

친절하려 했지만,

마치 종이 위에 잉크가 번지는 것처럼

무거운 부담으로 다가왔다.


다시 시도할 때마다 발음은

삐걱거렸다.

오래된 나무 바닥을 걷는 발소리 같았고,

짧은 단어 프리츠에 뜻하지 않은 암초가 있었다는 걸 알고야 말았다.

한 음절 혹은 1.5음절 정도의 분량으로 ‘프·리·츠’를 발음해야 했던 것이다.


발음을 묘사하기가 어렵긴 하지만 굳이 해보자면, ‘프리―쯔’로 앞 음절에서 급격히 추락하듯이 발음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독일어의 ‘r’ 발음은 특히 난제였다. 목구멍 깊숙이에서 진동을 일으키며 내뱉어야 했는데,

흔히 구취제거제를 입에 문 채 목젖을 떨며 ‘어어어’ 하거나,

코를 골 때 울리는 소리라고 하면 될 것이다.

‘r’은 그 ‘르’인 것이다.


전화기가 따르릉 할 때 그 떨림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샌드백을 빠르게 칠 때 부르르 떨며 제자리에서 맴도는 그것의 파동 같은 것이요,

전기면도기의 ‘윙’ 하는 떨림이면서도,

추를 들었다가 놓았을 때 고정대를 그대로 둔 채 쉼 없이 똑딱이는 추의 움직임을 닮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r’은 한국어의 단절적인 음과는 조금 달랐다.

‘R르르……’인 셈이다.


그 발음이야말로 독일어 수업의

최대 난관이라 여겼다. 매번 시도할 때마다,

‘프리츠’라는 이름은 두려움과 얽히는 단어로 남았다.


“프리츠… 프리츠…”

‘프리츠’라는 단어는 더 이상 나의 이름이 아니라, 나를 시험에 빠뜨리는 고난의 상징이 되어갔다.

마치 자기 최면을 걸 듯 발음을 반복했다. 그러나 그 발음은

혀에서 쉽게 굴러가지 않았다.


그의 발음을 따라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계속 고개를 저었다.


발음을 익히는 데만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 2주일 틈나는 대로

따라 하게 하더니

결국 포기했는지,

아니면 근사치에 갔다고 여겼는지

더는 발음을 걸고넘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독일어 발음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프리츠는 고등학교 시절의 한 페이지였다.

때로는 무겁고 때로는 얄궂은

역사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지만,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할 때마다 이제는 친구 같다.


하지만 그때는 그저

잘못 고른 그 이름이 더는

나를 괴롭히지 않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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