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과 깍두기

by 영글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출신, 6남매 중 장남으로 가부장제를 그대로 답습하며 자라온 아버지가 꾸린 가정에서

3녀 1남 중 둘째 딸로 태어난 유교걸인 저는, 네, 여기까지만 들어도 쉬이 짐작하시다시피 자라는 동안 이래저래 억울하고 서러울 일이 많았답니다.


그중에서도 제일은 서러운 마음 털어놓기를 잘 못하고 그저 혼자 꽁해있길 잘했던 제가

용기를 내어 왜 언니만 그거 해줘, 왜 막내만 그거 해줘?라고 따지고 들 적마다 돌아오는 것은

“너는 그거 안 좋아하잖아.” 소리였는데요.

저는 정말이지 지금도 억울한 게 그거 안 좋아한 적 한 번도 없었거든요.

나도 피아노 학원에 가고 싶었고 최신형 휴대폰도 갖고 싶었으며, 브랜드 운동화를 신고 수험 시절엔 보약도 먹고 싶었다고요.

그래서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온몸의 힘이 주욱 빠지며 여지없이 혼자서 훌쩍였어요.



어쨌든 간에 이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주렁주렁 애 넷을 키워내느라

엄마 아빠가 얼마나 바빴을지, 그래서 말 없는 이 둘째의 마음까지 헤아리기는 얼마나 어려웠을지

이해하기까지는 2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습니다만

그래도 여전히, 가끔은,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억울함을 껴안고 삽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이 시국에 1년 간의 해외 생활을 마치고 입국을 하게 되어 2주 간의 자가격리 기간을 갖고 있는데요.

지내고 있는 숙소는 지금은 병원에 있는 이모가 살던 아파트로

제가 들어오기 이틀 전쯤 엄마가 쓸고 닦고 냉장고를 간단히 채워두고 가셨어요.

우여곡절 끝에 이 곳에 들어와 냉장고를 열었을 때,

깍둑 썰어진 수박과 깍두기 김치가 들어있는 걸 보고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습니다.

수박과 깍두기. 이 두 가지가 제가 좋아하는 것 중 엄마가 아는 전부였던 것 같아요.


그리하여 저는 앞으로 남은 시간에,

엄마에게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또 무엇을 싫어하는지

엄마는 무엇에 행복하고 무엇에 우울해하는지를 오래도록 묻고 답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수박은 아주 달고 시원했으며 깍두기는 새콤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