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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결혼대신 야반도주
By 서른 결혼대신 야반도주 . Jul 11. 2017

1유로의 행복

리스본, 포르투갈





벌써 3주째,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쉰내’라는 놈이 내 발을 스멀스멀 점령하고 있다. 이젠 개미가 발등 위를 사이좋게 줄지어 기어가는 듯한 환각마저. 문제는 여행을 떠나기 전 비장하게 고심해 골라온 샌들에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쪼리를 챙겨 오지 않은 멍청함에 있었다.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설적인 하루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면 오늘도 잘 살았다 자위하며 구석구석 몸을 씻었다. 개인 욕실이 딸린 방에 묵을 리가 없는 우리는 당연히 도미토리와 공동욕실을 오가야 한다. 옷가지와 세면용품이 들어있는 40리터 배낭과 신발 두 켤레(트레킹 운동화와 스포츠 샌들)가 전부인 단출한 살림이다. 맨발로 욕실을 향할까 했지만 지저분한 바닥을 즈려밟으며 돌아온 발로 침대 위를 올라간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둘 중에 하나를 골라 신어야 했고, 답은 언제나 스포츠 샌들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물에 닿아도 탈탈 털어주면 금세 보송한 민낯으로 돌아오는 고무 밑창은 욕실화의 용도에 꼭 맞았다. 하나 물에 젖으면 볕 좋은 야외에다 족히 반나절은 말려야 할 두툼한 직물 끈이 말썽이다. 종일 밖에서 흙 맞고 돌아다니느라 텁텁해진 샌들을 신은 채로 샤워를 마치면 여지없이 두꺼운 끈이 축축이 젖어버리는 것이다. ‘이쯤이야’라며 시크하게 공중에 서너 바퀴 힘차게 돌려주고 침대 옆에 곱게 널어두는 것 까지는 괜찮았다. 다음 날 25%가량 미심쩍게 덜 마른 샌들 끈을 목도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신고 돌아다니면 금방 보송하게 마를 것이야'란 긍정적인 사고로 주저 없이 발을 끼워 넣기를 여러 날.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조상님께서 말씀하셨던가. 여러 겹의 덜 마른 직물이 부대끼며 억지로 마를 때 생기는 미약한 쉰내(a.k.a 걸레향)가 차곡차곡 쌓여 그 위용을 뽐내기 시작했다.      


불편하고 찝찝한 건 오래되었지마는 여행 초장부터 사치품(그때만 해도 쪼리는 사치품이라 여겼다.)에 돈을 쓸 수 없었다. 선임이라고 다른 상황은 아니었다. 내 것과 달리 끈은 얇아 잘 마르지만 신고 벗는 버클 조절이 어려워 샤워를 마친 뒤 늘 샌들을 발등에 대충 걸친 채 질질 끌며 좀비 스텝을 밟는 것이다. 샌들과 달리 엄지와 검지 발가락 사이로 끈을 쏙 끼우기만 하면 되는, 신고 벗기 세상 편한 고무 쪼리가 너무도 필요했다. 그때부터 쪼리는 사치품이 아닌 필수품이 되었다. 


야, 까짓 거 당장 사자!


입을 모았으나 현실은 쭈구리였다. 한 켤레에 15유로를 거뜬히 웃도는 가격에 매번 지갑을 봉인하고 돌아섰다. 술 열심히 챙겨 먹은 돈이면 충분히 살 수 있었을 테지만 신발의 불편함은 음주의 즐거움을 포기하는 데에 전혀 위협을 가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2000원이면 살 수 있는 놈을 그 열 배의 값을 주고 산다는 게 영 기분 나빴다. 미리 준비하지 못한 아둔함을 돈으로 맞바꾸는 것 같아 별거 없는 자존심이 구겨졌다.      


남들한테 줘도 안 가져갈 개똥 자존심으로 버티길 3주, 참을 만큼 참았다. 비싸고 뭐고 이제 그냥 사버리자 벼르고 있는데 이곳 리스본에 벼룩시장이 열린다는 고급 정보를 입수했다. 이름하야 도둑 시장- 도둑이 장물을 내다 팔기도 한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란다. 집에서 쓰던 담요부터 수제 타일까지 종류가 가늠할 수 없이 다양하다고 하니 이것은 얼른 저렴한 쪼리를 찾아보라는 계시였다. 광장에 가쁘게 도착하자마자 매의 눈으로 시장을 스캔했다. 

     




이걸 누가 돈 주고 사나 싶은 머리가 어디 날아간 인형부터 귀에 걸면 없는 미모도 끌어올 것 같은 고급 핸드메이드 장신구, 마누라가 궁둥짝을 후려 차기에 억지로 나오듯 한 아저씨, 꽃 장식이 된 모자까지 쓰고 잔뜩 멋을 낸 숙녀분까지. 팔리는 물건도, 파는 사람도 어찌나 다양한지. 하나 고급스러운 스카프가 깔린 테이블 위에 진열된 물품들은 우리의 타겟이 아니다. 바닥에 날것으로 널브러진 값싼 물건들이 목표- 





소싯적에 산처럼 쌓인 장당 5천 원짜리 옷더미 사이에서 보물 같은 옷가지 낚시 좀 해본 실력으로 시장을 샅샅이 뒤지기를 30여 분. 빈티와 짠내가 동시에 줄줄 흐르는 쪼리를 찾았다. 괜찮았다. 가격이 1유로였으니까. 방금 전까지 누가 신다가 잠시 벗어놓았다고 해도 믿을 만큼 발바닥 자국이 선명히 패어있지만 괜찮다. 1유로니까. 아무도 관심 주지 않는 너절한 모양새임에도 누가 먼저 채갈까 급히 아저씨께 1유로를 쥐어드렸다. 이제 하나는 되었다, 하나만 더 찾아보자. 박차를 가해 또 이 잡듯 뒤지기를 10여 분. 날렵해 보이는 쪼리를 발견했다. 디자인이 잘 빠져서가 아니라, 밑창이 종잇장처럼 얇아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신자마자 돌바닥의 울퉁불퉁함이 선명하게 발바닥에 전해졌다. 건강하게 지압한다 생각하지, 뭐. 2유로를 외치는 주인아저씨께 혀 짧은 포르투갈어와 갖은 애교를 얹어 1유로만 전해드리고 돌아섰다.     


“꺄악! 드디어 샀다! 그것도 1유로에!”


정말이지 허름한 쪼리를 가슴팍에 소중히 안자 기분이 좋아졌다. 바로 보틀샵으로 향했다. 늘 지독하게 절약한 돈으로 아낌없이 그 지방 술을 사 먹는 자기 맞춤형 소비습관이다. 포트 와인을 끊임없이 권하시는 연세 지긋하신 사장님의 추천을 애써 뒤로 미루고, 예서 유명하다는 그린 와인을 숙소로 데려와 망설임 없이 뚜껑을 땄다. 2유로짜리 선임이 쪼리는 비싸다고 1유로에 깎아 샀구먼, 술값 7유로는 지갑에서 망설임 없이 꺼냈다니 늘 그랬지만 웃음이 나왔다. 생각해보니 실로 오랜만에 적은 돈으로 이리 즐거웠다.      


파릇한 대학생 시절, ‘헉’ 소리가 나는 비싼 등록금에 알바를 죽어라 해도 손에 쥐는 것보다 빚이 쌓였다. 뭘 사고는 싶은데 10원이라도 허투루 쓸 수 없는 주머니였다. 선임이와 정상회담급 회의를 거쳐 고른 1000원짜리 매니큐어, 500원짜리 점보 지우개에도 흥겨웠다. 책가방 대신 등에 빚을 짊어지고 나간 사회 초년생, 여전히 상서민의 주머니였지만 해를 더하며 빚을 깎아나가는 재미를 맛봤다. 사회생활 5년 차, 학자금 대출을 다 갚아갈 무렵엔 수입은 한층 늘었지만 작은 즐거움을 느낄 여유는 줄어들었다. 그리고 어느덧 벌이와 맞바꾼 스트레스를 소비로 풀고 있었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마시는데 쓴 술값, 꼭 필요하지도 않은데 산 화장품… 그렇게 해서 기분이라도 나아지면 좋으련만, 돌아오는 길엔 늘 헛헛했다. 돈으로 찰나의 행복을 사고 있었던 것이다. 떠나오니 그게 선명하게 보였다.      


게스트 하우스 주방에 있는 싸구려 유리컵에 와인을 그득 따라 건배했다. 혓바닥에 달콤하게 닿아 목구멍에서 알알이 터지는 그린 와인의 청량감이 평범하지만 특별한 오늘을 축하하기에 퍽 어울렸다. 1유로짜리 쪼리가 명품 구두보다 소중한 이 순간이 즐겁다. 작은 기쁨 앞에 인색하지 않은 내 모습이 좋다. 넉넉지 않은 여행경비에서 사치와 절약을 줄 타는 고민이 행복하다. 아직 남아있는 와인과 발가락에 끼워놓은 쪼리를 바라보고 있자니 오늘 하루도 멋대로 잘 살았다 싶다.    


Written by_김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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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지기 친구놈과 함께한, 718일간의 세계일주-
믿음, 소망, 사랑 중 '개그'를 제일로 칩니다:)
www.yabandoj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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