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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결혼대신 야반도주
By 서른 결혼대신 야반도주 . Sep 05. 2017

잘 하는 놈, 못 하는 놈

마라케시, 모로코






유독 그런 날이 있다. 평소와 달리 갑작스럽게 생긴 즐거움에, 무엇이든 해보고 싶고 어떤 것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합을 이루는 그런 날. 아침에 알람 없이 눈을 떴는데 출근시간이 아직 한참 남아있다든지, 대충 손 닿는 대로 집어 입은 티셔츠와 바지의 구색이 썩 어울린다든지, 정류장에 닿자마자 코앞에 버스가 바로 선다든지, 들어서자마자 뒤 창가 자리가 났다든지. 무엇이었을까? 어떤 즐거운 보너스가 생겼길래, 오늘 선임이에게 망할 놈의 자신감이 강림했을까? 사하라 사막 투어를 예약하러 가는 길, 지도를 들고 환히 웃으며 설치는 모양이 매우 불안하다.     


누구나 강점과 약점이 있다. 조금만 신경 써도 손쉽게 해낼 수 있는 분야가 있는가 하면, 남들의 몇 배를 노력해도 쉬이 따라갈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위선임의 약점은 공간지각이다. 아니, 약점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조물주께서 선임이 뇌를 빚으려는 찰나 재채기를 하신 듯하다. 공간지각을 관장하는 부분이 잔뜩 찌부러진 게 틀림없으니. 녀석의 세상은 2D로 이뤄져 있는 듯하다. 공간이 아닌 선이나 면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다. 공간 파악이 안 된다는 건, 곧 길치로 이어진다. 넓은 약속 장소 근처에 도착해서 어디냐고 물으면 ‘어느 건물 앞에 서있어’가 아닌 ‘지금 옆에 빨간 자전거 지나갔어’라고 말하는 사람, 술 먹다가 화장실에 가면 건물 안에서 길을 잃는 사람, 밤에 간 길과 낮에 간 길을 전혀 다르게 기억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선임이다. GPS가 장착된 스마트폰 지도가 세상에 나오기 전 녀석과 약속을 정할 때면 ‘어디 어디 술집’으로 오라 하지 않았다. 모두에게 그렇게 장소를 공지해도 선임이에게만큼은 ‘너 뭐 타고 와. 어디서 내려.’ 녀석이 탑승한 교통수단과 하차역을 확인한 후, ‘그냥 거기 있어. 데리러 갈게.’ 라 말하고 일행 중 한 명이 데리러 나갔다. 친구들이 유독 고운 심성을 가져서는 아니었다. 다년간의 깊은 빡침으로 그 방법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것을 모두가 깨달은 뒤였다.      


그런 녀석과 세계여행을 떠나왔다. 열 살 때부터 살았던 동네에서도 간혹 길을 잃는 놈과 말이다. 순간순간 낯선 길을 만나는 여행자가 된 것이다. 숙소 찾기, 버스 정류장 찾기, 은행 찾기. 찾아야 할 곳이 넘치는데 빌어먹게 길을 헤맨 뒤에도 본인은 늘 새로운 길을 걸으니 지루하지 않다고 빙구처럼 해맑게 웃는다. 버리고 갈 수도 없고 거참… 세계여행은 무슨, 나 아니었으면 첫 도시인 마드리드에 있다가 인천에 다시 들어갔을 놈이다. Wi-fi도 없는 길바닥에서 괜히 숙소 찾는 일을 맡겼다간 무거운 배낭을 등에 메고 빙글빙글 돌기 일쑤니, 당연히 길 찾기는 내 몫이 된 지 오래였다.     


그런 선임이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오늘은 자신이 길을 안내하겠다고 나섰다. 못한다고 아예 안 했더니 퇴화하는 것 같다며, 의존적으로 변해가는 스스로의 모습이 싫다며, 믿고 맡겨보란다. 진심으로 믿음직스럽지 않지만 녀석이 저 정도 열정이 뻗쳤을 때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숙소 사장님이 이것저것 표시해주신 지도와 나침반 기능이 있는 휴대폰을 손에 들고 눈을 매섭게 뜨는 모양이 각오를 대단히 한 모양이다. 스치며 읽었던 육아전문가의 말이 떠올랐다. 이럴 때 믿고 맡겨야 자존감을 키울 수 있다. 세상 똑 부러지게 일처리를 하다가도 길만 찾을라치면 ‘애’가 되는 녀석을 ‘키우는’ 기분으로 일부러 지도 귀퉁이조차 눈길 주지 않았다. 한 마디도 얹지 않고 일임해볼 생각이다. 마음을 굳게 잡순 듯 자신 있게 숙소 문을 열어젖힌 선임이 뒤를 따라나섰다.     


 



돈만 내면 무제한으로 데이터를 쏴주는 한국에서야 내비게이션 앱을 어디서든 사용할 테지만, 유심칩 하나, 데이터 조금 살 돈으로 근사한 술 몇 병 더 받아먹자는 우리들은 다소 클래식한 방법으로 길을 찾았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마른 도시, 길바닥 위에서 영화 포스터만큼 큰 지도를 폈다 접었다 돌렸다 뒤집었다를 여러 번. 시작부터 난항이다. 첫걸음을 떼는 자식을 보는 심정이 이것일까? 첫 콩나물 심부름을 보내고 뒤에서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불쑥불쑥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쳐 오르지만 꾹 누르고 여유 있게 하라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내 말이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녀석은 나침반 기능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손에 쥔 휴대폰을 이리저리 돌리기 바쁘다. 저러다 터널 증후군이 걸리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다. 뜻대로 잘 되지 않는지, 나침반과 지도 탓이 아닐 텐데도 멀쩡한 연장 탓을 하며 연신 미간을 쭈그린다. 몇 걸음 걸을라치면, 멈춰서 지도를 봤다가 또다시 발을 뗄라치면 휴대폰을 돌렸다가. 의미 없는 좌회전, 우회전, 유턴을 얼마나 반복했을까. 안 되겠던지 아예 바닥에 지도를 펼쳐놓고 엉덩이를 철푸덕 깔아버렸다.      


미숙하지만 그래도 천천히 잘 찾아가고 있길 바라며 무심한 척 뒤를 따랐다. 선임이가 지도를 확인하려 멈추는 횟수보다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는 횟수가 많아진다. 길을 잃은 게 아닌가-하는 의심이 올라오는 순간, 숙소 사장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생각났다. 사막 투어 예약하러 갈 거라는 우리에게 지도에 친절히 동그라미까지 쳐주시며 투어 회사가 밀집한 길이 쇼핑의 거리라며 자랑하셨던 것이다. 나간 김에 이것저것 구경하고 즐겁게 놀다 오라는 말과 함께. 한데 지금 걷는 길은 쇼핑센터는 고사하고 사람도 잘 뵈질 않는 골목길. 번화가는커녕 마라케시의 골목만 구석구석 쑤시고 있다. 의심의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 끝은 창대한 확신이 되었다. 우린 길을 잃었다.  


   



이 또한 여행이려니, 마음을 비웠다. 몇 시까지 예약하러 가기로 약속된 것이 아니다. 오늘 못 찾으면 내일 찾으면 되는 일인 것이다. 길을 잃은 게 아니라 마라케시를 여행하는 중이라고 마음 하나 바꿔 먹었을 뿐인데 갑자기 여유가 생겼다. 골목 구석구석 사진도 찍고, 지나치는 초등학교 건물도 들여다보고, 벤치에 앉아서 사람도 구경했다. 그런 나와 달리 큰소리치던 선임이의 어깻죽지가 너덜너덜, 갈 곳 모르고 흔들린다. 가여운 놈. 괜찮대도, 그냥 이렇게 골목 구경이나 하재도, 다시 길을 찾겠다며 허둥지둥 나선다. 큰소리치며 걷던 녀석의 뻗친 걸음이 힘없이 흔들린다. 수없이 펼쳤던 지도를 또다시 펼쳐 휴대폰 나침반을 돌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본인만 따라오라며 잔뜩 나댔던 게 어지간히 창피한 모양이다. 텅 빈 눈으로 지도 이곳저곳을 헤매면서도 당황한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 턱에 얼마나 힘을 줬는지, 호두껍질처럼 쭈그러진다.     


안쓰러울 지경이다. 자존심에 포기하겠다는 말도 못 할 녀석을 위해 내가 나선다. 절대 보지 말라던 지도를 억지로 빼앗아냈다. (녀석은 못 이기는 척 건넸다.) 길 찾기의 달인, 김멋지가 나섰으니 곧 사하라 사막 투어를 예약할 수 있을 것이다. 희망이 뭉실 차오르는데, 이게 웬걸. 처음부터 지도를 못 본채로 한참을 헤맨지라 현재 좌표를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우선 좁은 골목을 빠져나와 랜드마크가 될 법한 건물을 찾았다. 이 놈이 저 놈이고, 저 놈이 그놈 같은 미니멀리즘 모로코 건물들이라 지도의 그림과 대조가 쉽지 않다. 가뭄에 콩 나듯 지나는 행인에 물어물어 간신히 현재 좌표를 인식했다. 대체 경로를 알 수 없는 황당한 곳에 서 있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맛있게 먹는다고, 길도 잃어본 놈이 화끈하게 잃는구먼.  


    



우리가 서 있는 곳을 찾으니, 지도 보며 길을 찾아가기란 누워서 잠자는 것만큼이나 쉽다. 곧 찾던 길이 나타났다. 2시간 만이다. 이 작은 도시 마라케시를 한 바퀴 빙 돌아도 남았을 시간이다.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지친 상태로 걷는데 이리저리 호객행위가 들어온다. 크게 잴 것 없이 익숙하게 들어본 곳에 들어가 사하라 사막 투어를 예약했다. 그래도 용케 찾아서 예약했다며 웃으며 길을 걸어 나가자 멀리 큰 광장이 눈에 들어온다 ...응? ...어?” 선임이 얼굴이 구겨진다. 저곳은 매일같이 기어 나와 밥 먹고 게임하던 광장이 아닌가.     


“뭐야, 잠시만, 지도 다시 좀 줘봐.”      


...뒤통수가 묵직해졌다. 헤맨 곳에서부터 정신없이 찾아오느라 지도를 봤던 나도 이제야 눈치챘다. 사하라 사막 투어 회사는 숙소와 직선거리로 1km 남짓밖에 안 되는 곳이었다. 심지어 늘 오던 광장이 옆에 떡하니 그려져있다. 구부러진 골목까지 생각해서, 아무리 넉넉하게 잡아도 1.5km 남짓 떨어진 곳을 2시간에 걸려 온 것이다. 새끼손가락으로 코 후비기만큼이나 쉬운 일을 이렇게 어렵게 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내가 지도를 봤더라면 광장을 통해 바로 왔을 텐데, 이렇게 오래 걸리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 이 기가 차는 사건을 만들어내신 주인공을 쳐다봤다. 본인의 찬란했던 자신감이 바닥에 뒹굴고, 사투의 2시간이 괜한 개고생이었음을 느낀 녀석은 무안해하고 미안해하느라 바쁘다. 연신 지도를 펼쳤다 접었다 유난을 부릴 때부터 참았던 한 마디를 던졌다.    

  

앞으로, 잘 하는 놈이 잘 하는 거 하자.   


못 하는 놈이 머쓱하게 웃는다.



Written by_김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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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지기 친구놈과 함께한, 718일간의 세계일주-
믿음, 소망, 사랑 중 '개그'를 제일로 칩니다:)
www.yabandoj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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