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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lli Aug 10. 2024

잘 지내고 있던가


얼마 전에 정신의학과에 가서 상담을 받았다. 대단한 일인 것 같지만 사실 대단한 일도 아니다. 초진 예약 전화를 했더니 한 달 뒤에 전화하라는 걸 보면 이비인후과만큼 정신의학과를 찾는 사람도 많은 모양이다. 원래 예약 시간은 5시였지만 가서도 30분을 기다렸다. 이렇게 마음에도 감기가 잘 걸리는데 그간 왜들 그렇게 아등바등 살고 있었을까.


그래 솔직히 말하면 꽤 오래전부터 타나토스에 대해 생각해 왔어. 누군가 날 혼낼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어째서 나는 나를 파괴할 자유조차 누리지 못하는 것인지, 고작 이런 감정과 기분과 일상에 치이면서 살아야 하는 게 앞으로도 딱히 답이 보이지 않는데 아주 오래전부터 아주 어릴 적부터 삶이라는 건 즐거움 따윈 별로 없는데 어째서 살아야 하는지. 부모님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왜 나에게 이런 생에 대한 고통과 집착을 주었는지 어느 순간부터 나의 소원은 오로지 평안 밖에는 남지 않았어. 사실 바라는 것도 없고 갖고 싶은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어.


있지도 않은 식욕을 꺼내어보려 요리 영상을 보다 아주 간단해 보이는 음식들도 내가 만들면 다 맛이 없고 비리고 버리고 싶고, 내 입술은 하나이고 어울리는 색은 뻔한데 이번 가을에 산 틴트만 해도 벌써 10개가 넘어. 알고 있지 입지도 못할 옷을 계속 사재 낀다는 걸, 감당하지 못할 힘듦에 마주할 때마다 별로 갖고 있지도 않은 돈을 계속 써버린다는 걸, 조금 전에도 다이소에서 5만 원이나 쓰고 왔어, 5000원짜리를 잔뜩 샀더니 그렇더라. 이런 거 그만하려고 하지만 별다른 방법을 모르겠어.


아이유가 그랬는데 자기는 이런 감정에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몸을 움직이고 청소를 한대, 나도 한바탕 울고 나서 따뜻한 걸 먹으면 조금은 나아진다는 거 정도는 알게 되었는데, 그냥 이따위 감정에 사로잡아 먹혀서 사라져 버렸으면 하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야. 담배를 피워볼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웃기게도 옷에 담배냄새가 배는 건 싫더라고. 인스타에 징징대는 글을 쓰면 곁에 있는 다정한 친구들한테 걱정 끼치는 것 같아 미안해서 이제는 그만 징징대려고. 인스타에는 원래 불행이 없는 법이잖아. 알고 있어 타인의 고통만큼 보기 불편한 건 없다는 걸. 울고, 밥 먹고, 글을 토하면, 내 기분은 조금 나아졌다만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아서 이제 그만두려고.


죽고 싶진 않지만 살고 싶은 것도 아니야. 어느새 의미는 없어지고 매일매일 해야 할 과업에 치여사는 삶을 감당하기가 어렵네. 그렇다고 누구한테 맡길 수도 없어. 내 일인 걸,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인 걸, 아무리 해도 해도 끝이 없지만 내 문제인걸. 오랜만에 어제 하루 아무것도 안 하고 쉬었더니, 토요일이라고 밥만 먹고 잠만 잤더니 부메랑처럼 다음 주에 할 일이 엄청 늘어난 기분이야. 알아 그렇다고 내가 누구들처럼 밤 10시까지 야근하고 그런 건 아니야. 배부른 소리일 뿐이지. 칼퇴도 할 수 있고 집에 10시 전에 올 수도 있어. 그저 예능보고 밥 먹고 쉬면 일이 배로 늘어날 뿐이야. 작은 일 하나에도 해결해야 하는 일이 4-5개가 달라붙어. 그걸 누구한테 부탁해.


사주 아저씨가 언젠가 이렇게 좋은 일이 오려고 그동안 그렇게 힘들었구나 하는 날이 올 거라고 했는데 사실 그날이 그렇게 기대되지도 않아. 좋은 날을 바라지 않아. 그저 쉼을 바랄 뿐이야. 일을 하면 일이 줄어들기를 바랄 뿐이야, 새로운 일이 계속 생기는 게 아니라. 이게 그렇게 큰 욕심인가. 알고 있지 남들이 봤을 때 나는 똑똑하고 일도 잘하고 책임감 있고 믿음직스럽고 잘났지. 근데 나는 또 알고 있지, 어차피 그런 건 겉으로 보이는 것뿐이고 갈수록 내가 나를 갉아먹고 있다는 것도, 반짝거리는 게 아니라 사실 잔뜩 녹슬어버려서 삭아가고 있다는 걸. 기분이 이런 날에는 더 빡세게 화장하고 더 드레시하게 옷을 챙겨 입어, 그럴수록 나와 나 사이에 간극은 더 커져만 가지. 이런 걸 뭐라고 부르더라 가면성 우울증인가. 알아 병원 가야 되는 거, 가서 세로토닌 높이는 약이라도 받아와서 꾸역꾸역 살아야 하나 생각은 해. 근데 시간이 없어, 10cm 노래 가사처럼 아파하기엔 내가 너무 바빠. 그저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내가 좋아하는 공부를 하고, 빡세게 운동이나 했으면 좋겠는데. 오늘 밤이 지나고 나면 내일 아침이 되면 괜찮아진다고 믿고 싶은데.


작년 11월에 메모장에 적어두었던 일기다. 그로부터 10개월이 지났으니 꽤 오랜 시간을 버티긴 한 것 같다. 나라는 인간을 칭찬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릴 적부터 엄마한테 엄살 부리지 말라는 말을 하도 듣고 살아서 그런지 지금 내 상태가 엄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기도 했다. 하지만 더 이상 미루다간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고장 나 버릴 거 같아서 결국은 병원을 찾아간 것이다. 혼자 뷔페에 가서 8 접시도 넘게 폭식을 하고, 날짜를 잘못 보고 이미 지나버린 장례식장을 찾아가고, 생전 하지도 않았던 업무 실수를 하고, 무엇보다 끊임없이 올라오는 화를 나 스스로 감당할 수가 없어서 나라는 인간이 분노에 사로잡혀 일을 그르칠 것 같았다. 저 일기를 쓸 때 보다도 훨씬 안 좋아진 상황. 나를 공격하든 타인을 공격하든 뭐라도 하나 터져야 일이 끝날 것 같은. 아니 어쩌면 누군가 나를 끝내주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병원 갈 생각을 한 걸 보면 그래도 아직 살고자 하는 의지는 있는 거겠지. 아니 죽을 순 없으니까 별 수 있나.


예약한 후 1주일 정도 남았을 때 매일 가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정리했다. 하고 싶은 말은 끊임없이 나오는데 이 말을 다시 정제하는 과정을 거치는 나를 보면서 나라는 인간은 지독하게도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책도 읽고, 강연도 듣고 마음을 다스리려 꽤나 애썼지만, 도저히 나의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호르몬들은 그 며칠 상간에도 나를 괴롭혔다. 그나마 친한 사람들을 만날 때는 괜찮았다.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웃는 것, 괜찮은 척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다. 어쩌면 그렿게 멀쩡하게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또 자괴감에 빠지는지. 이걸 의지가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연기를 잘한다고 해야 하나, 감정이 고장 났다고 해야 하나 나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불능상태에 놓여있다.


의사 선생님은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는데 그걸 괜찮은 척하려면 에너지가 굉장히 많이 쓰인다고 했다. 아주아주아주아주 조금이라도 나를 위한 일을 하라고, 나를 위한 일이 무엇이 있을까? 그래서 어제오늘 낮잠을 잤다. 늘 낮잠을 자거나 누워있으면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아서 죄책감에 시달렸는데 그냥 그런 생각 안 하고 잤다. 약의 효과인지도 모르겠다. 처방해 준 약은 마법의 포션처럼 나의 흑염룡 같은 감정을 잠재워주고 분노를 사라지게 해 주었다. 역시 현대 의학은 대단하다. 그리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사실 지금 당장 할 일은 한 5가지 정도 있는데, 약의 부작용이 업무 부스터면 좋겠다만 안타깝게도 그런 기능은 없다. 잘 지내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저냥 지낼 수만 있으면 좋겠다. 오랜만에 하늘이 예뻐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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