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요정의 퇴직
“괜찮아 나랑 가면 비 안 와, 난 날씨 요정이거든”
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지 꽤 오래되었다. 실제로 여행 다니면서 날씨 걱정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심지어 비가 오다가도 내가 돌아다니면 비가 그쳤다. 그런데 요즘은 날씨요정님이 날 떠나가셨나 보다. 요즘 여행인구가 많아져서 바쁘신 건가, 이번 제주 여행이 오늘로 4일째인데 해를 봤던 날이 하루 밖에 없다. 그래도 나머지 이틀은 이슬비에 바람 정도라 여기저기 다니길 했는데, 오늘은 어째 폭우 아닌 폭우가 오락가락 내리네.
간만에 쌀 알갱이가 먹고 싶어서 아침부터 숙소 앞에 있는 식당으로 찾아갔다. 나처럼 혼여객들이 많아서인지 1인석을 배정해 줬는데, 그게 벽을 보고 앉는 자리라서 오히려 갑갑하고 불편. 손님도 별로 없는데 그냥 2인 테이블 줘도 됐을 것 같지만, 그래도 1인 정식으로 갈치조림 파는 곳이 여기밖에 없으니 아쉬운 대로 먹었다. 어제 아침에 간 다른 갈치정식 집에서는 2인부터 된다고 퇴짜 맞았는데, 근데 그 집에 가고 싶다. 누가 나랑 갈치조림 좀 같이 먹어줬으면… 그런데 이 식당이 예전에 1인 정식으로 갈치조림 먹으러 들어갔던 식당이랑 인테리어가 거의 똑같… 난 제주시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 성산이었었나,,, 워낙 여기저기 돌아다니니 내 기억을 내가 믿는 것도 어렵다.
이번 여행의 유일한 목적은 한라산이었다. 21년도에 친구들과 함께 한라산을 다녀가고 내가 내 스스로 한라산을 다시 찾을 일이 있을 거라 생각도 못했는데, 요즘에는 왜 그렇게 캠핑이나 등산이 좋아지는지 모르겠다. 사실 지난주 남도에 갔을 때 지리산을 가보려 했으나 별로 좋지 않은 내 몸상태에 천왕봉을 1박 2일로 다녀가는 건 무리라고 한의사샘이 말리셔서 그냥 성삼재 휴게소에 차를 대고 1시간 반 정도 노고단만 다녀왔다. 지난주 여행은 3박 4일이었는데 그중에 3일이 날이 좋더니 노고단 간 날만 비바람이 몰아쳐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지난 6월에 소백산에 갔을 때도, 9월에 방태산에 갔을 때도 날씨가 그 모양이라 정상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바람과 사투를 벌이다 하산했다. 그래서 이번 한라산만큼은 반드시 비 안 오는 좋은 날씨에, 백록담을 보고 오겠다는 게 유일한 목표였다.
애초에 제주는 4박 5일이 계획이었고, 원래는 화요일에 한라산을 다녀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계속 비가 오고 흐리대서 목요일로 성판악 코스를 예약했다. 그런데 또 비가 온다고 해서 금요일로 다시 미뤘다. 금요일 일기예보는 해 쨍쨍 이었거든, 그런데 또 어제부터 금요일이 해반+구름반이고 토요일만 쨍쨍이다. 아… 토요일에 한라산에 다녀가자니 내 남은 이틀이 날아갈 것 같은데, 뭐 그렇다고 딱히 무언가를 할 계획이 있는 건 아니지만 함덕에서 편안한 이틀을 보내려던 여행자가 아닌 관광객 모드로 마지막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인스타를 보니 그렇게 흐린 날에 올라갔어도 백록담을 보기도 하고, 오히려 지상이 맑은데 위에는 안 보이기도 하고, 심지어 난 3년 전에 왔을 때 엄청 맑고 쾌청한 날씨 덕에 아주 선명한 백록담을 보고 갔었다. 그래서 사실 꼭 안 봐도 되지만, 올해 산행 내내 비가 와서 그런지 나에게 곁을 내어주지 않는 산들이 야속하기도 해서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맑은 풍광을 보고 싶다는 집착의 집착으로 그렇게 여행 일정을 계속 수정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날씨만큼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을까. 그간 여행에서 운이 좋게도 맑은 날이 많았지만, 정말로 순전히 운이 좋았을 뿐이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눈이 오면 오는 대로, 순간에 적응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게 여행자의 도리이다. 맑아서 돌아다니기 편하다면 그것대로 감사하면 되고, 비가 와서 다른 풍경을 만났다면, 기억에 오래 남기면 될 일이다. 비바람 때문에 힘들게 카페에 도착했지만 비 덕분에 이 넓은 카페를 혼자 전세내고 세화 앞바다를 보고 있는 지금 내 모습처럼, 어떤 일이든 좋기만 한 것도, 나쁘기만 한 것도 없다. 백록담을 보겠다고 코스 예약을 2번이나 바꾸고, 항공편을 예약했다 취소했다 다시 예약했다 난리를 치고, 하루에 몇 번이고 한라산 CCTV를 휴대폰으로 보고 있는 나는 이 단순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저 내 유일한 목적을 이루겠다는 집착과 집념을 보여주고 있는 거다.
사실 이 정도 했으면 충분하다. That’s enough.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이제는 하늘에 맡기면 될 일이다. 백록담을 다시 만난다면 반가울 일이고, 만나지 못한다면 다음에 다시 오면 될 일이다. 한라산이 어딜 가는 건 아니니까.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언제든 나는 그를 다시 만나러 올 수 있기 때문에. 이제 보니 이번 여행의 목적은 백록담이 아니라 집착의 번뇌를 끊어버리는 연습을 하기 위한 것이었나 보다.
현재를 받아들이는 연습,
내 감정을 알아채주는 연습,
그렇게 해도 모두 괜찮다는 걸 깨닫는 연습.
그래도, 날씨 요정님, 다시 돌아와주면 안되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