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alli Oct 11. 2024

순간에 머무를 것

nunc stans

삶은 그 모든 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환희의 순간을 기꺼이 내어준다“ - [노멀피플]


여행지에서 만나는 장면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순간이 있다. 어디를 갈지, 무엇을 먹을지 끊임없이 계획하고 검색하는게 버리고 싶지만 버리고 못하는 행동 양식이다. 그러지 말아야지, 길을 걷다가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 봐야지,라고 스스로 되뇌어 보아도 결국은 주변 식당이나 카페를 검색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일상의 귀한 시간을 쪼개서 온 일정이니만큼 무엇이든 실패하고 싶지 않다는, 돈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의 발로겠지. 함부로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기엔 우리는 부자가 아니니까.


그래도 최대한 쓸모없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노력했다. 시간에게 빈 공간을 내어주는 일이, 나처럼 계획형 인간에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를 거다. 지난 성산에서 지낸 4일 동안, 그 한적한 곳에서 매일 한 일이라곤 광치기 해변을 산책하는 것이었다. 흐린 날도, 비가 오는 날도, 맑은 날도 저녁에 광치기 해변을 한 시간씩 걸었다. 막상 성산일출봉은 마지막 날 올라갔다 오긴 했지만. 비 오는 날 버스를 타고 세화해변에 가서 당근 케이크를 먹고 오기도 하고, 하루는 렌터카를 빌려 사려니숲길과 표선을 다녀왔다. 체크아웃하는 날은 우도에 다녀왔다.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했지만 이것저것 한 일이 많은 것 같기도 하네. 아무리 계획을 세워도 계획할 수 없는 것이 생각지 못한 곳에서 만나는 생각지 못한 풍경이다.


별을 보겠다고 해가 진 후 어둠을 가로질러 40분 동안 걸어간 성산일출봉 옆 주차장에서 본 밤하늘 별, 밤에 잠겨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 대신 들리던 파도소리, 그리고 그렇게 잠겨있던 내 곁을 지나가던 무심한 고양이, 세화에서 돌아오는 버스 정류장 앞에서 보이던 나무와 까치, 그리고 아무도 없어 소리 내 부르던 내 노래소리, 한라산 일정이 취소되어 실망감이 가득한 내게 찾아온 함덕 바다 빛깔,  호텔 1층 엘베 앞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외국인 여행자와 눈인사, 몇 날 며칠 흐린 하늘만 보여주다 어느 날 보인 구름 사이 드러난 푸른빛 하늘, 우도 순환 버스를 타고 창밖을 보는데 코너를 돌다 눈에 들어온 저 멀고 깊은 동해바다, 입 안 가득 퍼지던 카이막의 고소한 우유향, 아무도 없는 메타세콰이어 길을 아침 일찍 혼자 산책할 때 얼굴을 스치던 바람과 풀잎 날리는 소리, 땅끝마을 바다 앞 정자에서 별빛과 파도와 바람과 함께 마셨던 맥주, 관광객이 빠져나간 길가 작은 카페에서 만난 고집스럽게 선명했던 일몰, 새로 지은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내 어린 시절 유명 가요, 요트 앞머리에서 바라본 끝도 없는 바다 그리고 바람, 혼자 온 여행자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 아침 창문을 열었을 때 구름 사이로 바다를 비추는 햇빛,,,


이런 순간은 시간이 흘러가지 않고 정지해 있는 듯하다. 어쩌면 진짜로 멈춰있었는지도 모른다. 예술가는 그런 순간을 포착해서 잡아내는 이라고 하던데, 나에게도 그런 능력이 10%라도 있다면 조금 더 생이 즐거웠을까.


생각해 보면 좋지 않았던 순간은 없었다. 비록 어제 발을 접질려서 한라산이라는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목표를 포기하고 돌아가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지만, 그것 때문에 어젯밤 조천 앞바다 앉아 친구에게 전화해 징징거리던 순간이 있었지만, 그 덕에 지난 5일간 날씨 때문에 보지 못했던 에메랄드 바다 빛을 함덕에서, 김녕에서 하염없이 보고 앉아있을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살아가는 매 순간이 그러했다. 내 생은 힘들고 괴로운 시간만이 가득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러기엔 나는 너무 많이 웃었다. 너와 이야기를 나누며 웃었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웃었고, 내가 이뤄낸 성과를 뿌듯해하며 웃었고, 우리가 함께한 시간을 떠올리며 웃었다. 단지 그 순간을 잊고 지낸 것뿐이다. 그 끝에 무엇이 있든, 내 목덜미를 숲바람이 스쳐갔던 순간, 내 이마에 햇빛이 내리쬐었던 순간, 시시각각 파도소리가 변하는 순간,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도 안 되는 별빛을 바라보던 순간, 그 영원을 기억해야겠다.


목표를 잃어버린 이번 여행에서,

목표를 잃어버리는 것이 목표였던 이번 여행에서

순간에 머무르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목표가 생겼다.


매거진의 이전글 집착의 끝을 잡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