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게 하나도 없다

묵묵히 살아내기

by Yan

우여곡절 끝에 돌아온 미국. 작년 이맘때 들어올 때만 해도 아직 한창 코로나 시국이라 그런지 공항이 텅텅 비어 있었는데 이번에는 제법 관광객들로 보이는 사람들도 많고 공항 내 식당들도 연 곳이 많아, 마치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탑승객이 늘어난 만큼 입국 심사도 줄이 꽤 길었는데, 그래도 1시간 만에 내 차례가 왔으니 생각보다는 빨리 끝났던 것 같다. 입국 심사를 받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확실히 학생비자(F-1)가 심사는 제일 수월하다. 아무래도 학교에서 모든 돈을 대 주고(돈 없어서 불법 체류자로 전락할 가능성 제로) 신분이 보장되니(재학생이다 보니) 그런 것 같다. 내 앞에 줄 선 사람들은 대부분 관광 목적으로 온 사람들로 보였는데, 내 차례를 기다리면서 간간이 들리는 심사관들과의 대화를 들으니 직업부터 시작해서 한국 어느 지역에 사는지, 최근 어디 방문했는지(본토 방문한 사람에게는 거길 왜 갔으며 누구 만났는지까지 꼬치꼬치 물었는데 나중에는 질문받던 분이 짜증을 낼 정도였다), 여긴 왜 왔고 얼마나 있을 건지 등 자질구레한 질문들을 묻느라 한 명당 거의 10~15분은 족히 걸렸던 것 같다. 나는 차례가 되어 여권과 I-20 서류를 건네자마자 심사관이 혼자 왔냐고 묻더니 몇 가지 묻지도 않고 금방 끝났다.


- 심사관: 학생이에요?

- 나: 네.

- 심사관: 수하물 안에 음식 있어요?

- 나: 햇반 2개 있습니다.

- 심사관: 그게 다예요? 오케이. 현금은 얼마나 갖고 왔어요?

- 나: 10달러요 (대부분 카드로 결제하다 보니 지갑에 팁 용으로 넣어둔 1불짜리 지폐 10장과 동전이 다였음)

- 심사관: 그게 다예요?

- 나: 네 (....???)

- 심사관: 좋은 하루 보내세요!


오자마자 짐 정리하고, 마트 가서 일용할 양식들을 챙기고, 다시 지난 학기와 같은 루틴을 만들고 나니 일주일이 금세 지나갔다. 가족과 헤어져 한국을 떠날 때는 좀 슬펐는데 막상 또 공부 외엔 할 게 없는(!) 평화로운 이곳으로 돌아오고 나니 확실히 공부하기에는 미국이 더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먼저 와 있던 학생들과도 만나서 밥도 같이 먹고 하니 그래도 맨 처음 입학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왔던 초기에 비해 마음이 금방 평온해지고 안정이 되는 것을 느꼈다. 감사한 일이다.




방학 때 편히 쉰 것은 좋았는데 막상 그간 진도를 얼마 나가지 못한 내 연구를 보니 다시 한숨이 나온다. 그렇다고 마냥 논 것은 아닌데, 내가 정한 주제와 실험 방법이 너무 어려워서 한 달간 지지부진한 상태로 끌어온 것이다. 교수님이 보다 못해 자기 제자들 중 제일 똑똑한 선배 학생들 세 명을 붙여서 나와 같이 실험을 짜게끔 도와주셨는데도, 그 세 명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이거 너무 어려운데? 실험 방법 자체도 어려운데 이 주제로 짜려니 진짜 어렵다!"). 직접 만나서 대화하면 금방 끝날 대화인데 셋 다 다른 곳에 있어 이메일로 주고받으려니 시간도 오래 걸리고 효율적이지 않았던 탓도 컸다.


첫 번째 소논문 주제도 그저 재밌어서 정한 거였는데 나중에 파고들다 보니 아주 어려운 주제였고, 지금 골치 썩고 있는 이 두 번째 소논문 주제도 그저 이와 관련된 한국 관련 선행 연구가 없길래 선택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주제도 알고 보니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심오하고 어려운 주제였다. 왜 난 늘 어려운 주제에 끌리는 걸까. 첫 번째 소논문은 그래도 어찌어찌 끌어왔는데, 두 번째 소논문은 정말 한 달 동안 매달려도 영 가시적 성과가 없는 것 같으니 속이 쓰리고 자괴감이 든다.


특히나 교수님이 붙여주신 그 세 명의 학생들이, 그들 말로는 괜찮다고 얼마든지 물어보라고는 하지만 그들도 엄연히 학생이고 내 지도교수가 아니기에, 매번 그들의 시간과 수고를 앗아오는 느낌이 드니 나도 영 마음이 불편하다. 결국 그저께 종일 방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실험을 수정하다가, '와, 나는 이 연구를 하기에는 너무 멍청한 사람 같다. 교수님께 그냥 이거 접겠다고 말씀드려야겠다'라고 큰 마음을 먹고 연락을 드렸다.


- 교수님, 지금까지 완성한 실험 파일을 보내드립니다. 그런데 이 주제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나 거대하고 어려운 주제 같아요. 괜찮으시면 혹시 금주 중에 면담을 할 수 있을까요?

- 이거 그 세 명한테 다 보여줬니?

- 이거 바로 이전 버전까지는 보여줬고, 피드백을 받아서 수정한 게 지금 보내드린 버전이에요.

- 이것도 보여주고 피드백을 다시 받으렴.

- 앗, 넵.....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시 수정'하도록 유도하는 교수님의 말씀에 '제 머리가 너무 안 좋아서 이거 더 못하겠다'라고 말씀드리려던 호기로운 나의 결심은 얼결에 사라져 버리고.... 결국 친구들에게 다시 연락해서 만나기로 했다. 그리고 생각한다. 세상엔 정말 쉬운 게 하나도 없구나. 직장을 다닐 땐 남의 돈 벌면서 밥벌이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았고, 학교에 있을 땐 남의 돈으로 공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었다. 아, 어쩌면 뭘 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남의 돈'으로 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돈으로 했으면 좀 수월했을까?


노을은 남의 돈으로 보는 게 아니니까 마음껏 누리기!


적당히 똑똑하고 적당히 부지런한 나 같은 사람은 적당히 노력해서는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회사를 다닐 때도 그랬다. 정말 '최선을 다해서 죽을 듯이' 해야만 겨우 그럴싸한 결과가 나왔다. 그게 어떨 때는 너무나 좌절스럽고, 모든 학자들이 다 이럴지(학자까지는 필요 없고 대학원생까지만 해도 될 듯) 궁금하기도 했다. 나는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한다. 학생들과 소통하는 것이 즐겁다. 강의를 할 때가 가장 행복하고 살아있어 좋다는 느낌을 생생히 받는다. 하지만 연구를 할 때면 정말 나만큼 재능 없는 사람도 없는 것 같고,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멍청한 사람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내 실험 디자인을 도와주고 있는 세 명의 친구들 중 한 명이 이곳에서 나와 가장 친한 친구인데, 어제 그 친구와 같이 공부하다가 이런 고민을 이야기했더니 그 친구가 '나도 그런 생각으로 우울해서 주말에는 침대에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라고 했다. 오늘 너랑 같이 공부하자고 한 것도, 그나마 너랑 있어야 덜 우울한 기분으로 조금이라도 진도를 나갈 거 같아서였다고.... 우리 학과에서 업적도 제일 많고 교수님들에게 인정도 제일 많이 받는 친구인데도 그런 얘기를 하다니 이건 마치 1억쯤 가진 부자가 100만 원 가진 사람에게 '나도 어떻게 먹고살아야 하나 고민한다'라고 말하는 느낌이 들었다. 너 같은 애가 우울해하면 나 같은 사람은 어찌 살라고! 그렇지만 그래, 적어도 나만 이런 고민 하는 건 아니니 조금은 위로가 되는 듯도 하다, 야....


긴 하소연 끝에 결국 자명한 결론이래 봤자 그냥 쭉 하던 걸 계속하는 것일 테다. 별 수 없다. 엉덩이로 공부하는 수밖에. 도서관에서 와서 랩탑을 켜고 어제 읽던 논문을 마저 읽는다. 실험 파일을 다시 열어보고 교수님이 주신 피드백을 살펴본다. 이따 점심을 먹으면서 친구와 다시 한번 이야기해보기로 했다. 정답이 있긴 한 건지, 있다면 언제쯤 찾을 수 있을지, 쓰다 보니 연구가 아니라 인생 고민 같지만, 별 수 있나. 열심히 오늘을 살자. 나는 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