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냐 난 오로지 나 혼자야. 예전 옆집에 친분 있던 이가 가끔 들르는 거지. 난 가족 없어."
정순할머니는 침대에서 내려오면서 거실 쪽으로 워커를 밀면서 옆집에서 같이 살던 이가 잊을 만하면 찾아온 거라며 웃는다. 여자에게 어떤 관계냐고 묻자 그녀 역시 할머니가 요양원으로 오시기 전에 옆집 살던 이웃이라고 했다. 할머니와 똑같은 얼굴 모습에서 모녀지간이라는 것은 누가 봐도 금방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령화시대 웃지 못 할 새로운 풍속도가 나타나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가족을 가족이 아니라고 말해야하는 시대다. 정부지원을 받는 수급자인 대상자들은 가족이 있다는 걸 숨기려 한다. 가족들 역시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에 면회 오면 아는 지인이라고 말한다.
할머니와의 첫 만남은 요양원 첫 출근 날, 각 방마다 다니며 인사를 하고 다닐 때였다. 비록 늙었지만 큰 키에 꽤 예쁜 얼굴이었다. 허리춤에는 보자기로 뭔가 두둑이 묶어 걸음걸이가 늘 불편해 보였다. 남들이 훔쳐간다며 속옷을 보자기에 말아서 허리춤에 두르고 다녔다. 목욕을 시키려고 하면 목욕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목욕을 또 하냐며 한사코 거부한다. 사물함에는 여러 개의 보따리가 있었다. 얼마 전에도 목욕하고 난 후에 보따리에 넣어두었던 물건이 없어졌다며 보따리를 풀어서 침대 위에 온갖 잡동사니를 늘어놓고 없어진 물건 찾는다며 소란을 피웠다. 할머니는 과거를 뚜렷이 기억하고 일상생활에서도 특별히 이상행동은 나타나지 않지만 유독 아무 쓸모없는 물건에 대한 편집증만 심했다.
언젠가 고향 이디냐고 물었더니 할머니는 선물보따리 풀 듯 묻지도 않은 이야기들까지 술술 끄집어냈다. 할머니 표현대로 인용하면 평양처녀가 전라도 깽깽이 총각한테 시집을 갔단다. 같은 직장 동료였던 청년은 미모의 아가씨에게 여러 차례 청혼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여자는 거절했다.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빨리 집으로 오라는 전화를 받고 무슨 일인가 싶어 달려갔더니 계속 청혼해 오던 청년이 자기 뜻을 이루지 못 하자 손목을 면도날로 그어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죽겠다고 자살소동을 벌인 것이다. 하는 수없이 그 사건에 코가 꿰어 결혼을 했다.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결혼 후 남편은 사업을 시작하여 가정부를 두고 살 만큼 경제적 여유도 있었다.
“한번은 바깥에 외출하고 집에 왔더니 안방에 가정부와 남편이 나란히 누워 있는 거야. 참,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내가 바로 그 짝이었지. 불륜 현장을 들켜버린 남편이 무릎을 꿇고 싹싹 비는 거야.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고 가정부에게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했지. 무릎을 꿇은 남편 옆에서 각서를 받아내고는 바로 내 보내버렸어.”
느긋한 성격이라 가정을 깨지 않고 지혜롭게 넘어 갈 수 있었다. 남편은 가족을 평양에 두고 고향인 전주에 있었는데 그 무렵 6.25 전쟁이 났다. 아들과 딸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젊은 나이에 피난길이 두려웠을 법도 한데 목숨을 건 모험인지라 위기에 처하면 남자들의 멱살을 흔들어가며 아이 둘을 겨우 데리고 나와서 남편을 찾아 재회했단다.
살아온 과거를 말하면 한 편의 드라마 같다는 그녀도 아들 이야기를 할 때는 긴 한숨을 쉬었다. 남편은 일찍 세상 뜨고 아들은 장성해서 결혼 한 후에 이발관을 차렸다. 섬세하고 꼼꼼한 솜씨라 주변에서 이발 잘 한다고 명성이 자자했다. 다른 이발관은 파리를 날려도 아들 가게는 손님이 항상 북적였다. 일을 마친 아들은 밤늦게 술을 마시고 가게 방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가게 문을 열지 않자 가서 보니 아들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들은 방에 있었는데 방문이 바깥에서 잠가 있었단다.
“멀쩡한 아들을 잃자 눈물이 강을 이루었어. 세상사는 게 아무 의미가 없었지. 늙은 나는 이렇게 살아있고 살아야할 아들은 죽었으니 세상 참 불공평하지.”
“딸이 있잖아요.”
“에이, 딸 아냐. 딸들은 외국에 나가서 소식 몰라. 나는 피붙이가 없어 이 세상에서 나 혼자야”
가족이 있으면 혹시 불이익이라도 당할까봐 그런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할머니는 한사코 독신임을 강조한다.
그날 오후 성에가 잔뜩 낀 요양원 유리창을 통해 메마른 겨울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그 풍경을 바라보는 정순할머니는 세월이 지나도 잊혀 지지 않은 지난날의 아픈 기억 속에서 조용히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