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갱도요새 Jul 13. 2022

라면은 누구에게나 첫 요리다

육아도 누구에게나 처음이다

라면은 식사에 곁들이는 반찬류가 아니라서 그런지 좀처럼 밥도둑이라는 호칭이 붙지는 않는다. 하지만 라면도 국물로서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밥도둑의 명성을 얻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라면의 놀라운 점은 김치에 라면 후루룩 먹고 나서 그 국물에 밥을 한 그릇 더 말아먹을 정도로 식욕을 폭발하게 한다는 것이다. 거의 밥 절도범이 아니라 밥 강도범 수준이다. (여기서 토막 상식으로 절도는 단순히 물건만 쓱 훔쳐 달아나는 것이고, 강도는 폭행이나 협박이 수반되는 것이다.)


밥 말아먹기계의 최강자는 역시 스낵면이다. 아예 대놓고 밥 말아먹기에 좋은 라면이라고 광고를 한다. 면이 얄팍해서 밥이랑 같이 떠먹기에도 좋다. 스낵면의 최고 장점은 가격이 싸다는 건데 라면을 주식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장점이 매우 크게 와닿을 것이다.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사리곰탕면도 밥 말아먹을 때 맛있다. 진짜 사골 느낌은 아닌데, 그래도 그 허여멀건 국물의 생김새가 뭔가 그럴듯하다. 요즘은 미역국라면, 해장라면 등 아예 대놓고 밥 말아먹기를 노리는 듯한 라면도 많이 출시되고 있다. 



뜨끈한 국물에 밥까지 말아먹고 나면 제대로 식사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라면은 끼니를 '때워야' 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고마운 존재다. 급하게 식사를 해야 하는 사람,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사람, 이런저런 이유로 혼자 밥 차려 먹기 어려운 사람들. 혼자 밥 차려 먹기 어려운 사람들의 범주에는 늘 어린이들이 포함된다. 요리 기술이 있을 턱이 없는 어린이들에게 라면은 너무 고맙고 소중한 존재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라면은 아마 인생의 첫 요리이지 않을까 싶다. 나에게도 라면은 인생의 첫 요리였다. 


내가 처음 라면을 끓여본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1학년 때까지는 가스레인지가 위험하니 함부로 쓰지 말라는 말을 잘 들었는데, 그래도 2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조금 더 용감해져서 가스레인지를 함부로 써볼 시도를 한 것이다. 동생이랑 둘이서 라면 한 개를 나눠먹자고 얘기하고 용감하게 가스에 불을 올렸다. 봉지 뒤에 쓰인 조리법을 읽었지만 물의 양을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 만들어진 라면은 엄마나 아빠가 끓여준 것과 비슷한 모양새를 가지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물을 많이 넣은 것이 분명했다. 


요리에 실패한 것 같아 풀이 죽으려는 찰나에 같이 라면을 먹은 동생이 너무 기분 좋게 얘기했다. "언니, 라면이 짜지도 않고 맵지도 않아서 너무 맛있어." 그제서야 나는 라면을 처음으로 끓였다는 사실이 너무 뿌듯했다. 물이 많아서 실패한 라면이 아니라, 짜지도 맵지도 않은 맛있는 라면이었다. 동생은 무슨 일이든 따뜻하게 이야기해주는 재주를 가졌다. 동생 덕분에 나의 첫 요리는 대성공이었고, 나는 신나서 그 일을 일기장에 썼다. 짜지도 맵지도 않은 딱 맞는 라면을 끓였다고. 


나의 인생 첫 요리인 라면을 나눠먹었던 동생은 얼마 전 아들을 낳았다. 처음으로 엄마가 된 것이다. 동생이 포상기태로 한 번 아픔을 겪은 뒤에 낳은 자식이라 기쁨이 더 컸다. 첫 육아를 시작한 동생은 밤에 잠도 못 자고 힘들어하고 있다. 모유 수유를 해서 하루에 3시간 정도만 겨우 잔다고 했다. 침대에 눕히기만 하면 칭얼대면서 잠을 안 자는 아기가 원망스러울 법도 한데, 동생은 또 너무나 따뜻하게 "우리 애기는 등에 센서가 있나 봐."라고 말하며 아기를 안아준다. 아기를 돌보며 바쁠 텐데도 아기를 궁금해할 가족들을 위해 매일 카톡방에 아기 사진과 동영상을 잔뜩 올려준다. 



생후 20일 남짓 된 아기를 돌보는 것은 정말 어려워 보였다. 젖을 먹다가 냅다 자버리는 아이를 계속 깨워가며 모유수유를 하고, 바로 눕히면 안 돼서 또 안고 있어야 하고, 기저귀를 수시로 체크하고, 기저귀를 체크할 때마다 각종 속싸개며 옷 같은 걸 다시 감싸줘야 한다. 아이는 침대에 눕히기만 하면 깨서 계속 안고 있어야 했다. 잠깐 씻기는 데도 아기는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계속 찡찡댔다. 아기의 건강상태에 대해 공부할 것도 엄청 많아 보였는데 동생은 그걸 하나하나 다 알고 있었다. 엄마, 아빠가 예전의 잘못된 상식을 얘기하면 그것도 하나하나 다 아니라고 친절하게 알려줬다. 어떻게 다 아냐고 대단하다고 했더니 유튜브랑 조리원에서 배웠다고 별 거 아니라고 한다. 마치 조리예를 보지 않고도 라면을 척척 끓일 수 있는 것처럼 당연하다는 듯이.


아기를 위한 각종 국민육아템도 집에 한가득 있었다. 예전에 동생 집에 가면 동생 부부가 사는 집 같았는데, 이젠 아기 혼자 사는 집 같았다. 집안 곳곳에 아기 물건과 가구가 있었다. 아기는 아직 4kg도 넘지 않았는데 그의 짐은 엄청났다. 잠을 자지 않는 아기 때문에 동생은 또 뭔가 새로운 육아템을 구매한다고 했다. 육아로 고통받는 모두가 다 추천했던 바운서는 아직 살 계획이 없다고 했다. 국민육아템들은 가격도 엄청났고, 비싼데도 불구하고 한참 전부터 예약을 해야 했고, 막상 받아보니 제품 상태가 썩 좋지 않아 동생은 수차례 반품과 교환을 해야 했다. 동생은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도 아기를 키우는 건 정말로 쉽지 않아 보였다. 


누구든 첫 요리를 시작하면 그 뒤엔 자신의 끼니를 책임질 수 있게 된다. 첫 육아를 시작하고 나면 그 뒤엔 좋든 싫든 그 아이의 평생을 책임지게 될 것이다. 요리를 시작하기에 라면은 너무 좋은 음식이다. 조리예가 완벽하게 적혀있고, 모든 재료도 봉투 안에 다 들어있다. 냄비와 물, 그리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올릴 수 있는 약간의 용기만 있으면 된다. 그런데 육아는 정말 어려워 보였다. 누구에게나 처음인 일일 텐데도 너무나 말도 안 되게 어려웠다. 뭐가 제대로 된 육아 방식인지 알 수 없고, 아기를 위한 물품은 마치 부부를 호구라도 본 것마냥 가격을 불러댔다. 출생률이 0.8명인 이유가 뭔지 너무 잘 알 것 같았다.


육아는 분명히 조금 더 쉽고 편해져야 한다. 라면을 끓이는 것처럼, 누구든지 조금은 실수하더라도 그럭저럭 할 수 있는 일이어야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방법으로 더 많은 자원을 투여해서 육아를 도와야 한다. 내 동생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따뜻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에게조차 지치고 버거운 일이라면, 분명히 아직도 더 쉬워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도 첫 육아를 하는 동생에게 뭔가 용기 나고 기분 좋은 한 마디를 해주고 싶은데 좀처럼 쉽지 않다. 물이 왕창 많게 끓인 라면도 짜지도 않고 맵지도 않아서 너무 맛있다고 해주는 것처럼, 동생이 육아에서 뭔가 실수하더라도 그 아이는 네가 엄마인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할 것이라고 얘기해주고 싶은데 좀처럼 그럴듯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동생은 어떻게 그런 말을 맨날 생각해내는지 모르겠다. 첫 요리에서 물을 왕창 넣는 실수를 했던 내가 지금은 아무 요리나 척척 잘 해내는 것처럼, 동생도 조금 실수하는 게 있더라도 너무 예쁜 아기를 놀랍도록 잘 키울 것이다. 내 동생같은 엄마가 있다니 조카는 참 좋겠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피고인 라면은 배가 부른 상태에서도 밥을 탈취하는 등 그 죄질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피고인 라면이 이전까지는 아무런 전과가 없는 초범인 점을 고려하시어 부디 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의 선처를 하여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