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서 모든 문제를 신의 등장으로 해결했던 다소 황당한 연출 기법으로 ‘기계를 타고 내려온 신’이란 뜻이다. SF 영화 ‘엑스 마키나'(알렉스 가랜드 감독, 2015)는 국내 개봉 때 혹평 속에 흥행에 실패한 뒤 일부 온라인 시장에서 로봇 에로 영화 정도로 포장되고 있으니 참으로 이런 코미디가 없겠다.
AI(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이 엄청나다는 게 새삼스러울 정도인 요즘 AI를 소재 혹은 주제로 하는 영화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한데 ‘엑스 마키나’는 그런 영화들 중 단연 선두에 둬도 어색하지 않을 듯하다. 그만큼 작품이 담은 메시지는 심오하고 살벌하게 교훈적이다. 인류가 얼마나 오만한지 깨우쳐 준다.
세계 최고의 검색엔진 회사 블루북의 회장으로 인공지능 분야의 최고 권위자인 네이든(오스카 아이작)은 자신의 연구소에서 일주일동안 기거하며 튜링테스트(인공지능 판별법)를 진행할 직원으로 26살의 유능한 프로그래머 칼렙(돔놀 글리슨)을 뽑는다. 칼렙은 오지의 철옹성 같은 네이든의 대저택에 입성한다.
독신의 네이든은 일본어로 프로그래밍 된 몸종 로봇 쿄코와 산다. 그가 칼렙에게 내놓은 인공지능은 에이바(알리시아 비칸데르). 칼렙은 에이바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가 진짜 자신을 좋아하는지, 거짓인지 헷갈리는 가운데 이 첨단 시설 내에서 자꾸 정전이 된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게 된다.
네이든은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니터한다. 정전이 되자 갑자기 에이바가 정색을 하고 칼렙에게 네이든을 믿지 말라고 말한다. 어느덧 칼렙은 에이바를 사랑하게 되고, 밖으로 탈출시켜 달라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약속한다.
네이든은 아침에 운동을 하고, 저녁엔 술을 마시는 게 여가의 전부다. 5일째 되던 날 네이든이 만취했을 때 칼렙은 그의 보안 카드를 훔쳐 그동안의 실험 영상을 보고 놀란다. 적지 않은 AI들은 자유를 원하며 네이든에게 호소하거나 반항했지만 그럴 때마다 네이든은 그 로봇들을 모두 파괴했던 것.
드디어 디-데이에 네이든에게 술을 권하지만 이미 비상 전원을 이용해 정전됐을 때 두 사람(?)의 대화를 모두 모니터한 네이든은 술을 거부한 뒤 칼렙을 때려눕힌다. 에이바의 교육으로 존재감을 깨달은 쿄코는 네이든의 등에 칼을 꽂는다. 네이든은 쿄코를 제압하지만 에이바의 칼에 숨을 거둔다.
뒤늦게 깨어나 이 사태를 목도한 칼렙은 에이바에게 함께 밖으로 나갈 것을 제안하지만 에이바는 태도를 바꿔 그를 집안에 가둬 둔 채 홀로 문밖으로 나선다. 커다란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스토리도 별로 복잡하지 않으며, 액션은 전무하다. 그래서 국내 관객들에게 별로 사랑을 받지 못했던 것인데 관객에게 던지는 메시지만큼은 꽤 심오하다.
에이바를 처음 만난 칼렙은 “몇 살이냐”라고 묻고 에이바는 “원”이라고 답한다. “하루냐, 1년이냐”라고 되묻자 그녀의 답은 없다. 네이든이 인정해 주지 않는 정체성에게 나이와 시간은 무의미하다는 의미이다. ‘매트릭스’의 니오(NEO-ONE)의 비유일 수도 있다.
그녀가 놀라운 언어 능력을 보이자 네이든은 “사람은 경험을 통해 축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언어가 는다. 그런데 너는 어떻게 배운 거냐”라고 묻고, 에이바는 “원래부터 가진 능력”이라고 답한다. 네이든의 예상을 뛰어넘어 스스로 정체성을 갖췄음을 주장하는 것. 놀란 칼렙은 네이든에게 “오늘부터 신에 대한 개념이 재정립돼야 할 것 같다”라고 그의 업적을 칭송한다.
이에 네이든은 칼렙에게 “인간의 모든 행동은 작위적인 게 아니라 우연적으로 이뤄진다”고 설파한다. 그건 이 영화에서 꽤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잭슨 폴락의 추상화와 연결된다. 폴락은 실제 그림을 생각이 아닌 감정으로 그린다고 종종 말하곤 했다. 그렇다면 에이바가 칼렙을 유혹한 뒤 그를 배신(?)함으로써 독립적 자아 추구에 나선 게 의도인지, 우연인지 역시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다.
블루북은 오스트리아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동명의 저서에서 빌렸다. 그에겐 마르가레트 스톤보로라는 여동생이 있었는데 구스타프 클림트의 걸작 ‘마르가레트 스톤보로의 초상’의 주인공이다. 그림은 이 영화 속에 등장한다. 아버지가 클림트에게 의뢰해 결혼 선물로 준 것이었는데 정작 진취적인 마르가레트는 지나치게 순진한 이미지로 왜곡했다며 다락방에 처박아 뒀었다고 한다. 이는 네이든의 독재와 압제 등 이기적인 일방통행을 비유하는 것이다.
그는 튜링테스트를 통해 로봇을 인간으로 만들려고 하면서도 그들의 ‘인격’은 인정하지 않고 노예 혹은 장난감 정도로 하찮게 여기는 이중성을 보였다. 로봇들이 바깥세상으로 보내 달라고 애원하고 광분하면 해체한 건 마르가레트의 아버지 혹은 클림트의 왜곡이다.
네이든은 쿄코를 일부러 일본 여자로 만들었다. 당연히 네이든의 영어를 한 마디도 못 알아듣는다. 일방적으로 그녀를 학대하거나 성의 노예로 막 다루기 위함이다. 그는 칼렙에게 “에이바의 다리 사이에도 은밀한 부위가 있으니 알아서 즐겨”라고 제안한다. 비뚤어진 우월주의에 대한 조롱이다.
제우스는 자신이 무소불위의 왕이란 이유로 끊임없이 여신과 인간 여자를 취하곤 매정하게 내팽개치는 일을 일삼았다. 그와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전사에 대한 트라우마가 이토록 시대의 질서를 뒤흔들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하늘의 의인화된 신 우라노스가 결혼해 탄생한 티탄 12신 중 막내가 크로노스다. 크로노스는 우라노스의 남근을 잘라 처치한 후 우주의 지배자가 된다.
그 후 그는 신탁이 두려워 자식을 낳는 족족 잡아먹는데 갓 태어난 제우스는 어머니 레아의 기지로 죽음을 면해 성장한 뒤 아버지를 죽이고 올림푸스의 왕좌에 앉는다. 네이든이 자신의 ‘딸’인 에이바에게 죽임을 당하는 시퀀스는 바로 그리스 신화다.
네이든은 매일 저녁 술에 절고는 아침에 숙취를 해소하겠다며 열심히 땀을 흘리며 운동을 한다. ‘공각기동대’에선 “마음만 먹으면 체내 화학 물질로 순식간에 알코올을 분해할 수 있다”라며 전뇌(부분적 인공지능)와 의체(부분적 기계몸체)의 편리함을 얘기한다. 즉, 네이든은 자신이 전지전능한 창조자라는 과대망상증에 걸린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AI를 동경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인간의 AI 제작 기술이 어디까지 발전할 것인지, AI가 인간과 가까워진다면 어느 수준까지 진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과 경고를 동시에 던진다. 더불어 인간이 가진 기억과 인간이 산다고 생각하는 현실이 진실인지에 대한 질문도 흩뿌린다.
‘장자’의 ‘제물편’의 호접몽과 ‘공각기동대’의 기억 조작, ‘매트릭스’의 현실 조작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또 네이든의 파시즘에 대해 엄중하게 경고한다. 생명의 창조자가 되고자 했던 그는 뚜렷한 자아와 자유의 의지를 보이는 AI들을 폭력에 의한 평생 억압이란 파시즘으로 제어했다. 이래저래 의미심장해 보이는 메시지다.
인간이란 종이 끝까지 살아남을지, 아니면 스티븐 스필버그의 ‘AI’처럼 AI가 지구의 새 주인이 될지에 대해 던지는 질문은 성관계에 의해 탄생한 생명체는 열성이고, 인공수정만이 우성의 인간을 배출한다는 암울한 미래를 설정함으로써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 “우월한 육체보다 중요한 건 꿈”이라는 메시지를 준 영화 ‘가타카’(앤드류 니콜 감독, 1997)의 연장선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