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정전’과 발 없는 새

by 유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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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의 대표적인 역작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누구인가, 어디로 가는가’(위)는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봤을 때 탄생-삶-죽음의 파노라마로 해석된다고 흔히 말하지만 긴 제목은 우리에게 매우 철학적인 사고를 요구한다. 우리는 부모가 지어 준 이름 석 자로 살아가지만 그게 본래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건 안다.


만약 그 이름이 자신의 생래적 존재가 아니라 본래적 존재라면 세상에 얼굴을 내밀자마자 자연스레 그 이름으로 불려야 하니까.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떤 존재이며,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아는 건 있다. 누구나 홀로 태어나 홀로 간다는 것이다. 누구나 고독하긴 마찬가지이다.


홍콩 출신의 대표적인 예술적 감독 왕자웨이(왕가위)의 ‘아비정전’(1990)의 주인공 아비(장궈룽-장국영)는 홀로 태어나 양모 밑에서 외롭게 자랐기에 항상 소외감에 몸서리치는 인물이다. 많은 사람들에겐 속옷 차림의 아비가 맘보춤을 추는 시퀀스로 기억되는 영화이지만 왕의 작품 중 가장 처연하다.


1960년. 아비는 매일 오후 3시가 되면 매표소에서 일하는 수리진(장완위-장만옥)을 찾아가 그녀의 마음을 흔든 끝에 연인이 된다. 수리진은 아비에게 결혼을 원하지만 구속당하는 게 싫은 아비는 이를 거부하고 이별을 통보한다. 아비는 댄서 루루(류가링-유가령)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11.jpg '아비정전' 스틸

루루는 아비의 삶에 관여하고 싶어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아비는 이를 거부한 채 루루에게 이별을 고한 뒤 친모를 찾아 필리핀으로 떠난다. 아비의 친구(장셰유-장학우)는 루루를 짝사랑한다. 경찰관(류더화-유덕화)은 수리진의 주변을 맴돌지만 수리진은 여전히 아비를 잊지 못하고 기다린다.

필리핀에 간 아비는 생모 집의 벨을 누르지만 응답이 없자 금세 등을 돌린 뒤 “엄마는 오래전에 이사 갔다고 한다. 난 내 머리 뒤에 꽂히는 시선을 느꼈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단지 한 번 만나보고만 싶었을 뿐인데 내게 그 기회마저 주지 않겠다니 나도 기회를 주지 않겠다”라고 뇌까린다.


엄마를 찾아간 건 딱 한 번만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왜 자신을 버렸느냐 묻거나 원망하려던 게 아니었다. “발 없는 새가 있다. 항상 날아야 하지만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다. 평생에 꼭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라는 내레이션 속에 그 답이 있다. 그는 더 이상 지친 삶을 이어갈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 땅에 내려앉고 싶었고, 눈을 감기 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엄마를 보고 싶었지만 엄마는 그런 그의 작은 소망마저 외면한다. 엄마 역시 고독하고 무기력해 좌절감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만 아비는 고립마저도 즐겼지만 엄마는 고통을 삼켜 인내를 토해내고 있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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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는 염세적이다. 모든 일에 소극적이고 허무주의적이다. 부모의 사랑을 못 받고 자랐기에 여자들을 통해 그 빈 공간을 채우려 하지만 결국 고독을 이기지 못해 혼자 춤을 춘다. 그가 사랑을 간구하면서도 자신만의 세계에 여자가 진입하는 걸 극도로 꺼리는 건 현대인의 이기주의, 개인주의, 무기력증을 말한다.


변신론자인 라이프니츠는 ‘세상은 신께서 모든 게 제대로 잘 돌아가도록 미리 정해 놨다’라며 예정조화를 주장했지만 다수는 부조리와 부정합과 아이러니를 느낀다. 마치 악순환의 뫼비우스의 띠 같다고 탄식하기도 한다.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이 그렇다. 수리진과 루루는 아비에게 상처를 받은 피해자이지만 경찰관과 아비 친구의 애틋한 사랑을 거부하는 가해자가 된다.


잔인한 연쇄 가해자인 아비는 생래적으로 큰 피해를 입은 후유증으로 여자들에게 가해를 하지만 여전히 상실감을 치유하지 못해 우울하다. 그가 먼저 여자에게서 떠나는 건 다시는 상처받기 싫기 때문이다. 여자에게 이별을 통보한 후에도 여전히 고독한 건 상실의 운명을 부인할 수 없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그는 수리진에게 “우리가 함께한 1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며 순간의 시계 속 추억의 편린을 저만의 공간에 저장한 채 살아갈 따름이다.


아비는 고독이 두려워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에 빠지지만 여전히 외롭고 아프다. 우격다짐을 했더라면 엄마를 만날 수도 있었겠지만 자신을 피하는 엄마를 굳이 만나려 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사람은 혼자 왔다 혼자 간다는 운명에의 순응 혹은 자포자기이다. 장궈룽은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고갱은 전술한 작품을 자살 기도 직전에 마지막 작품으로 생각했었지만 결국 심장마비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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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중국으로의 홍콩 반환을 7년 앞둔 시기에 큰 변화에 대한 두려움과 허망함이 야기한 갈등과 절망 속에서 혼돈스럽던 주민들의 불안과 소외감을 화면에 담아냈다. 당시의 홍콩인은 물론 이 시점의 모든 현대인에게 미래는 어두운 오리무중이다. 아비는 현실을 사는 것도 힘겨운데 그 전인미답의 미지의 세계로 진입하는 건 공포라 차라리 이 지점에서 영원한 안식을 찾고자 했던 것.


타성적으로 사는 것도, 적극적인 선택을 하는 것도 모두 개별자들의 몫이다. 뼈를 쑤시는 상실감에, 사무치는 고독감에, 단장(斷腸)의 공허함에 늑대가 달을 보고 울부짖듯 꺼이꺼이 피눈물을 토해낼지라도 마음의 치유는 쉽지 않다. 무엇이든지, 또 그 잃은 걸 되찾기도 어렵다.


소유하지 않으면 잃을 게 없다. 잃을 게 없으면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대담해짐으로써 많은 자유를 얻는다. 사람이 외로운 건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이성간의 사랑은 많은 장점을 지녔지만 영원할 확률이 극히 희미하다. 도파민의 유통기한은 평균 2년. 순간은 그 어떤 사랑보다 뜨겁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가족의 사랑과 친구의 우정은 활활 타오르지는 않지만 진득하고 검질겨서 꺼지기 쉽지 않다. 직장 동료나 동호회 지인, 그리고 비즈니스 파트너와의 관계는 우정까지는 아니지만 필요성과 당위성이 명료하다. 핍진성과 개연성의 필요충분조건에 근접한다. 우리는 ‘아비정전’에서 허무주의를 보지만 단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은 결코 허망한 게 아니다. 발이 없으면 어떠랴, 가족과 친구라는 든든한 의족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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