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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연 Jul 02. 2024

문청(文靑) 만길(萬吉)

영화사가 노만 12

부산 피난시절 당시 서울고 문예반. 가운데가 국어 담당 교사였던 시인 조병화. 맨 뒷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노만. ⓒ 노만, 한상언영화연구소.


"얼마 뒤 나는 대구에 주둔해 있는 미8군 사령부에 합류했다. 이번에도 사촌형님 만황의 도움을 받았다. 일반 노무자가 아닌 장교식당 웨이터 자리였다. 부대가 진격하는 곳 마다 따라다녀야 했던 이전 일자리들과는 다른 근무 환경이었다. 근무 복장도 일반 군복이 아닌 하얀 정장이 주어졌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미군들의 '인종차별'을 수시로 겪어야만 했다. 전쟁이 끝난 후, 장교식당에서 함께 일하던 친구들 중에 미국으로 떠난 친구들이 꽤 많았다. 그들은 이곳에서의 삶 보다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를 원했을 것이다. 미군 부대에서 경험한 것만 해도 '별천지'였으니까. 내게도 미국으로 가자는 권유를 하는 친구들이 더러 있었다. 그럴 때 마다 항상 '나는 안 간다'고 했다. 미군 부대에서 본, 자신과는 다른 인종을 괄시하는 백인 사병을 숱하게 겪었기 때문이다. 그게 정말 싫었다.  

몇 달이 지나, 미8군 장교식당 일을 그만두고 식구들이 있는 부산 영주동으로 돌아왔다. 그때 어떻게 알아냈는지, 학교 친구들이 영주동 집으로 찾아와 부산에서 학교가 열린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전화도 없었고 가정통신문 같은 것을 받아볼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소식을 어떻게 알아서 내게 전해줬는지 모르겠다. 송도 언덕 한 가운데, 천막도 없는 노천 학교가 열렸다. 기존의 6년제 학제가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으로 분리되었다. 나는 서울고등학교 1학년생이 되었다. 1951년 3월이었다.

이 무렵, 이웃집에 자리한 일본식 별장에 살던 또래들도 기억에 남는다. 여러 세대가 살고 있는 꽤 큰 별장었다. 간송 전형필(全鎣弼, 1906~1962)의 아들 전성우, 이응준(李應俊, 1890~1985) 장군의 아들 이창민, 이창건 형제, 훗날 법무법인 '김앤장'의 대표 김영무 등이 그들이었다. 이웃이던 들 집에 놀러가서 함께 어울공부했던 기억도 있다.

이응준 장군의 아들, 이창민(좌) 이창건(우) 형제. ⓒ 노만, 한상언영화연구소.


복교 이후 문예반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부산에서 처음 다시 만난 친구 채조병을 비롯해, 소설가 김송(金松, 1909~1988)의 아들 김진규, 우익원, 노만길, 네 명이 의기투합해 《길》이라는 제목의 문집을 만들었다. 우리 넷을 포함한 문예반 학우들의 원고를 모아 문집을 꾸렸다. 글씨를 잘 썼던 친구 우익원이 철필을 담당했다. 나중에는 학교 신문 《경희보》 발간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문예반 멤버들이 신문반에도 함께 참여했었다. 여러 일자리를 전전하던 것을 그만두고 다시 학생으로 돌아다.

피난 중에도 문예반의 분위기는 여전히 활기를 띠었다. 전쟁 전에도 그랬지만, 서울중, 고등학교의 학내 분위기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지 못하게 꿰맸을 정도로 규율이 엄격한 편이었다. 그러나 문예반의 분위기는 달랐다. 선후배  것 없이 모두 진지하고 신사적이었다. 또 그만큼 서로가 끈끈하게 어울렸다. 가끔 황순원 선생님이 마련한 문인들의 초청 특강도 열렸다.

이 무렵, 교지 《경희》 4집에 수록되는 단편소설 <소년차장>을 썼다. 문예반 시절 수많은 습작을 했지만 지면에 실린 것으로는 가장 처음이었을 것이다. 꽁트에 가까운 매우 짧은 작품이었다. 이 작품 역시 부산 피난시절 직접 보았던 일화를 각색해 썼다. 배경은 부산 남포동에서 서면으로 향하는 버스 안이다. 승객이 만원이 되어야 출발하는 버스 간에서 차장 노릇을 하는 한 소년이 주인공이었다. 버스가 출발하지 않자 한 승객이 이 소년 차장을 마구 때리며 실갱이가 벌어지게 된다. 알고보니 그 소년이 자기 아들이었던 것이다. 전쟁통에 뿔뿔이 흩어지고 헤어진 가족들,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았나. 그것을 소재 삼아 쓴 것이다."


부산 피난시절 서울고 문예반.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노만. 1951~1952년 경. ⓒ 노만, 한상언영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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