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학을 공부한 지 햇수로 벌써 10년이 넘었고, 어찌하다 보니 2만 리 떨어진 독일까지 와서 연구를 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연구에 몰두해 살기도 했고, 놀거리가 지천에 널려 있기 때문에 남은 시간에도 글을 쓸기회는 적었다. 독일 시골 마을 생활 일주일이 지난 지금, 여유로운 전원생활에 적응하며(딱히 할 일이 없는...), 이십 대 이후 쓰지 않던 글을 다시 써보려고 한다. 물론 그동안 보고서나 논문은 수도 없이 작성했지만, 삶에 대한 글을 쓴 적은 없기 때문에 글쓰기를 독일에서의 두 번째 취미(첫 취미는 산책)로 삼고자 한다. 농학 연구원의 페이지인 만큼 첫 글에서는 농업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말해보려고 한다.
독일의 밀밭 및 저 멀리 유채밭(좌)과 라이프니츠 농업 연구소(우)
농대 입학
어릴 때부터 농업에 관심이 있어서 농대로 진학하게 된 케이스는 아니고,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입시생과 같이 수능 점수에 맞춰서 농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어릴 적에는 공부를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았지만(초등학교까지는 지독히 못했다! 받아쓰기 못 한다고 매일같이 방과 후 보충수업을 받았다. 지금도 잘 못한다), 고2 올라갈 때 친형이 서울대에 입학하면서 많은 게 바뀌었다! 저 인간도 가는데... 나도? 운이 좋게도 수능 점수가 잘 나왔고, 가장 좋아하던 교과목인 생물을 다루는 전공 중에서 점수가 맞는 농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농업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1도 없던 놈이 무슨 배짱으로 농대에 입학했나 싶다. 이때까지만 해도 10년 넘게 농업 공부를 할 것이라 생각지 못했고, 더군다나 이 전공을 살려서 밥 벌어먹고 살 거라고는 정말로 꿈도 꾸지 못했다(나는 농부의 자식도 아닌데?). 다행히농학 연구가 적성에 맞았고, 지금은 연구소에서 따박따박 월급 받으며 살 수 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잠시나마 학구열을 불태울 수 있게 해 준 형과 농대를 추천해준 아버지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농학에 뜻이 있어서 농대에 진학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2학년까지는 수업도 듣지 않고, 술과 게임에 빠져서 인생을 보냈다(지금도 술은 좋다. 독일은 맥주와 안주가 싸서 좋다). 그 결과 학사경고를 두 번 받았고, 그중 한 번은 F 없이 학고를 받는 대단한 기록?을 세웠다. 3학년이 되면서 연구실과 지도교수님을 결정하게 되었는데, 이때가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연구실 선택과 지도교수님
농학을 전공했다고 하면 많은 분들이 "벼 품종 만드세요?"라고 물어보신다. 하지만 농학, 그중에서도 내 전공인 작물을 기르는 학문인 경종학은 품종(유전성)과 더불어 재배환경과 재배기술에 대한 내용을 포괄하는 학문이다. 작물의 생산성을 극대화하고 환경부하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지역에 맞는 작목(벼, 밀, 옥수수 등)과 품종(오대벼, 화성벼, 추청벼 등)을 선정하고, 해당 품종의 유전성을 최대로 이끌어 낼 수 있게 다양한 재배기술(작부체계, 경운법, 정지법, 파종법, 시비법, 관개법, 수확법 등)을 이용하여 최적의 재배환경(기상환경, 토양환경 등)을 조성해주어야 하며, 이러한 것들을 종합적으로 다루는 학문이 경종학이다.
작물의 수량과 경종의 환경 부하를 결정하는 3요소
학부를 다닐 때만 하더라도 농학에 관심을 가진 우리나라 학생 중 다수는 육종(품종개량)을 위한 유전학, 후생유전학, 유전체학, 전사체학, 단백질체학, 대사체학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재배환경이나 기술에 대한 관심은 적었다(라떼는 거의 전무했다). 요즘은 스마트팜이니 뭐니 하면서 재배기술에 대한 관심이 조금 늘어났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마저도 시설원예에 편중되어 있다(제 전공은 노지작물 = 밭&논). 여하튼 반골기질 때문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위에 나열한 분야보다 기후변화와 같은 환경 이슈에 관심이 있어서 재배환경에 대해서 배우는 게 좋겠다고 생각을 하고 재배환경 연구실로 들어가게 되었다(학사경고를 두 번이나 맞은 저를 받아주신 교수님 감사합니다). 당시에는 별다른 고민 없이 단순한 이유로 선택한 연구실이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이 연구실로 들어오게 된 것이 실로 천운이었다.
학사 졸업논문으로 교수님을 찾아뵈니, 뭐에 관심 있냐고 하셔서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기후변화랑 컴퓨터(관심은 사실 게임... 코딩은 전혀 못했다)라고 말씀드렸던 것 같다. 이때 박사과정(!?)까지의 연구주제가 정해지게 되었고, 다행히 아직까지도 흥미로운 주제라고 생각하고 연구하고 있다.연구실에 들어가 보니 크게 필드에서 작물을 기르면서 실험하는 것과 작물이 어떻게 자라는지 시뮬레이션하는 연구가 있었다. 두 분야 모두 눈에 안 보이는 분자웍을 하는 것보다 재밌어 보였고(눈에 보이는 마크로한 것이 좋았다), 결과론적으로 학사부터 박사까지 필드 실험과 모델링 연구를 연계하여 "기후변화가 작물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는 연구를 수행하게 되었다.
필드실험(좌)과 작물모델링(우)을 통한 기후변화 영향평가
박사과정까지 다닐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연구 주제가 마음에 들었던 것도 있지만 지도교수님의 인품이었다. 많은 대학원생들이 학위과정 중간에 그만두거나 박사까지 할 생각이었으나... 석사만 마치고 사회로 나가는데, 주변 케이스를 보면 교수님과의 성격 차이나 교수님이 시킨 연구 주제에 대한 불만족이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다. 물론 연구 자체가 안 맞는 성향도 있다. 여하튼 필자의 지도교수님은 매우 인자한 인품을 지니신 분이셨다. 학교에서도 인자하신 것으로 소문이 자자하신 분이셨고, 몇몇 교수님들은 필자의 지도교수님이 화내시는 것을 십 년 넘게 한 번도 못 보셨다고 할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지도교수님은 학생이 하고 싶은 연구를 하게 해 주시는 분이셨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학사 졸업논문에서 하고 싶다고 한 주제로 박사 연구까지 하게 해 주셨고... 나중에는 관련된 프로젝트가 종료되어 펀드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연구비를 가져오셔서 하고 싶은 거 하라고 주셨다.
정리해보면 농학 연구에 관심을 갖고 지금까지도 재밌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원하는 연구를 할 수 있게 아낌없이 지원해주신 지도교수님과 불확실한 인생 루트를 택했음에도 변함없이 지지해주고 중요한 결정때마다 조언해준 가족의 존재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