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산문을 쓰기 위한 메모 1
늦은 밤 산책을 한다. 아픈 어깨 스트레칭을 하면서 산책을 한다. 산책을 하면서 이병률 시인을 생각한다. <이어도공화국 6 - 서천꽃밭 달문 moon> 시집 원고를 메일로 보냈다. 표사를 이병률 시인이 써주기로 하였다. 참 고맙다. 그동안 연락도 자주 하지 못했는데 선뜻 써주겠다고 하여 참으로 고맙다. 나는 그동안 문단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서 살았다. 나는 다시 문단 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문학활동을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내가 언제 이 지상에서 떠나게 될지 모르지만 떠나는 그날까지 문인들과 함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나의 작은 숨결이라도 보태야만 할 것이다.
나와는 달리 이병률 시인은 그동안 참 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배우처럼 잘 생긴 외모와 뼛속까지 시인인 그는 마음이 참으로 따뜻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간직하고 참으로 잘 살아왔다. 그에게서 나는 많은 것들을 배운다. 그는 선한 영향력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길을 알려주었으며 또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도 받고 있다. 앞으로 나에게도 선한 영향력으로 나를 깨달음의 세상으로 인도할 것 같아서 마음이 설렌다.
2022년 11월호
글 유슬기 기자 / 사진제공 달 출판사
이 병 률
1967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20개국 500여 도시를 여행했다. 스물여덟이던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라디오 〈이소라의 FM음악도시〉 구성작가로 일했고 현재는 출판사 ‘달’의 대표이자 화원 ‘그대가 준 꽃’을 운영하고 있다.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눈사람 여관》 《바다는 잘 있습니다》 등과 여행산문집 《끌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내 옆에 있는 사람》 《혼자가 혼자에게》 《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를 펴냈다.
오래전 이야기라고 해도 그때 그 이야기를 써달라고
그 이야기가 저에게 귓속말을 하는 순간이라고 할까요.
제가 직접 겪은 이야기, 주변의 이야기 모두를 포함해서
‘어떤 사랑이 있었지?’ 하고 생각에 잠기면
지나온 수많은 사랑 이야기들이 고개를 들고
‘이 이야기는 어때?’ 하고 말을 걸어오곤 했습니다.”
시를 읽을 때 우리는, 다 이해하지 못했으면서도 짐짓 알겠는 척하기도 한다. 정말로 이해할 수 없을 때는 급한 일이 생각난 척하며 책장을 덮는다. 이병률의 시는 안 그렇다. 시가 읽힌다. 부러 어려운 말을 하지도 않고, 함축적이다 못해 암호 같은 말들을 남기지도 않는다. 작가가 무슨 말을 하는 줄 알겠는 시를 읽을 때 우리는 눈이 맵고 콧날이 시큰해진다. 그는 도리어 마음에 축약되어 있던 어떤 말들을 고스란히 풀어내는 재주를 가졌다. 붙일 곳 없던 어떤 마음들이 그의 문장에 찰싹 달라붙는다.
어떤 면에서 이병률 작가의 글은 아카데미상도 받고 천만 관객도 동원한 영화 같다. 엄숙한 문단의 어르신들에게도 그는 살뜰하게 예쁨받는 문인이고, 서가를 걷다가 주저앉아 그의 책을 읽어 내려가는 가난한 독자에게도 돈독한 정인이다.
그의 시집은 시 앞에 선 마음의 문턱도 낮춘다. 무엇보다 이병률 작가의 책을 읽을 때는 책등에 꽂히는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SNS에서 찍어내는 문장들을 모아 전자레인지에 돌린 것 같은 인스턴트 책을 읽을 때의 민망함도, 아주 대단한 상을 받았다는데 뭐가 그리 대단한지 도통 모르겠는 책을 읽을 때의 소외감도 없다. 그는 자신의 책을 읽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지도 외롭게 하지도 않는다.
정호승 작가는 이병률을 두고 “시인이라는 이름 하나만 배낭처럼 걸치고 50여 개국을 정처 없이 떠돈다. 장미 향이 나는 1온스의 향수를 얻기 위해서는 1톤의 장미가 필요하다는데, 그의 책은 여행자의 가슴속에 눈물처럼 남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순간의 순간만을 담은 책이다. 그래서 실은 산문집이라기보다는 시집이며, 바다라기보다는 소금이며, 육체라기보다는 영혼이다”라고 했는데 그 장미 향에 감응한 이들이 많아 2005년 그가 낸 산문집 《끌림》은 무려 80만 부가 팔렸다.
책만 팔린 게 아니라 책을 읽은 이들의 영혼도 끌려 나왔다. 어떤 청춘은 심장이 펄떡이는 열병을 앓았고, 어떤 청춘은 홀린 듯 여행을 떠났다. 실용정보를 주는 데 머물렀던 여행책이 여행에세이라는 감성 장르로 변하게 된 것도 《끌림》 이후고, 그 후로 10년 동안 가장 많이 팔린 여행에세이 상위권에는 이병률 작가의 《끌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내 옆에 있는 사람》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후로도 그의 삶은 시를 쓰고 글을 쓰고 여행 떠나고 사진 찍고 사람 만나고 술 마시고 식물 키우는 게 전부다. 그에게 시와 에세이와 여행은 한때의 유행이 아니라 영혼의 북소리다. 그래서 살아 있는 한 그는 쓸 것이고, 찍을 것이고, 갈 것이다. 육신의 나이와 별개로 그는 여전히 소년이고, 청춘이다. 몸이 여기 머물러 있는 동안에도 그의 마음은 떠나고 있다. 그 시차가 그의 시를 만든다.
우리는, 우리는 왜 그렇게 말할까요
그렇게 말한 후에 그렇게 끝이었다죠
그 말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길이 없으니
절대 겹치거나 포개놓을 수 없는 해일이었다지요
왜 말은
마음에 남지 않으면
신체 부위 어디를 떠돌다
두고두고 딱지가 되려는 걸까요
대체 그 말들은 어찌어찌하여
내 속살에다
바늘과 실로 꿰매 붙여 남겨 놓는단 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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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잘 있습니다》, ‘왜 그렇게 말할까요’ 중
처음으로 사랑에 대한 산문집(《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을 썼다고 했습니다. ‘처음이었나’ 싶게 이전 작품들 속에서도 갈피갈피 사랑을 느꼈는데요.
“이전 책에 여행, 혼자의 키워드가 있었다면 새 책에는 ‘사랑’이라는 큰 주제어가 주인공입니다. 사랑했던 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죠. 왜 사랑이었냐고 묻는다면 20년 동안 한 권의 책으로 쓰고 싶었다는 조용한 욕구를 풀어냈다고 할까요.”
어떤 순간이 훗날 기록이 되겠구나, 하는 예감이 있나요. 혹은 종이 앞에서 어떤 순간들이 새로이 문장이 되어 나타나나요.
“오래전 이야기라고 해도 그때 그 이야기를 써달라고 그 이야기가 저에게 귓속말을 하는 순간이라고 할까요. 제가 직접 겪은 이야기, 주변의 이야기 모두를 포함해서 ‘어떤 사랑이 있었지?’ 하고 생각에 잠기면 지나온 수많은 사랑 이야기들이 고개를 들고 ‘이 이야기는 어때?’ 하고 말을 걸어오곤 했습니다. 실제로 사랑도 그렇죠. 한 사람을 사랑했던 만큼 문득문득 떠오르고, 고개를 들고… 그러다 액자 속 그림처럼 굳어지죠.”
사랑의 열정이 그러했고 청춘의 열정이 그러했고 먼 곳을 향한 열정이 그러했듯 가지고 있는 자와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확연히 구분되는 그런 것. 이를테면 열정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넌 자와 건너지 않은 자로 비유되고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강물에 몸을 던져 물살을 타고 먼 길을 떠난 자와 아직 채 강물에 발을 담그지 않은 자, 그 둘로 비유된다.
열정은 건너는 것이 아니라, 몸을 맡겨 흐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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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중
동물성 인간과 식물성 인간이 결국 헤어지는 이야기도 나오더군요. 누군가에겐 이번 책이 뒤늦게 알게 되는 연인의 안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대에게도 역시 “그리고 행복하다”는 이야기가 전해졌을까요.
“읽을 거예요. 저는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이니까요.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면 작가는 자신의 일에 자신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어요. 저는 사랑도 치열하게 하고, 삶도 그만큼 치열해야 한다고 믿는 편이에요. 그 결과가 어떤 행복으로 도착하는 거죠. 나는 쓰는 사람이니까 나 역시 충분히 행복할 거라고 그 사람에게 전해지겠죠.”
학창 시절 음악실에 있던 낡은 가방에서 먼지를 떨어내니 그 안 깊숙이에서 고장 난 카메라를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이후 모든 순간에 카메라가 함께하죠.
“스무 살의 나는 나중에 영상 일을 할 거라고 믿었어요. 글을 쓰지만 영상적인 일을 겸하는 사람이요. ‘시를 쓰는데 카메라가 무슨 필요가 있을까’라고 생각하지 않고 ‘시를 쓰기 때문에 카메라는 더 필요해. 당장은 마음먹은 만큼 잘 찍을 수 없겠지만 천천히 이렇게 찍다 보면 카메라로 시를 쓸 수 있을 거야’라고 믿었어요. 많이 다니고 싶다는 의지를 카메라에 박아둔 셈이라고 할까요. 10년 전에 찍은 사진과 지금 찍은 사진은 미적으로 많은 차이를 보이는데 그건 제 감각이 변하고 있다는 증거일 거고, 계속해서 나 자신이 여행 중이고, 진행 중인 거겠죠.”
셔터를 누르고 싶어지는 순간은 어떻게 찾아오나요.
“좋아하게 되거나 사랑하게 되거나… 그럴 때요. ‘어떻게 처음 만나는 대상이나 풍경을 사랑할 수가 있어?’라고 묻는 사람도 있어요. 좋아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으면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 아닐까요? 물론 소유 개념으로 드리는 말씀은 아니지만요. 그래서 바싹 다가간다는 의미로 셔터를 누릅니다.”
사랑을 통해 성장하는 사람, 사랑을 통해 인간적인 완성을 이루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명백히 다를 수밖에 없다. 사랑은 사람의 색깔을 더욱 선명하고 강렬하게 만들어 사람의 결을 더욱 사람답게 한다. 사랑은 인간을 퇴보시킨 적이 없다. 사랑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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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옆에 있는 사람》 중
시간이 흘러 예전에 쓴 글을 다시 읽는 느낌과 그 시절 찍은 사진을 다시 펴보는 느낌은 어떤 점이 같고, 또 다른지 궁금합니다.
“음… 결은 같고 숨은 달라요. 길이는 같은데 음표가 달라졌죠.”
그러고 보니 음대에 가보라는 옛 은사의 추천이 있었는데요. 그래서 합창단에도 들어갔고요. 문예창작을 전공하게 된 건 어떤 여정이었나요.
“중3 때 첫 꿈이 시인이 되는 것이었고요. 고2 때 음대 이야기가 나온 거예요. 시인이 되는 건 돈이 하나도 안 들어요. 음대에 가는 건 계속해서 돈이 들어가는 일이고요. 그 차이예요. 음악을 해도 시처럼 음악을 하고, 그림을 했더라도 시처럼 했을 거란 생각은 늘 해요. 시는 어렵거나 고상한 게 절대 아니니까요.”
조용히 음악실의 문을 열고 닫던, 과묵한 소년은 여전히 지금도 함께하고 있습니까.
“어제 나희덕 시인과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시인은 소년과 소녀를 안에 꼭꼭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라고요. 저는 여전히 소년성과 함께하고 있네요. 양보할 수 없죠. 소년성을 완전 제거했을 때 나는 시를 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여전히 궁금한 게 많고, 가 닿을 곳이 많고, 어지를 것은 더 많고 그래요.”
지금은 시를 쓰면서 화원을 하고 있지요. 식물도 시라면, 꽃을 선물하고 싶은 이와 화분을 선물하고 싶은 이는 어떻게 다른가요. 받는다면 어떤 선물을 받고 싶은지요.
“별로 큰 차이는 없을 거예요. 꽃다발은 보통 어떤 순간을 축복하면서 기도를 담는다는 일반적인 의미가 있지요. 저는 스토리를 가진 사람에게 화분을 선물해요. 당신 인생의 스토리를 잘 이어가라고요. 저는 둘 다 받고 싶습니다. 둘 다 받아서 아주 오래 지켜볼 겁니다(웃음).”
이병률 작가 2편으로 이어집니다.
입력 2022.10.30 16:58
글 유슬기 기자 / 사진제공 달 출판사
‘왜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른가’ 하는 지점 때문에
고통스러웠던 적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것 없이 저는 예술을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남들과 다른 안경을 쓰고 사는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남들과 다르게 물속에 오래 있을 수 있는 거야’라고 믿고요.
섬세하고 여린 감각을 지니고 사는 일은 때로 고단하지 않나요. 이제는 그 고단함도 잘 다루는 법을 배웠습니까.
“왜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른가, 하는 지점 때문에 고통스러웠던 적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것 없이 저는 예술을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남들과 다른 안경을 쓰고 사는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남들과 다르게 물속에 오래 있을 수 있는 거야’라고 믿고요.”
수줍음 많은 내향인 기질과 여행가의 삶은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어떤 충돌을 일으키는지도 궁금합니다. 낯선 이들과 만나 친밀함을 얻는 과정은 여전히 설레는 일인가요.
“저는 내향적인 사람이에요. 이런저런 일을 하는 데 그 성격으로는 내가 힘든 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이 힘들겠구나 싶었어요. 성격을 조금 여니까 사람들이 잘 보이더라고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은 여전히 설렙니다. 첫 페이지가, 어떤 페이지가 궁금하기 때문이에요.”
작가로뿐 아니라 출판인(그는 현재 출판사 ‘달’의 대표다)으로, 이 글을 책으로 만들고 싶다는 감각은 어떤 순간 찾아오나요.
“남들 입장에서는 작품이라고 거창하게 말해주기도 하지만 그저 나의 개인적인 노트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걸 ‘의자를 차지하고 앉아서 읽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자주 머릿속에 굴려봅니다. 이걸 왜 쓰는지, 이것이 어떻게 가 닿는지… 그림이 조금 나오기 시작하면서 선명해지는 순간, 그 순간이 아닐까 싶어요.”
문인들과도 오랜 교분을 나누고 있습니다. 박완서 선생님과도 오랜 벗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작품 안팎의 내밀함을 나누었을 것 같아 부러운 마음도 듭니다.
“박완서 선생님은 어디 가서 저를 소개할 일이 있을 때 저를 친구라고 하셨어요. ‘내 친구예요’ 이렇게요. 저를 친구로 봐주시는 건 ‘나눠야 할 사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나 싶은데 저 역시 어른을 대할 때 많이 어려워하면 나눌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서열도 그 무엇도 다 떼어버리고 마주 앉은 상태가 친구라면, 제가 더 많이 친구가 되어드려야겠다 싶었죠. 그래서 저는 선생님 내면의 풍경을 많이 봤어요. 참 곱고 아름다운 분이에요. 여전히 지금까지도요.”
한편 이병률 작품에 매료된 독자들이 작가에 대해 가진 기대 혹은 오해가 때로 부담스러운 적은 없었나요.
“제가 친절하고 자상하다고 믿으시는데 대체로 그런 편이지만 일방적인 상황 앞에서는 저도 그럴 수가 없거든요. 특히 어떤 이들의 일방적인 말투나 행동 앞에서 ‘제가 그렇게 따뜻해 보여요? 무조건 그런 사람만은 아닙니다’라고 말한 적도 있네요. 기대도 오해도 어떤 말도 잘 소화할 수 있는 저를 보면 그것도 그렇게 부담스러운 일은 아니에요.”
시를 쓰는 나와 산문을 쓰는 나는 서로 친한가요. 둘은 서로를 도와주나요.
“저는 분리해서 생각해요. ‘시가 될 수 있는 것과 산문이 될 수 있는 덩어리는 서로 다르다’ 이렇게 믿고 밀고 나가는 편이에요. 제가 작업하는 데 있어 그게 편해서일 거라는 생각도 들어서죠.”
여름이 곧 겨울이 되는 것 같은 요즘, 이 계절에 어울리는 차와 꽃은 뭘까요.
“메리골드꽃차와 과꽃이 떠오르네요. 이런 가을엔 그런 향이 나는 사람이 좋습니다.” (참고로, 메리골드의 꽃말은 ‘헤어진 친구에게 보내는 마음’이다.)
삶에 딱 10분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아, 10분 뒤면 나는 죽어 없어지나요? 화분에 물을 줘야죠(웃음).”
독일 뮌스터의 광장 시장에서 허수경 시인이 사준 꽃씨 봉지들을 찾았다. 그중에 제일 먼저 큰 화분에 뿌린 수레국화의 싹이 올라왔다. 무표정에도 표정이 있다는 건 나만 아는 사실일 텐데 그 무표정 사이로 단비 내리듯 기쁨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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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중
가을이 환절기처럼 느껴지는 요즘이다. 이 아슬아슬한 찰나에도 성실하게 단풍은 든다. 그런데 단풍이 말이다, 계속해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물들어가는 속도가 사람이 걷는 속도하고 똑같단다. 밤낮으로 사람이 걸어 도착하는 속도와 단풍이 남쪽으로 물들어 내려가는 속도가 일치한단다. 도대체 이런 말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나는 이병률 작가의 책을 읽고 알았다.
밤낮으로 걸어가다 보면 이 아쉬운 가을, 단풍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아니, 나란히 걸을 수 있을까.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생각을 시인의 책을 읽으며 하게 된다. 어쩌면 시인의 역할이란 그런 것이다. 써보지 않은 근육을 써서, 해보지 않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일. 생각지도 못한 날 가방을 싸서, 문득 훌쩍 떠나게 만드는 일.
이병률 작가의 북소리를 따라 정처 없이 걸어본 이들의 영혼은 여전히 청춘일 테지만, 육신은 어딘가에 정박해 있다. 그럴 때면 그의 책을 펴보거나, 그의 정원에 가본다. 시간을 되돌리지 않아도 거기엔 여전히 시인이 있다. 시인이 있다고 해서 세상이 더 나아지리란 보장은 없지만, 시인이 없다면 분명히 세상은 나빠질 것이다. 늘 하던 생각, 늘 하던 말만 하는 이들만 우글댈 테니. 이를테면 우리가 쉽게 쓰고 버리는 10분처럼.
우리는 그 10분을 견디지 못할 뿐 아니라 자주 무시한다. 나는 이제 10분이란 시간 안에 얼마큼의 연료가 들어 있는지를 말하려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10분 먼저 출발하거나 10분만 늦게 출발했더라도 우리는 큰 소나기를 안 맞을 수 있었다. 내가 10분만 늦게 태어났더라도 당신과 생일이 같아서 당신의 운명과 나의 운명이 같을 수도 있었을 거란 가능성과 당신이 10분 먼저 그 자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면 나와 같이 오래 밤길을 걸을 수도 있었을 거란 사실을 생각하면 그 10분에 중요한 것이 충분히 담겨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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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혼자에게》 중
기자명 박중선 기자
승인 2022.10.22 10:00
달 출판사에서 만난 이병률 시인ⓒ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박중선 기자】 “사람을 진정 사람이게 하는 것은 누구나 가지고 태어난 그리움의 인자(因子) 때문일 것이고, 바로 그 그리움 때문에라도 사람은 섬뜩할 정도로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을 가지고 사는 건지도” -도서 <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5쪽
사랑은 집에서 기르는 식물을 위해 빗물을 받아 두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밤새 그리움을 뒤적이다 어느 페이지를 접어놓은 마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벗어둔 뒷모습을 아스라이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병률 시인은 말한다. 당신의 바다는 잘 있냐고. 잊혀 지지 않는 존재는 밀물처럼 밀려와 어느새 발목에서 찰랑거린다. 어느 날은 차라리 높은 파도라 하겠다. 그렇게 우리는 사랑을 하고 어떤 사랑은 잊지 못한다. 누구는 사랑이 밥 먹여 주냐고 말한다. 반문한다. 실제로 밥 먹여 주지 않는가. 내안의 모든 세포들에게.
오후 두 시. 바삭해진 햇볕의 살갗이 들이닥친 파주 출판단지를 걸으며 이제서야 가을의 몸통으로 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마침 이병률 시인과의 첫 만남을 책갈피처럼 쓰려고 굳이 이곳을 찾았다면 근사한 변명이지 않은가. 사랑하기 위해 떠난 시인이 오랜만에 안부의 편지를 부쳤다. 당신의 사랑은 안녕하냐고.
이병률 시인은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좋은 사람들’과 ‘그날들’이 당선돼 등단했다. 현재는 문학동네 계열 출판사인 달의 대표로 있다. 그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들을 순서대로 적어내려가기 위해 글쓰기를 시작했다가 실수처럼 그 길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투데이신문은 신간 <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로 3년만에 독자들에게 돌아온 이병률 시인과 경기 파주에 위치한 달 출판사에서 만나 그의 사랑에 대한 소식과 이야기를 들어봤다.
Q. 책 전반에 흐르고 있는 사랑의 대상은 어떤 특정한 대상 한 분이신가요.
네. 가장 많이 아팠던 사랑. 그 한 사람과의 사랑 때문에 결국 이 책이 태어나지 않았을까 합니다. 결국 모든 사랑은 끝나는 것이죠. 다만 그 사랑들이 화석처럼 순간순간 들춰지며 글을 쓰게 했습니다.
Q. 이번 신간뿐만 아니라 시인님이 운영하시는 달 출판사에서 출간하는 책들은 표지가 인상적이에요. 시인이 아닌 출판사 대표로서 특별히 신경 쓰는 부분인가요.
디자인에 많이 개입하는 편이에요. 책 자체를 좋아하는 건 기본이고 책 디자인에 관심이 많아서 출판업을 하고 있어요. 여행 산문집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같은 경우 책을 집필할 때쯤 내년엔 어떤 톤의 색감을 사람들이 좋아할까 생각하다 거의 색 위주로 디자인을 했어요.
Q. 이번 신간에 수록된 사진은 전부 필름 사진이라고 들었습니다. 필름 사진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서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이미지는 있지만 필름 카메라는 아무래도 더디게, 느리게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피사체를 좀 더 들여다보게 되는 섬세한 작업이라는 점이 매력이지 않을까요. 앞으로는 필름 사진을 좀 더 찍지 않을까 생각을 하게 되는 책 작업이었습니다.
Q. 역시 시인님에게 사진 얘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네요. 사진과 글, 어떤 장면과 감정의 순간 그리고 이야기를 기록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기능을 하지만 각각의 매력은 다른 것 같습니다. 사진과 문장에 대한 시인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자신을 이미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풀어서 이야기를 하자면 이미지를 좋아하는 사람. 여성은 다른 감각으로 대상을 읽고 상황을 읽는데 남성은 시각적인 것으로 읽는다는 것과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미지로 기억하는 순간순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제 기억력보다 이미지로 기억하는 그런 순간들이 저한테는 굉장히 중요해서 그런 것들을 글로 써 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한 장 한 장의 사진들을 문장으로 녹이는 것이 시의 작업이라고 한다면 사진을 좋아할 수밖에 없고 사진을 다 기록할 수밖에 없는 제가 만들어진 것이죠. 그걸 빼놓고는 제 산문도 시도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의 스무 살, 카메라의 묘한 생김새에 끌려 중고카메라를 샀고 그 후로 간혹 사진적인 삶을 산다고 한다.
Q. 사진을 찍을 수 없는 상황도 있지 않나요.
그런 경우에는 가슴에 저장해 두려고 하는 편이에요. 사람이라는 게 기억이나 이미지를 저장하는 용량에 한계가 있으니까 카메라가 너무나 그걸 잘 도와주는 도구라는 걸 느끼죠.
Q. 사진전을 여셔도 될 거 같아요.
네. 사실 이번 책이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사진전이라는 걸 하게 됐어요. 저는 사진전을 본격적으로 하는 것 자체가 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저의 본업이 아니기 때문에 좀 꺼려왔고 조금 미뤄왔다면 좀 자연스럽고 소박하게 제주에 오래된 카페 ‘로즈’라고 하는데서 많은 사진 말고 크지 않은 사진으로 구성해서 해보자는 제안이 와서 오픈했고 이달 23일까지 전시하게 됐습니다.
이병률 시인이 새벽시장에서 직접 골라 사온 아스클레피아스ⓒ투데이신문
Q. ‘그대가 준 꽃’이라는 식물가게도 운영 중인걸로 아는데 어떤 곳인지 궁금합니다.
며칠 전에 문을 닫았어요. 저의 허영이기도 했는데, 식물 다루는 걸 제대로 배운 적도 없지만 너무 좋아해서 혼자 기르면서 알게 된 것들을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했던 바람이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여행을 자주 떠나는 바람에 지속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어요.
식물들은 한 사람이 계속 그 식물을 대하는 시계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시기를 한 사람이 쭉 관리를 해야 되는데 그런 상황이 되지 못했죠. 식물 가게는 그냥 식물을 좋아하는 일과는 달랐습니다. 시장을 자주 다녀야 했기 때문에 식물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하게 된 기회가 됐습니다. 오늘도 새벽에 시장에 가서 꽃을 사왔습니다.
Q. 독자들이 많이 찾아왔을 것 같아요.
많은 분들과 다른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는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북토크나 어떤 사인회에 가서 작가를 만나는 거랑은 다른 개념으로 가게에 오시는 거니까. 저는 식물을 기르는 일이나 좋아하는 일은 시를 쓰는 일과 일치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퍼포먼스를 통해서 저의 시심을 전달하는 현장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Q. 햇빛의 농도와 바람 그리고 청명한 하늘. 오늘 날씨가 진짜 가을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날 어울릴만한 꽃이 있을까요.
‘메리골드’라는 꽃이 1층 창가에 놓여 있습니다. 노란색 꽃이에요 향이 정말 진해요. 여름의 끝자락에 한창 피는 그런 꽃인데 레이스 같은 결을 갖고 있어요. 나라마다 꽃말이 약간씩 다를 수 있는데 제가 스페인 여행 중 어느 시골 마을에서 본 꽃이 메리골드였어요.
‘당신과 영원히 오래 살고 싶어요’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어요. 쓸데없이 로맨틱하다며 냉소적인 웃음으로 돌아섰는데 그게 되게 영혼이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누구나 프러포즈 할 때 그런 사랑의 감정과 영혼에 대해서 생각을 할 텐데 문득 그 꽃과 꽃말이 이번에 나온 신간을 잘 설명해 준다는 생각이 드네요.
Q.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의 책장에 꽂혀있는 책을 통해 그 사람의 취향이나 성향을 유추하기도 하잖아요. 시인님은 어떤 통로로 사람을 바라보시나요. 그리고 어떤 사람을 좋아하시나요.
그냥 보통사람하고는 조금 달랐으면 싶어요. 나이에 맞는, 성 개념에 맞는 또는 사회기준에 맞는 그런 것들이 있는데 그걸 좆는 사람이 아닌 약간 독특한 분위기의 사람에게 눈길이 가요. 그리고 저를 어려워하지 않고 자기 얘기를 자연스럽게 하는 사람들에 인연이 좀 쉽게 열리는 것 같아요. 또 하나 중요한 포인트는 결핍이 느껴지는 사람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는 것 같아요.
Q. 어떤 종류의 결핍일까요.
어떤 종류에 관계없이 정신적이든 환경적이든 결핍이 느껴져서 바싹 마른 상태인 사람. 제가 쭉 집중하게 되는 인간형인 것 같습니다.
Q. 연민도 섞여 있는 건가요.
그렇죠. 제가 사춘기 시절 환경적으로 닮고 싶은 사람이 제한돼 있었어요. 열려있지 않은 환경 속에서 성장을 해서 그런지 그런 감정에 마음이 기웁니다.
Q. 책 끝부분에 ‘매일 정각에 자신에게 들리는 일’이라는 이 문구에서 “자신과 마주하지 못하는 일은 비극이다”라고 말한 프란츠 카프카가 떠올랐습니다. 시인님에게 있어 매일 정각에 자신에게 들리는 일은 어떤 의미인가요.
그 개념이랑 많이 다르지 않을 것 같아요. 내 주변에 가득 차 있는 그런 사람들 속에서 나를 잃어버리는 것보다 내가 좋아하는 걸 한 가지씩 놓치지 않는 그런 것으로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무엇을 할 때 정신이 맑아지고 심장이 뛰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하루에 한 번씩 있으면 좋겠다는 의미일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저도 최근에는 산책할 시간이 좀처럼 생기지 않으니까 어떻게든 산책을 하자. 그래서 온전히 내 시간을 갖자. 의식일 수도 있지만 저에겐 굉장히 중요하고요.
내가 무엇을 마주했을 때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떤 시간대를 만났을 때 나임을 확인할 수 있는 거.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늘리자 그런 개념이었고, 그러려면 일부러 시간을 안배해서 비워둬야 하잖아요. 그런 정도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병률 시인의 신간 <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투데이신문
Q. 요즘은 밖으로 넘쳐 흘러내리는 농도 깊은 감정들을 오글거린다는 이유로 서둘러 닦느라 바쁜 것 같습니다. 이러한 풍조는 마치 절절한 사랑이 멋스럽지 못하다고 여겨지거나 불안한 세대의 사치스러운 감정으로 전락하게 돼버린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 시인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너무나 좋은 질문이신 것 같아요. 처음 듣는 질문입니다. 한 인간이 갖는 풍성함과 풍요로움 같은 것들이에요. 그것이 감수성일 수도 있고 감정의 극대화일 수도 있는데 이런 것들이 넘쳐나면 안 되는 풍조로 굳어져 가는 게 안타깝죠.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건데 규격화하고 어떻게 해야 하고 너무 닭살스러운건 안되고 너무 올드한건 안 되고. 어제 북토크 때 대구를 갔다 왔는데 어떤 분이 “옛날에 쓰신 글을 이번에 출판한 것 같다”며 “지금 나이의 감성으로 쓴 것 같지 않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어떻게 대답을 해줘야 할까 고민하다 한 마디 했습니다.
“어제 쓴 글을 오늘 그냥 낸 겁니다”
Q. 무라카미 하루키의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이라는 소설에 빗대어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한때 어떤 사람의 한 조각만으로도 100퍼센트의 사랑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보통은 나이가 들어가며 1퍼센트의 망설임 때문에 사랑에 쉽게 뛰어들지 못합니다. 시인님은 어떻습니까.
저는 1퍼센트의 감정만으로도 사랑을 시작하겠습니다. 근데 그 1퍼센트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들어야 되고 노력해야 되고 깨질 확률을 전제로 하는 거잖아요. 1퍼센트에서 100퍼센트까지 쌓으려면 이게 안 될 확률이 더 높다고 해버리는 것이 나이들어감이고 청춘의 반대편으로 달아나는 겁니다. 뭔가를 저지를 준비만 되면 1퍼센트의 감정이더라도 뛰어들 수 있어야 하는데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이죠.
청춘은 끝났다고 선언해버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지금 말씀하신 그런 현상들이 있는 것이죠. 무언가를 저지르는 에너지에 청춘의 생명이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될 것이라고 미리 예견하는 것들이 우리를 망설이게 하고 우리는 더 이상 사랑을 하지 못하게 되죠.
Q. 시인 보들레르는 “떠나기 위해 떠나는 자가 참다운 여행자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치 시인님을 위한 말이기도 한 것 같은데요 시인님에게 여행은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피를 바꾸려고 많이 애를 쓰는 것 같아요. 제 피가 어떤 피 인지는 모르겠지만 좀 더 나빠져도 상관이 없고 지금의 피는 아니었으면 합니다. 좀 더 들끓고 에너지가 넘치는 강력한 피를 희망합니다.
제가 무난한 피로 태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면 굉장히 불쾌한 기분에 사로잡힙니다. 뭔가 저지를 수 없는 어쩌면 소심하게 태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저를 더욱더 도전적인 피로 바꾸려고 하는지도 몰라요.
글을 쓰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고 말할 수도 있겠어요. 새로운 것을 계속 흡입하고 낯선 바람을 계속 맞아야 나는 단련이 되고 또 그러면서 내 피도 바뀔 것이라는 믿음. 자신을 디자인 하지 않으면서 남을 울리거나 흔드는 글을 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일찍 한거죠. 그래서 여행은 작가가 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말씀드리기엔 너무 많이 책을 냈지만 저는 계속해서 작가가 되는 과정에 있고 여행은 그 교육의 현장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나는 당신에게 나무 한 그루를 심는다. 매일 물을 주고 돋아나는 잎을 관찰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려함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려 함이라는 것을 당신에게 고백한다” -도서 <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256쪽
Q. 최근 예비 작가들이 문예지 등단이나 신춘문예를 목표로 하기 보단 독립출판사를 통해 글을 발표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출판사 대표로서 어떻게 보시는지요. 그리고 독립출판사가 대형 출판사들 사이에서 가질 수 있는 독자적 무기가 있을까요.
일단은 기존의 출판사들이 선호하지 않는 또 출판 의사를 갖고 있지 않는 경향의 책들이 독립출판의 개념을 통해 출간이 되는데 저는 굉장히 격려하고 독려합니다.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나는 내 몸 속에서 책을 한 권 가지고 태어난 것 같은데 이 책들이 계속 꺼내져 있고 책갈피가 계속 바람이 불 때마다 흩날리고 있고, 내가 경험을 쌓을 때마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빈 페이지가 계속 기록되어지고 채워지고 있구나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을 거라 생각해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책을 세상에 꺼내놓기에는 출판이라는 벽, 어떤 기성의 틀은 조금 편하지 않겠죠. 이러한 환경 속에서 독립출판 시스템은 굉장히 좋은 현상이죠. 그리고 왜 모든 사람들이 등단제도를 통해 그 제도를 뛰어넘어야만 작가라는 자격을 가질 수 있을까라고 생각을 한다면 그 자체 역시도 구태의연한 형식에 불과하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사인할 때 이런 말을 많이 써 드립니다.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요”
Q. 어떤 유명한 평론가분이 말씀하시기를 신인문학상이나 신춘문예의 당선은 어느 날 심사담당자 책상 위에 우연히 취향에 맞는 원고가 놓여 졌을 뿐이므로 당선에 자만하지 말 것이며 낙선에 실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시인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너무나 동감해요. 평가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너무 좌우되는 것이니까. 그 사람 취향에 잘 맞는 원고를 만났을 때 어떤 부싯돌 효과를 내는 것처럼 그런 것에 불과하죠. 그래서 당선되는 일도 상을 받는 일도 그게 저는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Q. 요즘 출판되는 책들의 트렌드는 ‘위로’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여러 이유로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러한 트렌드는 간혹 자신의 상처나 외로움, 우울함 등의 감정을 쉽게 외면하고 싶은 욕망이 키운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마치 두통이 왔을 때 쉽게 해결할 수 있는 타이레놀 같은 글이랄까요.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 인생의 여정이라는 말. 너무나 흔한 말이긴 한데 외로움, 상처, 슬픔, 정신적 허기, 상대적 박탈감 등 여러 가지를 포함하겠지만 이런 것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조각되거든요. 이런 것들을 간단히 해소하거나 회피하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온전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불안 요소들이 나를 조각하는데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이에요. 이번 신간 전편에 흐르고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섞여있는데 이 사랑을 통해서 내 자신은 조각이 되고 이 조각이 된 나를 대면하는 일이 결국 우리 인생의 끝에 남아 있지 않는가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흠뻑 다 받아들이고 자신을 계속 조각하며 사랑이라는 감정을 얻는다면 괜찮은 자신을 마주하지 않을까요. 이것이 이번에 쓴 책의 주제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Q. 마지막은 가벼운 질문으로 마치겠습니다. 왠지 시인님은 벌써 크리스마스 계획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삿포로에 갈 예정입니다. 일 년에 한 번씩 가고자 하는 주의고 가서 혼자 어떤 의식 같은 거를 치르죠. 안 마시던 혼술도 조금 해보고 눈 속에서 길 위에서 꽁꽁 얼고 눈을 맞으며 혼자 있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다음 시집에 대한 이런저런 구체적인 무엇들을 생각하려 합니다. 내년에는 일 년 내내 시를 쓸 계획입니다.
이병률 작가 ① < 유슬기의 이작가야 < 연재 < 매거진 < 기사본문 - 톱클래스 (chosun.com)
가을에 만나는 시인들…강은교·이병률, 산문집 나란히 출간 | 연합뉴스 (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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