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수가없다

#68. movie sketch

by Yearn


한국인을 위한
한국인에 대한



박찬욱 감독이 <헤어질 결심> 이후 3년 만에 신작을 선보였습니다. <어쩔수가없다>는 판타지 요소도 없고 복수극도 아니며 배경 역시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이라 감독의 전작들보다 진입 장벽이 훨씬 낮은 작품입니다. '완벽해 보이는 가장 만수가 어느 날 돌연 해고당한다'는 설정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확장성 있는 이야기죠. 개봉일을 ‘문화가 있는 수요일’로 잡아 관객 접근성도 높였습니다.


어쩔수가없다


박찬욱 감독은 관객을 외면하진 않지만, 쉽게 세상과 타협하는 연출가도 아닙니다. 그래서 그의 명성에 비해 작품에 깊이 공명하는 관객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이번에도 영화 평은 극단적으로 갈렸습니다. 수많은 별점 하나짜리 리뷰가 사실이라면 (좋은 쪽이던 나쁜 쪽이던 리뷰 작업은 실체가 있는 일입니다.) 이번 작품도 '대중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지는 못한 거 같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매니아 영화로만 여겨졌던 박찬욱의 영화가 논쟁의 중심에 섰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번 작품이 더 많은 관객에게 다가섰다는 뜻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쩔수가없다


<어쩔수가없다>의 첫인상은 '환갑이 지나도 칸느박은 여전히 현역이구나'였습니다. 그간 쌓아온 명성과 오랜 경력으로 이전 수준의 작품만 만들어도 적당히 평가받을 텐데 박찬욱은 여전히 진화하고 있었습니다. 명예의 전당에서 소수만 즐기는 공예품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일반 관객에게 한 발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서려 노력하는 태도가 인상적이었죠. 그런데 일부 관객은 정반대의 평가를 내렸습니다. '혼자만 예술한다', '여전히 예술병이다'라는 반응이 줄을 이었습니다. 물론 재밌었다는 평도 많았지만 유난히 안 좋은 리뷰가 눈에 띈 건 제가 느낀 감상과 간극이 컸기 때문입니다. 개성이 강한 작품에 호불호는 있을 수밖에 없지만, 같은 영화를 본 관객 입장에서 <어쩔수가없다>를 향한 비난 중 일부는 영화보다는 감독 개인을 향한 공격처럼 보였습니다. 그냥 재미없다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영화로 심한 불쾌감을 느끼는데 주된 원인이 감독인 거예요. 그래서인지 마치 안티카페 댓글처럼 '저 영화는 반드시 망해야 해', '저 영화가 재밌는 건 아름답지 못한 일이야' 정도의 열의가 느껴졌습니다. (실제로 CGV어플 리뷰란을 들어가 보면 재미없었다는 코멘트에는 반드시 좋아요가 2, 3개씩 눌려있습니다. 보통 CGV리뷰란에 좋아요가 눌린 경우는 잘 없고 간혹 가다 재밌었어요와 별로예요 사이에 번갈아가며 좋아요가 발견되는데 <어쩔수가없다> 리뷰란은 패턴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재미없어요에만 사람이 몰렸습니다.)


영화는 사양 산업이라고 하죠. 콘텐츠가 쏟아지는 OTT 바다에서 관객을 5분 안에 사로잡지 못하면 이탈률은 올라갑니다. 초반 모객에 사활을 걸다 보니 용두사미 작품이 많아졌고 관객 평균 집중력도 떨어졌습니다. OTT 등장으로 어디서든 원하는 콘텐츠를 볼 수 있게 된 관객은 영화의 존재 이유인 극장에 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클릭 한 번으로 영화를 껐다 켤 수 있는 지금 극장에 가는 건 낯선 사람과 약속 잡는 일만큼 번거롭죠. 하지만 이상하게도 주어진 가짓수는 늘었지만 만족스러운 경험은 줄어들었습니다.


넷플릭스 뭐보지


이런 상황에서 극장에 2시간 넘는 영화를 거는 건 웬만한 자신감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박찬욱 감독뿐만 아니라 크리스토퍼 놀란, 드니 빌뇌브, 폴 토마스 앤더슨, 마틴 스콜세지 등 현업을 꾸준히 이어가는 감독들은 갈수록 러닝타임이 길어지고 있죠. 더 이상 깊은 이야기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관객에게 극장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을 전하기 위해 적절한 템포를 찾는 중인 거 같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어쩔수가없다> 역시 관객과 소통하려는 감독의 의지가 강하게 느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호흡이 짧아 전개 속도가 빠르고, 사건을 보여주는 방식도 다양합니다. 희비극처럼 관객을 웃기다가도 갑자기 서글픈 배우의 얼굴로 애수를 자아냅니다. 여러 인물이 발군의 팀워크로 정교하게 이야기를 엮어가지만, 끝까지 결말을 예측하기는 어렵습니다. 스타일 면에서도 감독이 꾸준히 추구해언 표현주의 방식이 가장 자연스럽게 드러났습니다. 이전 작품인 <스토커>에서 머리카락이 갈대밭으로 변하는 디졸브 장면은 참신했지만 지나치게 멋 부린 느낌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니콜키드먼이 감탄했다죠) 그러나 이번 영화에서는 같은 방식이 비슷한 상황에 놓인 인물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장치로 쓰였습니다. 거칠던 표현 방식이 훨씬 자연스러워졌죠. 연기도 놀랍습니다. 배우들은 홍보 방송 내내 감독의 집요한 연기지시를 원망했지만, 완성된 결과물을 보고 나니 그 말이 고도의 돌려 칭찬하기가 아니었나 싶을 정돕니다.


어쩔수가없다


영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25년간 제지회사에서 근무하던 만수는 인수합병과 함께 하루아침에 해고당하고, 이전 삶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그러나 일이 좀처럼 풀리지 않고 제지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었다는 걸 깨닫자, 경쟁자를 제거하지 않으면 원하는 자리를 얻지 못할 거라 생각하죠. 결국은 ‘내 자리가 없다면 스스로 쟁취하겠다’는 마음으로 정적들(취업 경쟁자)을 한 명씩 제거해 나갑니다. 하지만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만수에게 사람을 죽이는 일이 쉽지만은 않고, 나날이 실체 없는 불안과 공포에 쫓기던 주인공은 돌이킬 수 없는 아이러니 속으로 빠져듭니다.


어쩔수가없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어쩔수가없다>를 보고 많은 관객이 <기생충>을 떠올렸습니다. 봉준호 감독을 의식한 게 아니냐며 조롱하는 반응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사회문제가 두드러지고 주인공이 다른 인물을 속여 자기 목적을 이루려 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닮았다고 생각한 건 영화 속에 한국인만 이해할 수 있는 정서가 담긴 부분이었습니다.


봉준호 감독과 박찬욱 감독은 작품의 완성도나 국내외 인지도가 높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연출 성향은 확연히 다르죠.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주로 사회 구조 속에서 개인이 겪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주인공은 공동체 안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저항하지만, 사람들과 완전히 멀어지지는 않습니다. <살인의 추억>이나 <괴물>, 하물며 <마더> 속 주인공까지도 변하지 않은 세상에서 자기만의 살 길을 찾아냅니다. 수정된 세상에 적응하며 함께 살아가는 거죠.


반면 박찬욱 감독의 작품 속 인물들은 공동체를 벗어납니다. 그 역시 <공동경비구역 JSA>부터 꾸준히 작품에 사회를 반영해 왔지만, 박찬욱의 이야기는 결국 사회보다는 개인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이런 사회에서 주인공은 이런 모습이 되어간다'가 아니라 '이런 사회에서 인물은 이런 선택을 하였다'인 거죠. 분단의 아이러니를 다룬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국군 수혁은 단순한 호기심으로 경계를 넘어 북한군과 어울리고, 그와 정을 나눈 북한군 오경필은 마지막까지 수혁의 철없는 행동을 감싸며 인간 대 인간으로 신의를 지키려 합니다. 구조적인 모순 속에서도 개인은 더 나은 선택으로 인간성을 회복하려 하죠.


반대로 <복수는 나의 것> 동진은 하나뿐인 딸을 유괴로 잃자 사회가 내리는 처벌에 만족하지 못하고, 직접 유괴범을 잡아 잔인하게 복수합니다. 박찬욱 감독의 인물들은 시스템을 고치기보다는 벗어납니다. 세상과 화해하지 못하고 새로운 세상을 찾아 떠나는 거죠. 같이 흡혈귀가 되어 한날한시에 불타 죽는 <박쥐>의 상현과 태주, <아가씨>에서 저택을 벗어나는 숙희와 히데코, 남몰래 세상에서 사라지는 <헤어질 결심>의 서래처럼요. 상대적으로 더 극단적인 인물들인 거 같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거장도 어쩔 수 없는 상업영화감독이기에 무모한 도전을 시도한 인물에겐 반드시 비극의 철퇴를 내렸다는 겁니다. <어쩔수가없다> 만수는 박찬욱 감독의 한국 작품 중 처음으로 자신이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지지 않는 주인공입니다.


어쩔수가없다


이 영화를 불편하게 느낀 관객들은 충분히 먹고살만한 중산층 만수가 극 중에서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게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감독의 기존 성향을 떠올리면 <어쩔수가없다>는 사회 구조 문제를 다루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여전히 인물에게 방점을 찍는 작품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주인공 만수가 중산층이라는 설정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고요. 왜냐면 이 작품에서 만수가 겪는 위기는 환경이 아닌, 그 안에 깊게 자리 잡은 강박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빈부격차를 넘어, 모든 한국인에게 내재된 말뚝 정서를 비추고 있습니다.


한국은 안 되는 걸 되게 하는 나라입니다. 그래야만 했던 시절이 있었고 세월이 흘러 예전 같은 강제성은 사라졌지만 계승된 정신만큼은 여전합니다. 언제나 경쟁이 치열하고 '안 되면 되게 하라', '불도저 정신', '갓생'등 시대에 따라 표현만 바뀔 뿐,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는 분위기는 그대로죠. 안정된 시스템보다는 각자도생을 선택하고, 기대 이상을 해내면 동경의 대상이 되지만 실패하면 낙오자가 됩니다. 초연결 사회 속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욕망을 동경하고 비교하며 끊임없이 높은 기준을 세웁니다. 연봉은 얼마 이상, 집은 어느 동네 몇 평, 몇 학년까진 뭘 배워야 하고 공부를 시작했으면 어느 대학은 가야 합니다.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보기 때문에 생활은 나아져도 삶은 변하지 않죠. 나도 뛰지만 내 옆, 뒤, 앞사람도 전속력으로 달리는 중이라 잠시라도 멈추면 바로 뒤처집니다. 그리고 중산층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위로 올라가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아래로 떨어지는 걸 겁니다.


어쩔수가없다


만수는 20년간 몸담았던 회사에서 조롱하듯 건넨 선물과 함께 하루아침에 해고당합니다. 일방적인 해고였지만 그는 상한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곧바로 다음 목표를 세웠습니다. 3개월 안에 무조건 재취업. 생각해 보면 저도 만수의 결정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거 같습니다. 저 선언이 낯설지가 않아요. 3개월은 기업이 허용하는 공백 기준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오래 쉬면 레일에서 벗어난 사람으로 평가받기 때문에 저런 계획을 세우게 되는 거죠. 한국사람들은 너무 바빠서 더는 이유를 찾지 않습니다. 만수처럼 싫다고 말하고 싶은 걸 꾹 참고 초조하게 앞으로 나가는 일에 더 익숙합니다. 이제야 원하던 삶을 이뤘다 생각했던 만수가 직장을 잃고 가장 두려워한 건 악착같이 들어온 중산층 레일에서 벗어나는 거였을 겁니다.


만수는 어떻게 할 수 있었습니다. 집을 팔면 빚을 갚을 수 있었고, 아내는 충분히 협조적이었습니다. 만수를 비추는 인물인 구범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돈 많은 장인과 아내가 이미 그의 취미인 LP를 살려 음악카페를 낼 계획까지 세워두었죠. 그런데 문제는 만수와 범모가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겁니다. 실직 후 중년의 위기를 맞은 인물들은 박찬욱 작품의 이전 주인공들처럼 스스로 삶의 방향을 선택해 갑니다. 그 결과가 파멸이라고 하더라도요.


어쩔수가없다


만수의 취미는 분재입니다. 분재는 화초를 원하는 모양으로 자라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가지를 자르고 철사를 감아 조정하는 일입니다. 자연스레 자라는 식물을 인위적으로 통제해야만 원하는 형태를 얻죠. 만수는 이상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해 분재처럼 무리하게 상황을 통제했습니다. 어쩔 수 없다를 되뇌며 마음과 다르게 안 되는 일을 억지로 추진하고, 터무니없는 살인 계획을 실행합니다.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사건만 지우면 그의 조급함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박찬욱 감독은 보편적인 정서를 특별한 이야기로 풀어내는 재주가 있죠. 해고된 만수가 분노에 가득 차 화초에 철사를 감는 장면은 한국인의 초상처럼 느껴졌습니다.


어쩔수가없다


그렇지만 아무리 박찬욱 영화라 해도 주인공이 취업 때문에 살인까지 저지르는 건 납득하기 어려운 설정입니다. 하지만 현란한 첫 번째 살해 시퀀스가 끝나자 모든 상황이 쉽게 이해되었습니다. 만수는 총을 쐈지만 범모를 죽이진 못했죠. 범모를 죽인 건 변하지 않는 남편을 견뎌왔던 아라였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총을 쏜 아라가 절규하듯이 외치는 한마디는 영화의 중심 대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실직이 문제가 아니라 실직을 대하는 니 태도가 문제야!!!"


만수는 아라의 절규에서 자기 미래를 보았는지도 모릅니다. 아라가 당긴 방아쇠가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되어 그의 불안과 강박은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멈춰야 하는 이유가 훨씬 많았지만 만수는 계획대로 모든 정적을 제거하고 끝내 목적을 달성합니다.


다음 세대가 될 만수의 아들은 아빠와 달랐습니다. '당하기 전에 베야 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엄마의 핑계 같은 거짓말도 완전히 믿지 않죠. 시원은 아빠를 이해하기 위해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해 묻습니다. 만수는 할아버지가 베트남 전쟁에서 돌아온 이후로 조금씩 이상해졌다고 말합니다. 외상 후 증후군을 겪은 거 같다고요. 실은 그 말을 하는 만수도 마찬가지였죠. 극단적인 그의 행동은 외상 후 스트레스 상태가 분명했지만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어쩔수가없다


일반적으로 해고 이야기를 할 때 밥줄이 끊긴다, 생계가 달렸다는 표현을 씁니다. 실직의 문제를 경제적인 부분으로만 보는 겁니다. 그렇다면 해고 과정이 부당했다 하더라도 다른 일자리를 찾으면 문제는 사라질 겁니다. 아라가 제안한 LP카페나 미리가 제안한 다른 회사를 선택하면 됩니다. 의외로 더 나은 곳에 자리 잡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만수와 범모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실직의 충격에 그토록 휩싸인 건 겪은 일이 너무나도 모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20년간 성실히 근무하며 삶을 바쳤던 조직이 아무런 해명도 없이 이들을 정리했습니다. 만수는 존중받지 못한 상처를 깊이 안고 있었지만 자기 상태도 모른 채 앞으로만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남보다 먼저 총을 꺼내 들었죠.


<어쩔수가없다>의 만수는 <헤어질 결심>의 서래와 달리 어떤 대가도 치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관객들은 화를 냈어요. 하지만 영화는 그의 앞날이 기대와 같지 않을 거란 걸 암시해 두었습니다. 만수가 다니던 제지회사의 이름은 '태양 제지'입니다. 그가 잃어버린 삶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안, 눈부신 햇빛에 노출되는 장면은 여러 번 반복됩니다. 첫 번째 면접에서 창 너머 들어오는 강한 햇빛 때문에 만수는 면접관 얼굴도 똑바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태양을 쫓던 이카루스처럼 어떻게든 정면으로 햇빛을 마주하려 했죠. 반면 시체를 묻은 마당에서 아들과 나무를 심을 때는 자신을 향하는 햇빛에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영화 속 날씨는 시종일관 화창했죠. 그런데 만수가 삶을 되찾고 '문 제지'로 입사하는 날은 비가 왔습니다. 돌아온 시투와 리투는 시체가 묻힌 사과나무로 향합니다. 미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아이들을 쫓아내고 더는 집을 팔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마당에 심은 비밀 때문에 만수 가족은 영원히 이 집을 떠나지 못할 겁니다. 가까웠던 미리와 만수 사이에는 벽이 생겼고, 아이들은 그런 엄마 아빠를 영원히 이해하지 못하겠죠.


어쩔수가없다


그래도 삶은 이어져 그림자가 드리운 가정에 리원이는 한줄기 빛이 됩니다. 그러나 오프닝에 만수가 다 이뤘다고 말했던, 에덴동산 같은 그날은 다신 오지 않을 겁니다. 영화 초반에 동료 해고 소식을 자기 일처럼 여기던 만수는 끝내 몇 명이 잘리던 자기 자리만 있다면 안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태양제지에서 하얀 철모를 쓰던 그는 문제지에 홀로 남아 피로 물든 빨간 철모를 씁니다. 그래서인지 기계가 나무를 베는 마지막 장면은 변해가는 세상에서 인간이 인간성을 잃어가는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악마가 사는 곳은 지옥



저는 <어쩔수가없다>에서 슬픈 한국인의 자화상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해외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는 걸 보면 결국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박찬욱 감독이 이 작품을 영화화하기로 결심한 이유도 어느 나라에나 이 이야기에 공감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제가 느낀 <어쩔수가없다>는 '으이그, 이 한국인들아'같은 선민의식이 느껴지는 작품이 아니라, 같은 어려움을 겪는 감독이 보내는 메시지처럼 보였습니다.


어쩔수가없다


박찬욱 감독이 HBO에서 <동조자>를 작업하던 시기에 미국 작가 조합이 파업을 선언했습니다. 규정상 모든 조합원이 일을 멈춰야 했지만 박찬욱 감독은 회의를 열었고 이 일로 조합에서 제명당했습니다. 감독은 대본을 쓰지 않았고 이미 정해진 내용과 관련된 회의만 진행했을 뿐이라고 항변했지만 항소는 하지 않았습니다. 선비처럼 꼿꼿하고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는 완벽주의자 박찬욱도(다큐발) 파업 중에 회의라도 해야 했던 겁니다.


영화 평이 극단으로 나뉘면서 <어쩔수가없다>는 예매율 1위 자리를 내어주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개봉 전 해외 판권 판매로 제작비를 모두 회수했고 현재 국내 흥행 성적만으로도 손익분기점은 가볍게 넘긴 듯합니다. 박찬욱 감독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는 팬 입장에서는 반가운 소식이죠. 영화처럼 대중의 선택을 받는 분야는 노력과 결과가 반드시 일치하진 않습니다. 관객 10명이 본 명작. 없을 법한 일은 아니지만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1,000만 명이 본 망작. 생각보다 흔한 일이죠. 박찬욱 감독은 영화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누누이 관객과 싸우지 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매번 개봉하는 작품마다 리뷰창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걸 보면 그의 영화와 대중의 거리야말로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보고 '어쩔 수 없지 않잖아?'라며 화를 내는 건 작품을 오독한 반응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세상에 나온 작품은 온전히 관객의 것이죠. 각자 인상이 다른 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어쩌면 주인공 만수를 보며 차갑게 화내는 관객의 반응이야말로 이런 영화를 만든 감독이 가장 바라던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가 끝났을 때 어쩔 수 없다는 공허한 말 뒤에 숨어 인간성을 잃는 삶은 살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어쩔수가없다


혹시 아직 <어쩔수가없다>를 볼지 말지 고민하고 계신다면 직접 보고 판단하셨으면 합니다.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지만 성의 없었다고 말하긴 어려울 겁니다. 한 평론가는 이 작품을 두고 박찬욱이야말로 관객을 제대로 대우하는 감독이라고 했죠. 극장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겠냐는 질문에 박찬욱 감독은 관객이 돌아올 수 있도록 더 재밌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저에게 이 영화는 충분한 응답이 되었습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셨다면 박빠 질린다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넷플릭스에 추석에 방영했던 다큐 <뉴-올드보이 박찬욱>이 올라왔더군요. 그걸 보면 박찬욱 작품을 항변하고 싶어 하는 팬들의 마음을 이해하시게 될 겁니다. 부디 자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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