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있는 동무가 되어주고 싶다.
어느새 봄이 온다. 엉성한 가지에는 꽃망울들이 피어나기 시작했고 학교에서의 내 소문은 소강되고 있었다.
“밥 같이 먹자.”
지수빈이 탁 소리가 나게 식판을 내려놓았다.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젓가락에 위태롭게 붙잡혀 있던 고기조각이 무참히 떨어졌다. 지수빈이 숟가락을 들며 싱긋 웃었다. 내가 아무리 쌀쌀맞게 대해도 수빈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늘 다정하고 밝다.
“아 학원숙제 안 했다. 잊어버리고 있었어. 으 선생님 아빠한테 전화하는데, 빨리 해야겠다.”
수빈이 몸서리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학원이 뭐이가?”
“진짜 몰라? 음 공부를 배우는 곳. 아니다. 예체능도 배우지. 학교를 마치고 나서 무언가를 배우러 가는 곳이 학원이야.”
“아 소조 같은 거구나.”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렸다. 내 이해력이 정확하다면 학원이란 곳은 소조일 것이다. 방과 후에 추가적으로 무엇을 더 배우는 곳. 나는 고아였지만 당당해지고 싶었다. 돌아가며 문제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재밌는 게임을 하는 소조는 끊임없이 사상교육을 하는 학교보다 훨씬 나았다. 소조에는 수학, 영어, 혁명역사등 다양한 학과목을 더 배울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군사교육과 사상교육이 우선이었기에 수업이 끝나면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자유로운 생각이나 창의성 같은 것은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
“학원에서 무얼 배우네?”
“나는 수학이랑 영어.”
“그거이 재미있어서 하는 거이니?”
수빈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뭐? 공부학원을 재미있어서 가는 애가 어디 있냐? 아마 전 세계! 아니다. 우주를 다 합해도 없을걸. “
수빈이는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기런데 너는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니? 하기 싫은 거인데 왜 그케 하는 기가?“
”오 마이갓. 지우야 잘 들어봐. 이 언니가 지구상에 있는 학생에 대해 알려줄게. 근데 너는 지구밖에서 온거지?"
"어른이 되면 좋은 직업을 가져야 하잖아. 그러려면 좋은 대학교를 가야 하고 많은 것을 배워야 하니까 당연한 거지."
”기래. 기카면 좋은 직업이 뭐이가?“
”그건 사람마다 생각하는 게 다르겠지 나는 고민중이야. 의미있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거든.“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좋은 사람이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 많은 돈을 버는 부자? 똑똑한 천재? 명예를 가진 사람? 그렇다면 나와는 다른 기준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이란 은주처럼 용기 있는 사람이다. 용기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화장실에 다녀와서 교실에 들어가 보니 언제나처럼 시끄럽고 어수선하다. 북조선에는 오전수업과 오후수업이 나눠져 있어서 밀도가 더 낮았다. 그리고 사상교육으로 인해 각이 잡힌 아이들은 떠들거나 자유롭게 돌아다니지 않았다. 선생님께 찍히면 경제과제가 늘거나 몽둥이로 매를 맞아야 했으니까.
교실 맨 뒷자리에 위치한 내 자리로 걸어갔다. 음? 누군가 내 자리에 앉아있는 것 같다. 서너 명이 내 자리에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 데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목에 힘을 주고 헛기침을 해 보았지만 반응이 없었다.
“뭐야?”
번들거리는 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소름이 돋았지만 내 자리인데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줌마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집에 들어오는 나에게 한 가지를 늘 당부했다. 어깨를 피고 고개를 들어 눈에 힘을 주면 에너지와 용기가 생긴다고. 거기에 미소를 추가하면 여유까지 생길 수 있으니 명심하라고 하셨다.
“거 내 자리인데 비키라우”
정말로 말이 나왔다. 그것도 당당하게.
“어. 알아. 어쩌라고?”
싸늘한 목소리로 입꼬리 한쪽만 올리며 비웃음을 흘리는 이 아이는 뭘까? 동무를 괴롭히는 아이는 남조선이든 북조선이든 크게 다르지 않고 진부해서 시시하다.
“비키라우. 선생님이 정해 주신 자리이지 않니?”
내 딴엔 용기를 내어 한 말인데 여자애는 실소를 터뜨리며 웃어댔다. 괴상한 웃음소리가 교실을 울렸다. 옆에 서있던 아이들도 깔깔거리기 시작했다. 뭐가 웃기는지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아 씨 겁나 웃기네. 그래 북한에서 왔는데 선생님 말 잘 들어야지. ”
“영애야 너 생각보다 말 잘한다. 처음에 총 맞고 벙어리라도 된 줄 알았잖아.”
긴 머리에 갈색 눈동자의 여자애는 키득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조선 드라마에 나오는 사나운 성격을 가진 예쁜 에미나이들 같다. 드라마가 영 후라이는 아니었구나. 불쾌하지만 뭐 이 정도는 괜찮다.
내가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많을 것이고 그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내가 탈북민이라서 비웃는 거라면 마음껏 하라지. 그게 결코 웃을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언젠가 알게 될 때 너희들이 한만큼 스스로 부끄러울 테니까.
오히려 예상을 벗어나 불편했던 아이는 편견 없이 나를 대하는 수빈이었다. 수빈이의 눈 속에 비치는 나는 북에서 온 동무가 아닌 그저 같은 동네친구였다. 수빈이는 내가 품고 있는 불안에 의해 야기된 결계를 뚫고 마음대로 넘나들었다. 내 마음을 움직이는 수빈이가 신경 쓰인다. 용기 있는 동무가 되어 주고 싶다. 은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