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같은 일들
토요일 아침. 아줌마는 언제나처럼 낡은 회색코트를 입고 갈색의 손가방 하나를 든 채 집을 나섰다. 아줌마가 나가기 전에는 설거지 그릇 부딪치는 소리, 샤워기 물소리, 옷을 꺼내어 입는 소리, 나의 아침을 차려놓는 소리가 나기 때문에 알람이 따로 필요가 없다. 비몽사몽 한 상태로 나와서 천천히 허리를 숙여 옷가지와 수건을 세탁기에 넣고 어수선한 집안 정리를 했다. 요즘 나의 아침습관이 되었다. 아줌마가 나간 아침을 가지런히 해두는 것. 그렇게 하루를 시작하는 기분이 제법 좋았다.
아줌마는 저녁에 돌아와서 정갈하게 정돈된 집을 보며 과하게 황홀한 표정을 짓곤 했다.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인데 뭘 저렇게까지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는 더욱 열심히 나의 아침을 매만졌다.
두꺼운 점퍼는 가벼운데도 생각보다 훨씬 따뜻했다. 게다가 진한 초록색이었다. 북에선 군복색과 비슷한 초록을 피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나는 진하고 쨍한 초록색을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점차 신기해진다. 아줌마는 내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나의 취향을 알고 있는 것일까?
시간이 지날수록 은주의 얼굴이 흐릿해지는 것도 그 자리를 아줌마가 차지하는 것도 짜증이 나서 아줌마에 대한 마음을 외면하기로 했다.
답답함에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골목에 줄지어진 상점들을 지나서 끝이 없는 앞을 향해 걸어갔다. 수빈이의 구멍가게도 보였다. 문이 반쯤 열린 구멍가게에 문득 발을 들여놓고 싶었다. 고개만 빼꼼히 내밀어 가게 안을 바라보았다. 낡은 진열장 위에 먼지 쌓인 과자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고 향초가 타는 듯한 냄새가 났다.
수빈이가 없다는 판단이 들자마자 안으로 발을 디뎠다. 적막한 가게를 둘러보다가 문이 열려 있는 가게 안쪽을 무심코 들여다보았다. 커튼도 없이 트여있는 방안에 아주 작은 상과 이불이 있었는데 마치 누군가 누워있는 듯 보였다. 묘한 느낌이 들어 침을 삼키지도 못한 채 혀 밑에 고인침을 모았다. 수빈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북에서는 부모의 장사를 도와서 잠시 가게에서 눈을 붙이는 아이들도 많아서 수빈이 자고 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가려 했다. 만약 수빈이라면 더 귀찮은 상황이 펼쳐질 것 같아서.
난 원래 은밀히 무언가를 수행하고 길고양이처럼 조용하게 흔적 없이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고아원에서는 조금만 튀는 행동을 하면 선생님께 매를 맞거나 노동을 해야 했기 때문에 가능한 몸을 숨겼었다. 북에서의 습관이 남아있어서 소리도 내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살짝 굽힌 무릎을 피는데 발목에 새까만 무언가가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작은 무언가가 내 다리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그것이 벌레라는 것을 확신하자 주저 없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내 호들갑에 놀란 벌레는 훠이 날아가버렸다. 고작 파리였다.
"누구세요?"
분명 크게 혼날 것이다. 어쩌면 도둑질을 하려고 마음먹은 아주 질 나쁜 아이라고 욕을 먹을지도 모른다. 억울함에 낯빛이 붉어진 나에게 백발의 할머니는 얇은 눈썹을 찌푸린 채 물었다.
"괜찮니?"
할머니는 걱정하는 듯 내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차분한 물음에 나는 도망도 침묵도 아닌 사과를 선택했다.
" 소란 부려서 죄송합네다."
" 놀랐겠구나. 바퀴벌레 같은 거였니? 아무리 청소를 해도 하수구에서 기어 나오거든. "
할머니는 내가 여기 들어온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다른 이야기를 하며 얕은 한숨을 쉬었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다음 상황을 기다렸다.
" 음료수라도 좀 먹고 갈래?"
할머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한참을 복기해 보았다. 예전부터 누군가 말을 하면 나는 항상 한 번 더 곱씹어본다. 스스럼없이 친절하고 다정한 미소 덕분인가. 따스함들이 가슴 위로 내려쬐는 듯해서 가게에서 풍기는 할머니의 내음을 음미하고 싶어진다. 내 또래가 아닌 마음 따뜻한 어른과 함께 있을 때에만 느낄 수 있는 안락함을 북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다. 어른이 주는 인정을 그렇게 원했지만 그토록 야박했다.
" 음료수가 뭐예요? "
할머니는 작은 냉장고로 걸어가더니 문을 힘겹게 열었다. 할머니가 꺼낸 음료수의 정체는 탄산단물이었다. 시원한 단물의 맛 뒤로 톡톡 터지는 상큼함에 반해 한 번에 들이켰다. 꽤나 목이 말랐던지 아직 갈증이 가시질 않았다.
”탄산단물 한잔만 더 주실 수 있습네까?“
할머니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웃었다.
" 네가 영애이구나. "
할머니의 심각하던 얼굴은 어느새 다시 미소를 찾았다. 그 미소와 함께 내 쿵쿵거리던 심장도 안정을 찾고 긴장감에 굳었던 얼굴 근육도 슬며시 풀어져 미소가 지어졌다. 할머니는 탄산단물과 작은 의자를 내주었다. 단물을 홀짝거리며 그 달콤함을 한참 동안 즐겼다. 할머니의 눈길은 왜 부담스럽지 않고 포근한 건지 모르겠다. 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슬쩍 눈웃음을 짓는 할머니의 반달 주름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 우리 손녀딸이 정말 친해지고 싶은 친구가 생겼다고 어찌나 떠들어 되던지. 그 친구가 너인가 보다. 영애는 참 예쁘게 생겼구나. "
할머니는 세월 속에 선명하게 길을 만들어낸 주름을 따라 활짝 웃더니 돈을 쥐어주었다.
"용돈이다. 맛있는 거 사 먹어. 자 늦었으니 얼른 집에 가렴. 어른들 걱정하겠다.”
할머니는 빠르게 가게에서 나를 내보냈다. 얼떨떨한 마음에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지만 구멍가게는 더 이상 들어오지 말라는 듯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갑자기 쥐어진 삼만 원. 그리고 은은한 과일향이 입에서 맴돈다. 꿈처럼 이상한 일들이 결코 꿈이 아니었다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