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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적응

머뭇거리지 말고 이 세계로 들어오라고.

by 예담



아줌마는 입안 가득 김밥을 넣고 우물거리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며 입을 옴짝달싹하셨다. 원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영애야... 탈북할 때 안 무서웠어?


“... ”


“가족들은? 가족은 어디에 두고 친구랑 결심을 한 거니?”


“저는... 고아원에서 있었습네다. 가족은 없습네다..하지만 은주는 내 하나뿐인 가족이나 진배없습네다. ”


아줌마가 나를 안고 울음을 터뜨릴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적막하다. 평온한 얼굴로 내 등을 쓰다듬으며 눈길을 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나는 그 눈빛과 손길로 모든 것을 느낀다.


“그렇구나. 아줌마도 너처럼 예쁜 딸아이가 있었어.”


나는 요점 파악을 못한다. 아마 국어시험을 치면 빵점일 것이다. 아줌마에게 딸이 있었다는 사실보다 너처럼 예쁜 이라는 단어에 집중을 했다. 나처럼 예쁘다니... 내가? 난생처음 들어본 말에 발가락이 꼬물거린다. 아줌마는 말을 이어갔다.


“내 딸도 너와 나이가 똑같아. 우리나라가 통일해서 기차를 타고 남과 북으로 여행을 하는 상상을 줄곧 했어. 요즘 아이들과 조금 다르지? 마음이 넓은 아이였어. 군인 아저씨들이 힘들게 나라를 지키지 않아도 안전할 수 있도록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거든.”


아줌마는 상념에 젖은 듯 허공을 응시하며 때때로 목이 메었는지 헛기침을 했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힘들진 않니?”


“힘든 것 하나도 없습네다.”


아줌마 덕분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짧게 대답했다.


“영애야 네가 여기서 두려워해야 할 상대는 아무도 없어. 그리고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항상 당당하게 어깨를 피고 너의 행복을 찾아서 모아보렴.”


아줌마는 그렇게 말하며 뒷정리를 하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행복을 모으라는 아줌마의 말이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하며 빵빵해진 뱃속에 김밥을 밀어 넣었다. 입안 가득 찬 김밥의 풍부한 맛에 저절로 행복해진다. 가만있자. 아줌마가 행복을 찾아서 모으라고 했던가. 입안에 든 음식을 씹으며 생각했다. 일단 오늘의 행복은 아줌마의 김밥이다.


집으로 돌아와 방안에 위치한 작은 옷장을 열었다. 안에는 북에서 가져온 나의 손가방이 걸려있다. 차마 그동안 한 번도 열어보지 못했던 가방을 잡은 손이 떨려온다. 손에 힘을 주고 마음을 강하게 먹었다. 가방의 지퍼를 연 뒤 모든 것들을 방 한가운데에 털었다.


녹아서 진득해진 사탕과 변색해 버린 낡은 공책, 3천 원...


일기장을 펼쳐 들고 크게 호흡을 했다. 이상하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는데 멀쩡하다. 감정이 식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젠 제멋대로 움직이는 감정을 제법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은주와 함께 써 내려갔던 공책은 아직 뒤로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은주가 쓸 오른쪽 부분은 남겨두고 왼쪽 편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은주는 없지만 여전히 은주와 함께 쓰는 교환일기이다.


역시 산책을 길게 한 날은 단잠을 잔다. 푹 자고 일어나니 피부도 뽀얘진 것 같아 거울을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


“영애야 안녕. 주말 잘 보냈어?”


“응.”


"현서랑 매점 갈 건데 같이 가자."


그 말에 수빈의 옆에 서 있던 현서의 얼굴이 굳으며 나를 흘겨본다. 불편해진 나는 고개를 저었지만 수빈은 포기하지 않았다.


“같이 가자 내가 사줄게.”


“야 지수빈 시간 없어 빨리 가자.”


현서가 수빈이의 어깨를 흔들며 짜증 난다는 듯 나를 흘겨보았다. 눈치 있게 빠지라는 뜻인 줄 나도 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내 손을 잡더니 수빈이는 뛰기 시작한다. 우리 셋은 함께 뛰어서 매점으로 향했다. 수빈이가 나를 잡아주지 않았다면 나는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갔을 것이다. 은주가 나를 알아봐 주고 존재를 인정해 주었던 것처럼 수빈이는 내 손을 잡아서 이끌어 주었다.


머뭇거리지 말고 이 세계로 들어오라고.


"야 왜 뛰어가냐?"


"미안미안. 곧 점심시간 끝나가잖아. 다 같이 먹고 싶어서."


"언제부터 친했다고 저래?"


수빈은 여러 간식을 잔뜩 사서 매점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과자, 젤리, 생라면까지 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아이들은 허겁지겁 간식을 먹으며 농담까지 나눴다. 언젠가는 나도 이 모든 게 자연스러워지겠지.


그 후부터 우리는 매점을 같이 다니게 되었고 어찌하다 보니 등하교도 같이 하게 되었다. 전현서는 내가 끼는 것을 대놓고 싫어했기에 나는 오히려 오기가 생겨서 꼬박꼬박 같이 다니게 되었다. 현서가 비겁하게 내 약점을 건드리며 자극하면 나는 수빈이에게 아무 말이나 던지며 함께 웃었다. 그때마다 입을 다물고 나를 흘겨보았지만 나는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니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저씨가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영애야, 내일 낚시 가려고 했는데 같이 갈래? 재미있을 거야. 바다도 보고."


갑자기 낚시라니.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은 아저씨가 조금 어색했다.

아저씨는 항상 일이 바빠서 얼굴을 보기 힘들었지만 조금이라도 쉴 틈이 생기면 내게 새로운 경험을 해주고 친해지려고 애썼다.


저녁에 방 밖에서 들려오는 아줌마와 아저씨의 목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낮게 웅웅 울리는 목소리와 작은 목소리가 반복되었는데 그 누구보다도 다정한 말투였다. 그 다정한 소리를 자장가 삼아 포근하게 잠이 들었다. 내가 잠이 들 때까지 웃음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내가 간밤에 꿈도 꾸지 않는 채 한 번도 깨지 않고 푹 잤다는 사실을 알았다. 개운하고 맑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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