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생에 물고기였는지도 모른다.
" 영애야, 오늘 할 거 없으면 같이 놀러 갈래? "
아줌마는 곤히 잠든 나를 깨우며 물었다. 몽롱한 안갯속에서 깨어나듯 눈을 떴다. 간밤에 잠을 설쳤는데 아무래도 늦잠은 틀려먹은 것 같다. 아줌마의 들뜬 얼굴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아줌마는 나와 더욱 친해지길 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줌마의 기준에는 어쩌면 아닐지도 몰랐다.
" 어데로요? "
" 시내에 나가서 조금 놀다 오자. 할 것도 없는데. "
아줌마가 싱긋 웃어 보였다. 아줌마의 들뜬 얼굴에 나는 침대에서 튕기듯 일어나 옷을 꺼내 입었다. 교복을 입으려고 했는데 아줌마가 시장에서 사 왔다며 꽤나 고급진 옷을 내밀었다. 아줌마의 옷은 늘 후줄근한데 왜 내 옷은 이렇게 고급스러운지 모르겠다. 지하철을 타고 한참을 갔다.
속이 울렁거릴 때쯤 아줌마는 한껏 경쾌한 목소리로 내리자고 했다. 나는 실내보다 뻥 뚫린 야외가 훨씬 좋다. 오감을 느낄 수 있고 새파란 하늘을 볼 수 있는 살아있는 느낌이 좋다. 혼자 자주 갔던 방파제 너머의 바다가 아닌 끝없는 모래사장과 푸른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 어떠니, 그래도 가까운 해변이란다. "
" 멋집네다.“
" 찾아온 보람이 있어. 정말 아름답지 않니? 나는 생각이 많을 때는 바다를 본단다. "
해변이라니. 게다가 푸른 바다. 어젯밤의 그 복잡하고도 기묘한 기분은 푸른 바다 하나만으로 도 잊히기 충분했다. 바다를 보자마자 나는 이미 저 넓은 수면 위를 거닐고 있었다. 새파란 물결은 황홀감이 들 정도로 아름답다. 내가 바다를 좋아한다는 것을 이젠 잊지 않아야겠다.
" 여름이 되면 수영도 할 수 있단다. 아줌마는 나이가 많아져서 못하겠지만 물놀이 정도는 재미있겠다. "
" 들어가 봐도 되갔지요? "
" 그럼, 바지가 젖지 않게 놀아라. "
아줌마의 말에 바지를 걷고 얕은 물속을 걸었다. 사르륵사르륵 소리와 함께 부드럽고 촉촉한 모래알이 발가락 사이사이를 간지럽힐 때마다 얼굴에서 웃음이 삐져나왔다. 모래알들을 손으로도 잡아보고 햇볕에 반짝이는 찬란한 빛도 바라보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상쾌한 바다냄새가 깊숙이 들어와 가슴을 맑게 만들어주었다. 나는 전생에 물고기였는지도 모른다. 바다를 보자마자 내 마음은 이미 저 넓은 수면 아래를 헤엄치고 있었다. 자유롭게.
모래사장과 아름다운 파도. 이것만으로도 충분한데 해변의 건너편에 있는 커피가게나 음식점들도 하나같이 멋지게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메말라 있던 감정에 작은 물줄기가 생기듯 나는 촉촉해진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줌마는 다음에 갈 곳이 정해져 있다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내 손을 잡고 이끌었다.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곳에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는다.
" 여기는 백화점이야. "
" 평양에만 있던 곳이었습네다. "
" 그랬구나. "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가득 찬 사람에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는다.. 아줌마는 고급스러운 식당에서 스파게티와 피자를 시켜주었다. 꿈꾸었지만 감히 바라지는 않았던 행복을 아줌마는 쏟아부어주고 있다. 아줌마가 주는 사랑이 넘쳐서 쏟아질까 두려워 나는 온 마음을 다해 담고 또 담았다.
" 옷이나 갖고 싶은 거 살래? 골라보렴"
아줌마는 옷을 들고 이리저리 살피다 가격표를 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 여기 옷은 마음에 들지 않습네다. 제 스타일이 아니라요.”
이런 남조선 말은 처음 써보았는데 아줌마가 깔깔 웃는다. 정말로 난 괜찮아서 웃어 보였다. 나에겐 비싼 옷보다는 그저 지금 이 순간이 좋았다.
우리는 여러 가지 쇼핑몰을 구경하고 살구색 립틴트와 아줌마의 권유로 문제집 한 권을 샀다. 영화관 앞 홍보 전광판 앞에서 코미디 영화 예고편을 보고 웃다가 오락실에서 게임을 했다. 턱이 얼얼할 정도로 많이 웃었다.
땅거미가 노랗게 질 무렵, 우리는 한결 편안해지고 웃음기가 섞인 얼굴로 지하철에 올라탔다. 아줌마와 아저씨가 건네주는 하루하루는 너무 소중해서 혹여 잠이 들면 깨어버리는 꿈일까 겁이 난다. 그래서 나는 노곤함이 밀려오는 지하철에서 아줌마가 꾸벅꾸벅 졸 때도 눈을 부릅뜨고 버텼다.
아줌마는 피곤한지 집에 들어가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누웠다. 피곤할 법도 했다. 오늘 내가 즐거운 만큼 아줌마는 배로 힘들었을 테니. 아줌마가 눈을 붙일 줄 알았는데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아마 아줌마는 또 그냥 누워있긴 시간이 아깝다며 두꺼운 책을 꺼내 들고 몸은 편한 대신 정신은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몸이 힘들게 움직일 때면 오히려 아무 생각이 안 나서 정신은 쉬고 있는 거라고 아줌마는 말했었다. 정신이 충분히 쉬었으니 이제 반대로 행하고 있는 것이다. 참 아줌마는 못 말린다.
" 기런데요, 그 상처는 어카다 생긴 거입네까? "
아줌마의 목뒤로 거대한 상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꽤나 오래되어 보이는 머리카락으로 늘 가리고 있던 그 상처는 아직까지 보기 흉했다. 아마 제때 치료를 못 받은 것 같다. 아줌마는 내 말에 헝클어진 머리를 황급히 쓸어내리더니 얕게 웃었다.
" 아무것도 아니란다. 전에 한번 넘어졌거든. "
아줌마의 그 하얀 웃음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줌마의 웃음은 늘 정직했는데.
" 요즘 학교생활은 어때? "
살짝 웃으며 말을 돌리는 아줌마가 민망할까 싶어 나는 과장하며 천진하게 웃어주었다.
" 힘든 거이 하나 없습네다."
" 친구는 사귀었어? "
" 네. 아줌마는 반찬가게에서 일할 때 안 힘듭네까? "
" 힘들지. 안 힘든 게 어딨니? "
모두 힘들고 버겁다면 아줌마도 내가 느끼는 것처럼 힘들까. 어쩌면 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힘겨움을 품고 꿋꿋이 살아가는 중일지도 몰랐다.
" 모든 일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면 너만 힘들어져. "
" 길티만 어떻게 다 무시하고 산다요.. 나도 감정이란 게 있는데. "
" 나쁜 감정도 차분하게 표현하면 멋있는 아이가 될 수 있어."
" 힘든 일이 있으면 반대로 좋아하는 일은 하면 되지 않을까?“
좋아하는 일이라. 내가 가장 좋아하고 모든 아픔을 이겨낼 수 있는 일. 나는 아줌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깊고 어두운 경계심과 모든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까.
" 힘든 일이라고 생각할수록 더 힘들어질 거야. "
아줌마는 살짝 웃어주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시계는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누군가와 함께 같이 있어본 적은 처음이라 나도 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
점차 나는 아이들의 관심에서 잊히고 평범한 아이로 인식되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아이들은 나에게 친근히 말을 걸고 웃었다. 나를 피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친근히 말을 걸어주니 나는 더 좋은 내가 되고 싶어졌다. 하여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런 괴롭힘은 간혹 나를 창피하게 만들었지만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내 마음을 쓰는 것을 멈추기로 했다.
내가 북에서 온 것은 어차피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