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하루
담임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영애야, 선생님이 면목이 없구나.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는데, 잘 지내는 줄만 알고 있었구나. 미안하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니?”
선생님은 정말 어쩔 줄 몰라하시며 나의 안색을 살피셨다. 아마도 아저씨가 학교로 찾아오신 게 분명하다. 불같은 성격의 아저씨는 다시 어제 일이 떠오르면서 화가 나셨을 거다.
선생님은 내가 온 뒤로 단 한 번도 나에게 학교생활에 대해 물은 적이 없다. 내가 누구와 지내고 있는지, 말투와 생활이 달라져서 매 순간 당황스러운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쏟아지는 소문에 깔려서 허우적댈 때도 선생님은 분명 모른 척했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을 원망한 적이 없었다. 선생님도 바쁘시니까 모르는 거라고 생각했고 굳이 선생님을 힘들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혼자 이겨내려 노력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잘 지내고 있는 줄만 알았구나 라니.. 선생님은 내가 어떻게 지내는 줄 모르셨다. 묻지도 않으셨을뿐더러, 점심시간에 외톨이처럼 혼자 떨어져 밥을 먹는 나와 몇 번이나 눈이 마주쳤었다.
나는 그때마다 선생님이 내 옆에 오지 않을까, 아니면 동무들에게 같이 먹으라는 말을 해주지 않을까, 웃어주지 않는 까,라는 작은 기대를 했었지만 선생님은 이내 고개를 돌리셨다. 나는 그때 선생님을 이해했었다. 선생님이 가지고 있는 탈북민에 대한 경계심을 이해하려 했다. 그래서 선생님께 미안함이 들었었다.
나로 인해 우리 반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사물함이 엉망이 되어 있거나. 의자가 사라지는 정도의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물함은 다시 정리를 하면 되었고 복도에 내팽개쳐져 있는 의자는 찾아오면 그만이었다. 숙덕거림도 비웃음도 따돌림도 내 몫인 듯 감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선생님의 지금 저 태도는 그동안의 나의 믿음을 뒤엎는 것이었다. 만약 아저씨 아줌마가 학교에 찾아오지 않았다면, 나에게 보호자가 없었다면 선생님은 이 상황을 어떻게 대응했을까?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여전히 나를 모른 척하였을까?
세련된 옷차림으로 종종 학교에 왔던 혜진이엄마와 선생님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혜진이는 우리 반 부반장이지만 선생님은 반장인 수빈이보다 혜진이를 더 자주 부르시곤 했다. 혜진이는 학교에서 열리는 대회에서 반대표를 자주 맡았고 첼로 수업이 있다는 이유로 청소시간에 늘 먼저 하교를 했다. 수업시간에 다른 아이들이 똑같은 대답을 해도 선생님은 어찌 된 영문인지 혜진이를 칭찬하였고 반동무들은 그것에 크게 개의치 않아 했다.
칭찬받고 싶었겠지만 칭찬해 달라 소리 낼 수는 없으니, 늘 그렇게 혜진이가 중심이 되는 수업으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다양한 의견과 비판을 수용할 줄 모르는 선생님은 알까? 그렇게 아이들의 기대와 생각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사상교육의 단면이라는 것을.
혜진이는 칭찬을 먹고사는 한송이의 예쁜 꽃 같았다. 그러다가 실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가는 혜진이를 선생님과 혜진이 엄마가 잡아주려고 뛰어오는 상상을 해본다.
아저씨는 선생님의 말을 가만히 들으시고 강단 있게 힘을 주어 말씀하셨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발생하면 더 이상 참지 않겠습니다. 그때는 이번 일까지 함께 학폭위원회를 열겠습니다. 학교에서 그 아이들을 제대로 훈육하고 가르쳐주십시오.”
아저씨가 말하는 동안 아줌마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긴장감에 차가워져 있던 내 손이 따뜻해질 때까지 잡아주었다. 덕분에 나는 당당하고 차분하게 표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선생님의 저런 표정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늘 나를 볼 때 심드렁했던 그 표정이 온데간데 없어졌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아저씨와 아줌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어깨를 안아주고 눈짓으로 응원을 보내며 학교를 떠나셨다. 교무실을 나가 긴 복도를 선생님과 길을 때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슬쩍 본 선생님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나의 히어로들이 집으로 돌아갔지만 그들이 주고 간 에너지가 충전되어 있는 나는 뭐든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든다.
언제든 내 편이 되어줄 버팀목이 있다는 건 이런 마음이었구나. 부모가 있는 아이들은 늘 단단한 보호막에 쌓여있는 기분이었겠다 생각하니 처음으로 그들이 부러워지만 이젠 나에게도 나의 히어로가 있다.
교실에 들어서는 내 발걸음은 가볍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았다. 수업시간에 떠드는 아이들은 없었고 쉬는 시간이 되자 전현서와 우시은, 이서영이 다가와서 미안하다며 쭈뼛쭈뼛 사과를 건넸다. 그 아이들이 완전히 달라질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은 나아질 거라 믿으며 나는 사과를 받아주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교무실로 향했다.
“올 줄 알았다.”
체육선생님은 환하게 웃으며 대회방식을 알려주었다. 우리 학교에서 먼저 최종 3명을 뽑은 뒤 대회장으로 갈 거라고 했다. 배에 힘을 주며 힘 있는 목소리로 열심히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웅얼거리는 습관을 고치는 것부터가 나의 시작이다.
말에는 힘이 있어서 그대로 이루어지려면 또박또박 크게 내뱉어야 한다고 낚시를 하면서 아저씨가 해준 조언이다. 집에 와서 일기장을 펼쳤다. 일기장에는 처음 수빈의 친절에 대한 의심하는 마음들, 그리고 이곳 생활의 힘든 점, 반 아이들에게 서운한 점이 모두 적혀있었다. 뜯어버리려고 하다가 그만두었다. 불편하지만 내가 외딴섬에서 적응하기 위한 지난하고 소중한 과정이었다.
연필을 잡고 오늘을 기록했다. 영원히 잊지 못할 하루가 될 것이다.
사랑하는 은주에게
안녕? 은주야 거긴 어때? 새하얀 하늘과 몽실몽실한 구름은 가까이서 보아도 아름답니?
내가 매일밤 울며 너에게 보냈던 마음들은 혹시 알고 있니?
은주야 북에서 지낼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나 너와 함께 있었어.
겁 많고 이기적인 나는 이곳에 적응해서 나름 잘 지내고 있어.
너는 나에게 늘 차분하고 용감하며 지혜롭다고 말해줬지.
사랑하는 은주야 너의 말처럼 나는 더 나은 내가 되어가고 있어.
네가 없는 곳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줄만 알았는데
너만큼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말로 다 못할 만큼 큰 사랑과 위로를 받고 있어.
그리고 나 가슴 뛰고 좋아하는 꿈이 생겼어. 허허벌판에서 우리가 같이 했던 달리기.
달리기 대회에 나가게 되었어. 조금 떨리긴 하지만 기뻐.
좋아하는 걸 찾은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알게 되었어.
은주야 나 여기 사람들을 많이 사랑하게 되었어.
절대 마음을 주지 않고 받지도 못할 거라 생각했는 데 말이야.
이런 나를 이해해 준다면
있잖아 은주야. 나를 한 번만 용서해 줄래?
또 편지할게. 잘 있어 은주야.
너의 영원한 단짝 동무 류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