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 포토에세이 #34 _ Bern, Switzerland
25 국가 107일의 여행 기록:
스위스의 마을들은 꼭 동화 속에서 볼 법한 마을들 같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여유로움을 간직한 채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 평화로움을 눈여겨보았다. 빌딩 숲 사이 하루하루 정신없이 살아가는 '내가 사는 세상'과 '그들이 사는 세상'이 다름에 이질감을 많이 느꼈고, 묘한 동경심 또한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이런 곳에서 살아가는 것이 조금 심심해 보이기도 했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마음 맞는 사람 몇 명만 있다면 이렇게 조용하고 여유로운 곳이야말로 내가 추구하는 삶을 이룰 수 있는 천국 같은 곳이었다.
과거 미국에서 살 때의 향수를 떠올리게끔 자극받았다. 미국 학부유학 당시, 미국 동남부의 넓은 대자연 속 여유를 느끼며 사는 것에 대한 행복을 많이 누렸다. 드넓은 한적한 공원에서 피크닉을 즐기고, 큰 강아지와 뛰어놀며, 친한 지인들과 하우스파티를 즐기고, 주말에는 2시간 정도 운전해 바다나 산에 가서 힐링했던 삶. 이러한 삶과 마음의 '여유'들이 나에게 행복을 준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하였다.
늘 하는 생각이지만, 지금처럼 젊을 때는 '뉴욕, 런던, 파리, 도쿄, 홍콩, 서울' 같이 세상을 돌리는 중심에서 치열하게 살며, 훌륭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다양한 경험과 도전에 부딪혀 성장하고 싶다. 그러나, 나이가 점점 들어 이런 성장의 행복보다 여유의 행복이 더욱 그리워질 때, 조금은 한적한 곳으로 나만의 집을 짓고, 소소한 일거리를 통해 생활을 유지하며, 사랑하는 이들에게 베풂으로 행복을 함께 나누고, 취미 활동을 즐기며 내 취향이 깊게 스며든 삶을 조용히 향유하며 살아가고 싶다.
많은 이들에게 스위스의 수도가 어디인지 질문했을 때, 사람들은 '취리히'나 '제네바' 같은 유명 도시들을 종종 언급하곤 한다. 하지만 스위스의 수도는 '베른'이다. 캐나다의 '오타와', 호주의 '캔버라'처럼 '베른'은 한국사람들에게 꽤 생소한 도시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베른 근교에는 대규모 국제공항이 부재할뿐더러, 스위스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베른을 여행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드물다. 하지만, 베른은 꼭 한 번쯤 방문할 가치가 충분한 매우 아름다운 도시이다.
보통 한 국가의 수도를 떠올릴 때, '서울, 도쿄, 베이징'과 같은 메가시티를 생각한다. 엄청난 인구, 복잡한 교통, 번잡한 거리의 소음과 이런 단점들을 상쇄하는 편리한 인프라들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유럽국가의 수도 중 다수는 이런 느낌과 결이 다른 경우가 많았다. 수도라는 것이 무색할 만큼 그 규모가 작거나 여유롭고 한적한 도시들이 많았다.
베른 또한 보통의 메가시티들과는 다르게 규모가 매우 작다. 서울과 비교했을 때 도시 면적은 약 8%, 인구는 약 4.5% 정도밖에 안 되는 상대적으로 아주 작은 도시다. 실제로 베른을 방문했을 때, 고층빌딩을 전혀 볼 수 없었으며, 심지어 낮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없는 골목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런 한적함과 여유가 베른의 가장 큰 매력이며, 개인적으로 스위스에서 가장 좋아하는 도시 하나를 꼽을 때 늘 고민 없이 베른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베른에서 가장 상업적 번화가는 '올드타운'이다. 베른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시계탑 거리를 중심으로 각종 공예품, 인테리어, 패션 등 각종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즐비해있으며, 관광객으로써 몇 발자국마다 걸음을 멈추게 하는 매력이 서려있는 곳이었다. 베른을 방문한다면 꼭 올드타운에서 길 잃는 것을 추천한다. 약 두 시간 정도 헤매다 보면 진정한 베른의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베른이 좋았던 가장 큰 이유는 도시를 둘러 말발굽 모양으로 흐르는 '아레(Aare) 강'이었다. 스위스를 흐르는 가장 긴 강이며, 오묘한 에메랄드 빛깔을 내어 도시의 분위기를 한껏 아름답게 만들어주었다. 특히, 해가 질 때 노을빛을 머금은 베른의 경관은 마치 몽환적인 동화 속 풍경이 되어 그 누구라도 사랑에 빠질 것만 같은 곳이었다.
사랑의 감정은 묘하다. 인간이 태어나 겪는 감정 중 가장 복잡하고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일 것이다. 인류 역사상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시와 노래로 사랑을 표현했고, 그들의 문장에서 행복과 아픔의 흔적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많은 낭만적인 이야기들 속 사랑의 모양과 형태는 너무나도 다양하다. 도대체 사랑은 뭘까.
'사랑' 분야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고 회자되는 고전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다. 사랑과 연애, 결혼에 관심 있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거나 읽어봤을 책이며, 저자가 연구하고 고뇌한 '사랑에 대한 정의' 그리고 '어떻게 현명하게 사랑을 실현할 수 있을지' 서술한 책이다. 과거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당시 해당 책을 처음 접하였고, 나는 그가 정의하는 '사랑'에 있어 깊은 감명을 받아 주요 내용을 밑줄 그으며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인생에서 사랑에 늘 진심이었던 만큼, 사랑에 대한 개념을 재정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었다.
먼저 사람들이 많이 생각하는 '사랑'이란 아마도 강렬하고 설레는 감정이 제일 먼저 떠오를 것이다. 매력적인 상대방을 보았을 때,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리며 도파민이 마구 분비되는 신체적 증상을 겪었을 것이다. 또한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몸이 긴장되고 얼어버리는 경험도 해보았을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호기심이 관심으로 변하고, 관심이 호감으로 발전하며, 그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부여를 하기도 하고, 감정적 격렬한 자극을 느끼며 점차 하루를 상대방으로 채워나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적 사랑은 진정한 사랑을 이루는데 첫 단추를 끼우는 역할을 할 수 있을지언정, 온전한 사랑의 모습이라 보기는 어렵다. 에리히 프롬에 의하면 사랑은 뜨거운 감정적 영역보다는 이성적 결단에 더욱 가깝다고 주장한다. '서로 미쳐버리는 불타는 사랑'은 그저 상대방을 만나기 전까지 얼마나 외로웠는지 보여주는 증거이며, '우상적 사랑' '감상적 사랑'은 '사이비 사랑'이라고 서술한다. 그에게 사랑은 "한 순간에 피었다가 지고 마는 감정이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과 훈련이 필요한 기술이자, 결단이며, 의지이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사랑을 줄 수 있는 능력은 사랑할 줄 아는 것이다. 사랑을 많이 가졌어도 많이 주지 못한다면 가난한 것과 다름없다. 사랑하는 '대상'보다 사랑을 줄 수 있는 '능력'이 더욱 중요하다. 또한 진정으로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제대로 사랑을 받을 줄 안다. 그러려면 상대방을 사랑하기 이전에 나를 먼저 온전히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진심 어린 마음으로 가진 사랑을 나누어주고, 상대방의 사랑을 감사히 받을 수 있다. 이는 이기적이거나 나의 부족함을 상대방으로 채우려는 마음과는 다르다. 나만큼 상대방도 너무 소중한 존재이기에 진심으로 상대방의 모습 그대로를 존중하고 아껴주며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보증 없이 자기 자신을 맡기고,
우리의 사랑이 상대방의 사랑을 불러일으키리라는
희망에 완전히 몸을 맡기는 것을 뜻 한다
내가 살아오며 경험하고 느껴왔던 '사랑'에 대한 정의도 에리히 프롬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받는 사랑에 대한 행복감도 잘 알고 있지만, 사랑을 표현하고 주는 것에 대한 행복감 또한 잘 알고 있다. 진정으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공감할 줄 알 때에 그 관계가 계속해서 유지될 수 있고, 오랜 시간이 지나 뜨거운 감정은 사라졌어도 안정적인 편안한 감정이 성숙한 사랑의 한 모습이라 생각한다. 또한 상대방을 바꾸려 하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며, 늘 이성적 영역까지 상대방을 사랑하여 내가 정의하는 이상적인 사랑을 실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가끔 친한 동생들이 연애 관련 상담이나 조언을 구해올 때에 나는 20대 초중반에 사람을 많이 만나보고, 괜찮은 한 사람이 있다면 깊게도 만나보라고 얘기한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때 관계에 있어 어떤 연애가 즐거운지,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행복한지, 비슷한 상황 속 상대방들의 행동은 또 어떻게 달랐는지, 경험들을 통해 나와 맞는 사람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다. 또한, 한 사람과 깊은 관계를 가질 경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나의 감정, 관계의 변화 등을 겪으며 사랑을 대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 훨씬 더 많이 깨닫게 된다.
나도 몇 번의 진지한 만남들을 통해 깨닫게 된 내가 추구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이 있다.
안정감이 든다는 것은 상대방을 신뢰하고, 결이 잘 맞다는 증거다. 서로의 행동이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 움직일 때 우리는 상대방에게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상대방을 믿고 의지할 수 있으며, 반대로 상대방이 힘들 때 내가 힘이 되어 관계를 이끌어나갈 자신감이 있으면 진정한 신뢰로 이어진다. 내가 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은 신뢰이며, 나도 늘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신뢰'는 짧은 한 순간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뢰를 쌓기 위해 오랜 시간 상대방과 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상대방과의 결이다. 결이 비슷하다는 것은 상대방과의 가치관이 비슷하고, 대화가 잘 되며, 그 끝에는 깊은 정서적 친밀감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항상 깊은 대화를 통해 상대방에게 스며들었고 깊게 빠지게 되었다. 서로 다른 두 세계관이 만나 조화를 이루고 그 영역이 넓어질 때에 상대방으로부터 배우고 존경하며 사랑할 수 있었다.
육체는 언젠가 쇠하고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은 사랑을 이어나갈 수 있는 방법은 상대방과의 즐거운 대화로 플라토닉의 영역을 채우는 것이다. 각박한 세상을 함께 헤쳐나가는 전우로써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신뢰할 수 있는 가장 특별한 사람이 되어주면, 그 내적인 모습에 늘 아름다워 보이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상대방의 외모, 학력, 능력, 재력, 집안 등 다양한 조건들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워진다. 그러나 재력은 인생의 각종 사건들을 겪으며 있다가도 없어질 수 있고, 외모의 경우 또 다른 매력의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세상에 즐비하다. 즉, 어느 순간 조건의 의미가 바래질 수 있다. 조건을 전혀 안 본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가능한 '사람 대 사람' 내면으로 다가가고 싶다. 상대방으로부터 취할 게 있어서 계산하는 것이 아닌, 상대방을 사랑하기로 결단하고 상대방 내면 그대로의 모습을 온전히 받아들였기에, 어떠한 조건 없이 사랑하는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
가장 이상적인 사랑의 형태는 '부모님의 사랑'일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이든, 어떠한 행동을 했든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고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부모님이다. 이런 사랑 형태에 최대한 가까워질 때, 상대방이 가진 단점을 포용할 수 있고, 상대방의 슬픔과 힘듦까지 망설이지 않고 사랑할 수 있다. 그렇기에 서로에게 더욱 솔직해지며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깊은 형태의 사랑에 도달할 수 있다.
종종 어떤 사람들은 이기심에 상대방을 '소유'하려 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대방을 재단하려 한다. 그러나 상대방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진정으로 가장 행복하기를 끊임없이 바라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조건 없는 사랑'의 가치이다. 상대방과의 대화가 즐겁고, 눈빛만 봐도 통하며, 둘만 아는 추억과 비밀들이 많이 쌓여감에 따라 서로가 더욱 특별해지는 것. 유일하게 따지는 조건은 이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한 사람을 지속해서 오래 만날 경우, 상대방에게 점점 익숙해지고 많았던 호기심이 채워지며 편해짐에 따라 행동과 마음이 변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흥미를 잃고 권태감을 느껴 변한 모습으로 상대에게 상처를 주거나 새로운 사람을 찾아 떠난다. 그러나 반대로 또 다른 이는 언젠가 설렘이라는 감정이 저문다는 것을 알고 그걸 덤덤히 받아들이며,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이 시작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사람이 변함없이 한결같기는 쉽지 않다. 주변의 다양한 상황들에 영향을 받아 바뀌기도 하며,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망각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이때 상대방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한결같은 모습으로 계속 그 자리를 지키는 상대방에게 깊은 감사함을 느끼고,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서로에게 더욱 조심하려 노력할 때에 어떤 시련이 와도 서로가 변함없이 관계를 지킬 수 있는 성숙한 사랑이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사랑의 모양과 형태는 함께하는 시간이 흐를수록 각 시기에 맞게 자연스럽게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상대방을 향한 마음 크기는 더 커지면 커졌지 작아지지 않도록 책임감이 필요하다. 상대방에게 관심을 기울여 챙겨주고 행복하기를 보살필 때, 그 진심이 전해져 또 다른 새로운 형태의 사랑이 계속 나타날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한참 흘러 뒤돌아봤을 때, 함께 빚어낸 자신들만의 완성된 사랑의 모양을 직시할 수 있을 것이고, 그때야 비로소 둘만의 사랑에 대해 논의하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행복노트 #31
사랑은 정말 사소한 것에서 드러난다.
사랑하는 꽃이기에 더욱 특별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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