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 포토에세이 #49 _ Florence, Italy
25 국가 107일의 여행 기록:
유럽을 여행하며 개인적으로 느꼈던 한 가지가 있다. 가끔 유럽의 현지인들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우연히 눈을 마주치더라도 보통 시선을 돌리기 마련이다. 상대방이 나의 시선에 부담스럽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며, 반대로 나 또한 뻘쭘하고 불편한 감정을 느끼기 싫기에 타인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건 실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다르게 유럽여행하는 내내 왠지 모를 시선을 나는 자주 느꼈었다.
인종차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동양인인 내가 낯설거나 신기하게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혹은, 눈이 마주치더라도 잘 피하지 않는 게 그들의 문화일 수도 있다. 물론, 모든 유럽사람이 타인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건 아니겠지만, 그런 시선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여행하는 동안 종종 불편함을 느끼곤 했다. 괜히 쓸데없이 '지금 내 행색이 별론가' 혹은 '내가 뭘 잘못했나' 등과 같은 온갖 잡다한 생각들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그들은 별 이유가 없었을 확률이 높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지나치는 순간 잊어버릴 테니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사실은 그들의 작은 시선에 눈치를 봤던 것이 그들의 잘못이 아닌 당시의 내 마음 상태가 건강하지 못했다는 걸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피렌체를 여행하는 동안 주변 환경에 의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다. 한 달 넘는 배낭여행을 혼자서 계속하다 보니 체력적으로 지친 것도 있었고, 특히나 피렌체와 같은 대도시, 관광도시를 여행할 때의 많은 인파들에 염증을 느낀 것이다. 그렇게 내 마음은 부정적인 생각에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했고, 여행하는 즐거움보다 불평, 불만을 더욱 느끼고 있는 상태였다. 미리 짜인 계획에 따라 관광지를 방문하고, 사진 찍으며, 그곳을 진정으로 즐기고 여행하는 것이 아닌, 그저 나에게 주어진 일과들을 소화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이런 여행 매너리즘 혹은 권태기를 타개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낯설고 새로운 곳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며 나를 찾는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여행을 시작했지, 예민한 상태로 나보다 타인을 더욱 신경 쓰며 부정적인 감정을 채워가는 여행을 원한 게 아니었다. 장기간 여행하며 마주하는 힘든 자극들을 잘 해소하지 못해 신경이 곤두 서 있었다. 이런 내 상태를 스스로 눈치채고 일단 무작정 피렌체 중심가에서 벗어나 한적한 곳을 찾아 발길 닿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나를 지키고, 내가 사랑하는 유럽여행을 지키기 위해.
피렌체의 도시 이름은 '꽃'에서 유래했다. '피렌체' 이름의 기원을 찾아보면 여러 가지의 이야기들을 찾을 수 있지만, 유력한 이야기는 로마의 병사들에 의해 지어진 것이다. 먼 과거 로마 군대가 아르노강 유역에 주둔하기 시작하며 도시의 형태가 갖춰지기 시작했고, 이 인근 지역 들판에 핀 꽃들이 특히나 너무 아름다워 이곳 이름을 '플로렌티아' 즉, '꽃의 도시'라 명명했다. 피렌체의 영문명인 '플로렌스'도 여기서 유래했다.
처음 '플로렌스'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나는 신기하게도 꽃을 제일 먼저 연상했었다. 아무래도 꽃의 영단어 '플라워'와 발음이 비슷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플라워' 단어 자체도 라틴어에서 기원했기에 어떻게 보면 꽃이 연상되는 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도시의 기원 자체가 꽃과 연결되어 그런지, 피렌체 도시 곳곳에는 꽃과 연관된 상징, 이름을 거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피렌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자 피렌체의 대표 랜드마크인 대성당의 공식 명칭도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꽃의 성모 마리아 성당이라는 뜻이다. 꽃을 사랑하는 도시이자, 스스로 꽃의 상징이 된 도시 '피렌체'는 그의 풍경조차도 꽃이 연상될 만큼 매우 아름다운 도시다.
나는 생택쥐페리의 '어린왕자' 문학 작품을 매우 사랑한다. 생택쥐페리는 '어린왕자' 속에서 그가 사랑했던 여인을 '꽃'으로 표현했고, 그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나도 꽃을 떠올릴 때면 종종 '여성'을 꽃에 투영하곤 한다. 특히 꽃처럼 아름다운 피렌체의 풍경을 배경으로 우연히 이상형인 사람을 마주치게 된다면, 단번에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 피렌체는 '사랑'과도 연이 깊은 도시다.
단테는 중세시대 명저인 '신곡'을 쓴 피렌체의 위대한 작가다. 그의 인생작인 '신곡'은 인간의 죄악과 회개에 대해 서술하며, 사람들에게 신의 사랑과 진정한 구원을 일깨워줌과 동시에 부패했던 당시 가톨릭을 비판하여 훗날 종교개혁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던 문학 작품이다. 이런 역사적인 작품 '신곡'을 집필하게 된 배경 안에는 그가 너무나도 사랑했던 여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단테는 어린 시절 귀족 파티에 참가했다가 '베아트리체'라는 또래 여성을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 하지만 그때 그 단 한 번의 만남을 통해 깊은 사랑의 감정을 느꼈던 단테는 그 이후로 평생 동안 베아트리체만을 짝사랑하며 살아가게 된다. 황홀했던 순간의 만남 이후 9년이 지나 단테가 18살이 되었을 무렵 베키오 다리 위에서 우연히 베아트리체를 또 한 번 만나게 된다. 그때부터 단테는 또 사랑에 앓았지만, 베아트리체는 다른 이와 결혼하였고, 24살의 어린 나이에 일찍 세상을 뜨게 된다. 이에 크게 상심했던 단테는 그의 철학을 집대성한 신곡을 집필하기 시작했으며, 신곡 안에서 베아트리체와의 못다 한 사랑의 꿈을 이루게 된다.
피렌체에는 또 다른 유명한 사랑 이야기가 있다. 바로 문학 작품이자 영화인 '냉정과 열정사이'다. 이 작품의 배경이 피렌체를 중심으로 흘러가며, 두 주인공 남녀 사이의 계속되는 이별과 재회 그리고 애타는 그리움을 잘 표현한 작품이다. 오해와 현실적인 상황 속 두 주인공은 냉정과 열정 사이를 계속 왔다 갔다 하지만, 그 끝에는 결국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확인하며 좋은 결말을 맞이한다.
이런 단테의 사랑 이야기와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를 참고했을 때, 마치 꼭 운명적 사랑은 현실에 존재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상대를 그토록 사랑하는 마음과 이별했을 때의 상실감, 그리고 그 이후로도 계속 그리워하는 마음 등 사랑과 관련된 다양한 깊은 감정들은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가장 원초적 감정이자 심오한 감정이며, 고귀한 감정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곧 행복의 시작이자 아픔의 시작이다. 하지만 깊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랑을 하는 이유는 그저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최근 지인들과 함께 저녁 술자리를 가지며 나눴던 대화 주제가 있었다. 과연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별을 고할 수 있냐는 질문이었다. 한 지인은 자신의 마음이 남아있는 한 절대로 안 놓아줄 것이라 했고, 농담이지만 구차하고 찌질하더라도 경찰과 엮이기 전까지는 붙잡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 했다. 하지만 나는 너무나도 상대방을 사랑하지만 그녀를 위해 충분히 떠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줄 수 있는 행복보다 상대방에게 더 큰 잠재적 행복이 있음을 인식한 경우 때문이다.
'떠난다'는 것은 더 이상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기존 정적인 상태에서 동적인 상태로 전환한다는 뜻이며 또 다르게 해석하면 안정적인 상태를 벗어나 새로운 다른 것들을 맞이한다는 느낌이 연상되기도 한다. 안정된 상태를 본능적으로 선호하는 인간의 습성상, 훨씬 더 큰 보상이 따라오지 않는 한 위험을 감수하고도 불안정한 상태로 스스로 들어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내적으로 혹은 외적으로 '떠남'에 대한 자극을 충분히 받았기에 사람들은 '떠나는 것'을 선택한다.
떠나는 이유는 다양하다. 외적인 요소로는 새로운 것에 대한 막연한 선망, 새로운 곳에서의 어떤 희망, 혹은 분명한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 등이 있다. 경험하지 못한 어떤 미지의 영역에 '기대'가 있을 때 이런 자극을 받는다. 반대로 내적 요소로는 현재 있는 곳에서 더 이상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 현실로부터 실망하거나 익숙한 것들에서 벗어나고픈 갈망, 그리고 슬픔, 분노 불안 등과 같은 부정적 감정으로 절망했을 때 지금보다 나은 것이면 어떠한 것도 상관없는 '회피'와 연관이 있다.
외적이든 내적이든 어떤 이유에서든 스스로 '떠남'을 선택할 때, 기존의 것보다 더 나은 것을 향해 나아감은 동일하다. 그렇게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사람 입장에서의 '떠남'이라는 단어는 서운함이나 비참함, 증오와 같은 아쉬운 감정들을 함께 느낄 수밖에 없다. 자신으로부터 멀어짐을 선택한 상대방의 행동이 마치 자신의 과오나 부족함 때문일 수도 있다는 자아성찰 혹은 자기비판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하니까 떠난다'는 말은 당연히 모순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외적인 요소로 어떤 다른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픈 자극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기존 상태에 있어 충분히 만족하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헤어짐 통보를 받은 이에게 이 말은 그저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사랑하기에 떠나는 게 모순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한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떠난다'는 것은 '난망(難望, 바라기 어려움)' 때문이다.
'냉정과 열정사이'의 여주인공 '아오이'는 남주인공 '준세이'를 사랑하지만 떠났었다.
우리가 좋아하는 로맨스 영화들에는 사랑하니까 떠나는 이런 아픔의 순간들이 자주 나온다. 국내영화 '뷰티 인사이드'에는 남주인공의 해결할 수 없는 어떤 현실 때문에 여주인공을 사랑하지만 덤덤하게 이별을 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 2001년작 '엽기적인 그녀'에서도 남주인공은 사랑하는 여주인공을 위해 그녀의 맞선남에게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먹먹한 장면이 등장한다. 이런 장면을 두고 누군가는 상대방이 딱 그만큼만 사랑했고, 이별을 아름답게 포장하려는 찌질한 방법이라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반대로 자신보다 상대방을 더 사랑하기에 내릴 수 있는 결정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온갖 우연과 상황에 영향을 받으며 변화에 적응하거나, 인생 전체의 관점에서 소소한 선택들을 통해 나만의 인생을 만들어 나간다. 마치 거대한 사건의 소용돌이들 사이를 유영하듯, 통제할 수 없는 현실적인 요소들로 인해 인생의 주도권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존재한다. 사랑에 있어 상대방을 우연히 만나듯, 헤어짐에도 우연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을 진심으로 사랑해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은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서로의 행복을 생각할 때, 특히나 상대방의 행복을 진심으로 원할 때 내 마음을 가린 채 상대방을 놓아주는 것이다.
혹자는 사랑하면 함께 헤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도 그럴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미래의 불확실성에 있어 누구도 단정할 수 없다. 그렇게 우리는 나를 위한, 상대방을 위한, 그리고 서로를 위한 선택을 내려야 한다. '사랑은 타이밍이다'라고 얘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불확실성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롭고 현실적인 상황이 안정되어 있을 때, 우리는 '쉽게'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이 불안정할 때면 매 순간 어려운 결정들을 요구받을 수밖에 없다. 혹여나 심각한 사건을 마주할 땐, 상대방은 그 어려움에서 벗어나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상대방을 옆에 두고 싶어 하는 감정을 두고 저울질하며 그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다.
물론 상대방이 이별을 원하지 않았던 경우라면, 이기적이거나 혹은 마음의 크기가 작았다는 오해의 소지를 남길 여지가 있다. 그 선택에 있어 상대방 본인을 존중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아마 이별을 고했던 그 사람의 마음이 훨씬 아플 것이다. 이별하고도 맘 속 한편 상대방을 그리워하기에 시간이 지나 조금 무뎌질 때까지 상대방에게 준 상처와 자신이 내린 결정에 책임을 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힘든 상황 속 자신이 줄 수 있는 행복보다 놓아줬을 때 상대방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이 더 크다 생각했고, 상대방을 붙잡고 있는 것이 스스로 이기적이라 생각되기에 떠나는 것이다.
너무 강하게 이끌리면 부딪치기도 쉽다.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 中
그렇게 사랑은 냉정과 열정 사이에 있다. 마음의 불을 지펴 활활 타오르는 열정적인 사랑과 현실적인 생각을 하는 냉정적인 사랑은 양립할 수 없다. 상대방을 똑같이 사랑하지만 열정이 지나치면 때로는 서로가 현실에서 멀어져 큰 어려움이 야기될 수 있다. 반대로 냉정이 지나치면 현실적인 문제에만 매몰되어 자신들의 감정과는 동떨어진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사랑하기에 누구보다 서로의 행복을 원하지만, 오히려 누구보다 서로의 행복을 원하기에 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현실적 문제를 마주한 사랑 앞에서는 자신의 행복과 상대방의 행복 둘 다 바랄 수 없기에 선택을 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방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대체적으로 상대방의 행복을 선택하게 된다. 이렇게 사랑함에도 헤어지는 것, 사랑하니까 떠나는 마음인 것이다.
인연 혹은 운명이라는 것이 꼭 있었으면 좋겠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이별한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를 그리워하고 사랑하지만, 재회를 난망한다. 그러나 나는 그 난망이 꼭 낭만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행복노트 #46
뜨거울수록 한 발자국 더 멀어지고, 차가울수록 한 발자국 더 다가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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