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3) - 중세의 음악이론과 악보
로마가 두 개로 갈라지면서 다양해진 성가들이 음악이 다채롭게 발전하는 데에 한몫했었다. 그렇다면 음악 이론은 어떻게 발전했을까? 중세의 미학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자가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이었다면, 중세 음악계에서 가장 권위자는 '보에티우스'였다.
보에티우스는 당시 가장 널리 쓰인 음악 교과서인 [음악의 원리]를 집필하기도 한 인물인데, 그에게 음악은 수이자 숫자적 비와 비율이었다. (피타고라스의 기운이 여기까지 느껴진다.) 보에티우스는 저서 [음악의 원리]에서 음악을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다.
무지카 문다나(Musica mundana) - 우주의 음악
인간의 음악(Musica humana) - 인간의 음악
도구적 음악(Musica instrumentalis) - 악기(도구)의 음악
'우주의 음악'은 별, 행성 계절 등 이 세상이 움직이는 수적 관계를 의미한다. 행성은 항상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계절은 그 규칙 안에서 정해지는 등 세상은 규칙과 비율 안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음악'은 인간의 육체화 영혼들의 조화와 통합을 의미한다. 마지막 '악기의 음악'이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음악이다. 가운데 도에서 옥타브 위의 도는 1:2 비율, 도와 솔은 2:3 비율에 해당하는 등, 악기(도구)와 사람의 목소리 역시 음정의 수적 비율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역시 보에티우스의 음악 기준 안에 충족될 수 있었다.
또한 보에티우스는 피타고라스의 후예답게 음악이 성격에 미치는 영향을 굉장히 강조했다. 음악이 교육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하다고 믿었고, 진정한 음악가는 가수나 연주자가 아니라, 음악에 대한 판단을 위해 이성을 사용했던 철학자라고 생각했다.
다음으로 악보얘기를 해보자. 우리는 악보가 뭔지도 모르는 아기 때부터 동요를 배우며 자란다. 악보를 본 적도 없는데 한 번씩 들어본 노래를 기억하고 흥얼거리기도 한다. 이처럼 음악은 귀로 듣기만 해도 배우고 익힐 수 있는데, 이 특성 덕분에 악보가 없던 중세시대에도 성가들이 전해내려 져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을 계속 고수하면 문제가 있다. 살짝 착각하면 바로 다른 노래가 나오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가는 점점 지역별로 특성화되어 가고 시간이 지날수록 노래의 갯수도 많아졌다. 사람들은 이제 노래를 기억하기 힘들어졌는지, 노래를 메모해 놔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지금의 악보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계기이다.
처음엔 음이 올라가는지 내려가는지, 아니면 똑같은 음이 반복되는지 정도로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수준의 메모였다. 직장에서도 휘날리는 글씨로 나만 메모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생겨난 것이 바로 최초의 악보 '네우마'이다.
보통 '네우마'하면 네모난 음표의 악보를 많이 떠올리는데, 처음부터 네모난 음표를 사용한 것은 아니었고 그 악보가 만들어지기 위한 일련의 과정들이 있었다. 위의 초기 네우마를 보면 가사 위에 음정의 대략적인 요소만을 나타낸 것을 알 수 있다. 음정이 올라갔는지 짧은 음인지 긴 음인지 이런 것들을 표시하려 한 듯하다. 하지만 또다시 나만 알아볼 수 있게 표시한 메모는 당사자만 알 수 있다는 문제가 생긴다. 우리가 지금 저 네우마만 보고 어떤 음악인지 알기 힘든 것처럼, 당시 사람들도 똑같이 악보만 보고 음악을 알 수가 없었다.
음악은 점점 더 다채로워지고 곡 수도 계속 많아지고 있는데, 음악을 알고 있는 사람만 알 수 있는 악보를 가지고 하나하나 가르치려니 엄청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더 정교한 악보, 약속된 규칙이 있는 악보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귀도 다레초'라는 이탈리아 수도사가 등장한다.
보에티우스 이후 가장 널리 읽힌 논문이자, 당시 가수들의 실질적 지침서였던 [미크롤로구스]의 저자이기도 한 귀도는 무려 '선과 칸의 배열방식'을 처음으로 제시한다. 지금의 오선처럼 말이다! 이 방색이 채택되고 널리 퍼지면서 네우마도 그에 맞춰서 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선들은 각 음정 간의 관계를 명확히 알 수 있도록 해줬다. 이제 노래를 모르는 사람도 악보를 보면 어떤 음정인지 (비교적) 명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악보를 사용하다 보니 또 어려운 점이 생긴다. 바로 박자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음정의 높이는 알려주지만 그 음정이 긴지 짧은지 알려주지 못했던 악보를 보완하기 위해 '리가투레(3~4개가 붙어있는 사각음표)'라는 표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후에 리듬형이 더 발전되긴 했는데, 그건 그때 가서 이야기해보고 귀도다레초에 대한 얘기를 더 해보자. 귀도 다레초의 업적은 선과 칸의 구조를 제시한 것이 끝이 아니다. 무려 계명창, 즉 '도레미파솔라'를 만들어낸 장본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은 여러분들은 '귀도 다레초'라는 이름을 꼭 기억하고 지나가는 어린이들이 '도레미파솔라시도'는 누가 만들었냐고 물을 때 꼭 멋지게 답해주길 바란다. 이 엄청난 업적은 사실 <당신의 종들이 마음껏>이라는 찬미가에서 따온 것이다. 처음 여섯 악구가 한 음씩 상행하는 음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가사의 첫음절을 따온 것이다.
사실 당시의 '도'는 '웃(Ut)'이었고 이후에 '도'로 바뀐 것이다. 근데 계이름은 도부터 시까지 7개인데 왜 6개일까?라는 의문을 가진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옛날에는 '시'음정을 불안정하다고 생각해서 굉장히 경계해서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일곱 번째 음정의 이름을 정할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다.
이렇게 중세는 한쪽에서는 암흑기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음악계에서는 은근히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다. 지금의 오선보, 더 나아가서 음악 체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극 초반 시기라는 점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