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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예인 Nov 19. 2015

우리는 시위로 무엇을 목표하는가

깃발을 들고 차벽을 넘어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들어가기 앞서


당연한 이야기부터 하고 넘어가자. 모든 국민은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가지며, 이는 정부가 허가하거나 불허하거나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는 우리 헌법의 가치다. 공권력을 동원하여 시위를 봉쇄한다는 것은 실로 공익상 시급한 이유가 있지 않고는 불가능한 바, 관성적으로 시위라면 일단 불법으로 규정하고 틀어막아온 - 심지어는 교통상의 불편 따위를 이유로 내걸고 - 경찰의 행보는 마땅히 비난받아야 할 것이며, 충돌의 책임도 경찰, 나아가 정권에 훨씬 더 중하게 물어야 할 것이다.



실패한 궐기


2015년 11월 민중총궐기는 10만 이상의 군중이 운집한 대규모 시위였지만, 자화자찬에 도가 튼 사람이라 해도 이 시위를 성공적이라 평할 순 없을 것이다.


수십 개의 단체가 꾸린 투쟁본부는 명료한 메시지를 내놓지 못했다. 노동개악 중단, 사내유보금 환수, 쌀 수입 저지 및 쌀 가격 보장, 노점 단속 중단, 교과서 국정화 저지, 차별금지법 제정, 적대적 대북 정책 폐기, 한미일 동맹 반대, 세월호 인양, 케이블카 반대, 의료민영화 중단... 투쟁본부가 뽑은 메시지 중 몇 가지만 뽑아봐도 이렇다. 그야말로 일부 진보 진영의 주장을 종합선물세트처럼 늘어놓은 격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문제가 된 것이 폭력 시위 논란이다. 안 그래도 중구난방이었던 메시지는 폭력 시위 논란에 죄다 씻겨내려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무엇을 위해 추진되고 있는가,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 정책은 개혁인가 개악인가, 일각의 주장처럼 재벌의 사내유보금은 과잉인가 아닌가, 외교 안보는 어떻게 추진되어야 하는가... 발전적인 논쟁거리가 모두 사라졌다.


사회적 담론에 불을 붙였어야 할 10만 군중의 시위는 도리어 남은 불씨조차 밟아버렸다.



폭력 시위의 굴레


경찰은 차벽을 둘러쳐 시위대의 경로를 원천 차단했고, 시위대는 밧줄로 경찰 버스를 흔들고 파괴하려 시도했다. 일부 시위자는 쇠파이프와 각목 등으로 경찰을 공격하기도 했다. 경찰은 시위대를 물대포, 캡사이신, 최루액 등을 투입하여 저지했는데, 이미 쓰러진 시위자는 물론 구급차, 기자들에게까지 물대포를 발사해 물의를 빚었다. 이 과정에서 69세 백씨가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고 실신하여 사경을 헤매는 일이 벌어졌다.


시위에 위력이 동반되는 것은 당연하며, 이 와중에 폭력이 발생하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그 위력, 나아가 폭력적인 방식을 동원하여 무엇을 쟁취하고자 하느냐는 것이다. 시위는 경찰의 법리해석에 의해, 그리고 물리적으로는 버스 차벽에 의해 한정된 공간으로 봉쇄되었다. 이 공간을 뚫고 광화문 광장으로 진출해야만 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폭력 시위의 굴레를 무릅쓰고 차벽을 넘어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군집된 여론을 보여주고자 함이었다면 10만 군중을 모은 것으로도 충분했다. 광화문 광장의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종로에선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광화문에 가면 갑자기 들리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위대는 굳이 이를 돌파하려 애썼다. 그 와중에 폭력도 있었다. 일각의 지적처럼 10만 군중이 모두 평화적으로 통제될 수는 없으며, 쇠파이프나 각목 등이 등장한 것은 일부 시위자의 돌출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밧줄과 사다리 등이 미리 준비된 것이 차벽을 돌파하고 집회 신고 지역을 이탈하기 위함임을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경찰과의 충돌을 당연히 상정하고 있었다는 것도 말이다.


시위를 통해 특정 공간을 물리적으로 점거한다거나, 나아가 공권력의 전횡에 항의하고 충돌하고자 함이 목적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시위는 당연히 위력을 동반할 수밖에 없으며, 이 과정에서 희생 또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궐기가 그런 성격의 시위였던 것 같지는 않다. 충돌은 제한적으로 일어났으며, 시위대의 분위기도 그 정도의 분노와 결의가 지배하는 것 같진 않았다. 전방에서 나온 강경한 목소리와 대조적으로, 후방에선 아이의 손을 잡고 가족 단위로 나와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시위의 추억


나는 지휘부가 아니었다. 선봉도 아니었다. 말하자면 뒷짐 지고 선 불평분자였다. 지휘부가 듬직한 남자애들을 뽑아 선봉을 뽑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고, 그 선봉들이 경찰과 충돌하고 버스를 굳이 흔드는 까닭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대통령과 장관의 이름과 함께 "자폭하라"를 외치는 그 결의가 진짜라고 믿을 수도 없었다. 미묘한 열의와 애매한 지식으로 무장했던 대딩 시절 어떤 투쟁 때 이야기다.


메시지는 정부가 추진중인 XX라는 법안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정부청사 앞에서 몇 차례 구호를 외친 뒤 플래카드와 피켓을 가지고 행진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부청사 앞에서 구호를 외치던 지휘부가 갑자기, 폴리스라인을 넘어가자고 지시를 내렸고, 이미 지휘부와 조율이 되어 있던 것으로 보이는 선봉대를 위시하여 전선이 옮겨졌다.


대열에 있던 사람들은 어, 어, 이게 뭐지 하며 선봉대를 따라 어영부영 폴리스라인을 넘었다. 우스운 것은 우리가 폴리스라인을 넘어 옮긴 전선이, 폴리스라인 안의 깨끗한 아스팔트 도로 대신 어제 온 비로 질척거리고 웅덩이까지 생긴 진흙탕이었다는 것이다. 대단한 전진도 아니었다. 그저 수천의 군중이 바로 옆으로 한 블럭 쯤 옮겨갔을 뿐이었다. 경찰은 시위대의 이런 행동을 당연히 예상했다는 듯 별다른 충돌을 일으키지 않았고, 대신 다시 폴리스라인을 넘어 원래 위치로 돌아가라는 경고 방송을 수 차례 반복했을 뿐이었다.



관성


시위를 조직해 본 적도 지휘해 본 적도 없는 나 같은 사람이 시위의 방향성까지 논한다는 건 우스운 꼴이 될 것 같다. 다만 그때 느꼈던 건 어떤 관성이었다. (폴리스라인의 적법성 문제를 따지자면 당연히 시위대 쪽이 옳겠지만서도) 경찰은 폴리스라인을 치고, 시위대는 이를 넘어가고, 양측의 메시지는 강경해진다. 그 모든 것들은 강(强) 대 강(强)을 연출하기 위한 사전 준비작업처럼 보였다.


이번 시위는 이런 관성적인 움직임을 그 어느때보다도 뚜렷하게 보여준다. 차벽을 쌓는다. 흔든다. 그 앞에서 경찰과 충돌한다. 강(强) 대 강(强)의 이미지가 연출되었고, 양측의 메시지는 강경해진다. 경찰은 살인자가 되었고, 여당 대표는 시위를 테러에 비유한다. 늘 그랬던 바로 그 시위의 모습이다.


그러나 환경은 변했다. 한때 명박산성은 불통의 상징이었으며 이를 넘는 것은 곧 그에 대한 투쟁이었으나, 스포트라이트는 이제 차벽을 놓고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벌어지는 폭력에 집중되고 있다. 광우병 시위는 시위대의 목소리가 때로 비이성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이를 비꼬는 '촛불좀비' 따위의 단어가 탄생했다. 시위대에는 비이성과 무질서의 이미지가 덧칠되었고, 차벽은 질서가 되었다. 물대포는 집회 시위자들을 격리하고 통제하는 효율적인 도구로 자리잡았다.



우리는 시위를 통해 대체 무엇을 목표하는가


절대 대화하지 않는 공주 박근혜에 맞서, 시위는 관성 이상의 무엇이 되어야 한다. 시위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수없이 많은 과제가 산적해있지만, 개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며 근본적인 의문은, 우리는 시위를 통해 대체 무엇을 목표하는가 하는 것이다. 쌀 수입 저지를 위해, 노점 단속 중단을 위해, 한미일 동맹 반대를 위해... 메시지는 많았지만 모호하고 어지러웠다. 시위대 모두의 동감을 얻지조차 못했을 것이다.


차벽을 넘는다 해서 한미일 동맹이 해체되고 쌀 수입이 중단되리라 믿는 사람은 누구도 없을 것이다. 투쟁본부가 내건 이 의제들은 최종 목표이며, 시위를 비롯해 토의, 선거, 정당 활동, 시민단체 활동 등 수없이 많은 단계를 거쳐 이뤄질 이상이다. 이 각각의 단계는 최종 목표를 위한 작은 목표를 갖고 진행될 것이다. 여론 전환, 이론 공고화, 의제 설정, 의사결정구조 참여 등등. 그렇다면, 시위에서 차벽을 흔들고 넘는 것은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함인가?


혹자는 시위대가 일부러 강 대 강의 충돌을 연출하여 여론을 선동하려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혹자는 그저 모일 수 있으니 모였을 뿐이라고 시위의 의미를 격하하기도 한다. 전문 시위꾼들 때문에 시위가 격화된다는 얘기는 이제 일각의 주장이라 하기 민망할 정도라, 중도 신문의 칼럼에서조차 전문 시위꾼의 존재를 언급할 지경이다.


목적이 모호한 움직임은 힘이 없고, 이런 움직임이 빚어낸 충돌은 공허하다. 대학 시절의 그날로 돌아가, 시위대 뒤편에서 팔짱을 낀 채 연사의 목소리를 듣는 불평분자인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폴리스라인을 넘었는가? 우리는 정말 대통령과 장관의 자폭을 원했는가? 우리의 움직임 한 걸음 한 걸음은 대체 무엇을 목표하는가? 이 한 걸음은 정말 우리의 최종 목표를 위한 전진인가? 아니면 그저 등 떠밀린 군중의 무력한 전진일 뿐인가?



에필로그


그때 우리의 투쟁은 그 한 번의 시위를 끝으로 동력을 상실했고,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마무리되었다. 나는 XX라는 법안에 반대 입장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시위를 기획하는 지휘부의 강경한 목소리에 동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투쟁에 불참하면 벌금을 내야 했으므로, 끝까지 투쟁 대오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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