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베를린 6일의 기록
나는 여행을 기술하는 것에 젬병인데, 여행 중 노트를 살펴보면 1. 여행지와 전혀 관계없는 뜬금없이 얻은 인생에 대한 성찰 2. 여행 중 얻은 의미 없는 정보들의, 재미라고는 1도 들어있지 않은 나열의 두 범주로 나뉜다. 그렇다 보니 간혹 여행기를 맛깔나게 담아낸 여행 책자나 여행 에세이를 보면 선 채로 책 한 권을 끝내버리고 마는 일도 생기곤 한다.
나의 약점을 글에 앞서 짚고 넘어가는 것은 이 베를린 여행기가 지루해 중간에 이르러 (혹은 그보다 빨리) 사진만을 구경하고 스크롤 바를 빠르게 내리는 누군가가 있다 해도 마음에 가책을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과, 나 역시 그런 존재에 단단해지기 위함이다.
나는 스스로가 비교적 특별한 방식으로 여행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건방진 사고가 절대 성립할 수 없는 것은 저마다의 여행은 모두 다른 모양새일 테고 자신의 여행이 특별한 경험이라는 확신을 사람들이 갖지 않는다면 여행 산업은 이미 망하고도 남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조금 더 사실에 가깝게 설명을 해보자면 첫째, 나의 여행은 둔하고 미련하다. 로밍을 하거나 방문지 일정과 가는 방법 등을 면밀하게 계획해서 여행하기보다 종이 쪼가리 지도 한 장을 들고 필요 이상으로 걷고, 묻고, 그리고 길을 잃기가 쉽다. 여행 중 인터넷 사용이란 왠지 치팅(커닝)을 하는 느낌이기도 하고 여행에서까지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기술문명에 지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생각도 최근 도쿄에서 열흘 간 무선인터넷 3GB 사용 가능이라는 호사스러운 조건에서 편하게 여행하게 되어 본 바, 인터넷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는 돈 없는 여행자의 합리화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을 얻기는 했다. 구글 지도=사랑)
그리고 둘째로 나는 굳이 유명 관광지만을 찾아다니지 않는다. 요즘 연세 지긋하신 단체 관광객들 말고 관광지만 순회하는 여행자가 어딨겠냐고 반문한다면, 사실 누구라도 여행에서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로 시작하는, 불쑥 머리를 디미는 유명 관광지 방문의 의무감 비슷 무리한 압박을 느껴본 적이 없느냐고 묻고 싶다. 나에게 조차 이런 생각은 찾아들고 덕분에 관광지들을 방문한 이력이 없지 않다는 점도 덧붙여. 일례로 2년 전 프랑스 파리를 여행할 때 박물관 패스를 끊어 본전을 뽑겠답시고 사흘 내내 박물관만 다닌 경험이 있다. 비용 대비 효과에 대한 압박은 참으로 오래가기도 해서, 한참이 지나서야 박물관 순회가 결코 스스로를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비로소 이후부터의 일정에 관광지 방문을 포함하지 않게 되었다. 실제로 그때의 여행을 떠올리자면 루브르 박물관이나 개선문이 얼마나 대단하고 장엄했는지보다, 식당과 창고를 지나야 비로소 들어갈 수 있는 숨겨진 바(http://www.timeout.com/paris/en/bars-pubs/moonshiner)에서 밤이 늦어가도록 나누었던 이야기, 현지의 친구들과 새해맞이 파티에서 술을 진탕 마셨던 일, 그리고선 집에 가는 버스를 잘못 타 파리 외곽의 이름 모를 도시에서 길을 잃은 일, 리스팅의 문을 여는 법을 몰라 호스트에게 면박을 당했던 일, 리스팅이 있던 벨빌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와 그때에만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과 동네에서 먹은 쌀국수, 이런 것들이 먼저 찾아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행 중에 유명 관광지 방문의 유혹이 머리를 들고 또 많은 경우 뿌리치지 못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방문에 이르기까지 하는 경우는 대개 매우 짧은 시간만 할애하여 나의 잠재에서 올라오는 이 알 수 없는 의무감을 여행기간 동안 잠재우는 정도이다.
베를린 장벽은 멋있던가요? 샤를로텐부르크는 가보셨는지? 박물관 섬은?
따라서 이런 질문들에 답을 구하는 이들에게 나의 베를린 여행기는 유감스럽게도 친절하지 않거나 아무 짝에도 쓸모없을지 모른다. 우리의 5박 6일 베를린 여행은 역마다 제각기 다른 U-bahn 의 역 이름 디자인을 구경하기였고, 꾸미지 않은 듯 멋이 나는 베를린 생활자들을 관찰하기였고, 그들처럼 밥을 먹고 걷고 커피를 마시면서 베를리너의 일부가 되어보기였기 때문이다.
생활자는 일상에서 여행을 꿈꾸고 여행자는 일탈에서 생활을 좇는다. 매일 반복되는 같은 일상을 사는 생활자는 다른 도시에서의 낯섦을 동경하지만, 낯선 도시로 떠나온 여행자는 생활자들의 자취를 밟고 그들의 익숙함을 흉내 낸다. 우리가 머무른 6일의 베를린은 생활에서 아득하지도, 여행이 아니지도 않다. 아직 인내심이 바닥나지 않은 당신이라면, 이것마저도 당신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