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떡
“하평아!”
난 내 이름이 좋아.
다들 내 이름을 들으면 ‘화평’으로 듣고 뜻이 좋다며 칭찬해. ‘화평’이 아니라 ‘하평’인데 말이야. 하긴, 나도 화평이란 단어는 익숙해도 하평이란 단어는 엄마아빠가 날 부를 때 말곤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
그래서 난 엄마한테 물었지.
“엄마, 난 왜 화평이가 아니라 하평이야?”
그러니 엄마는 이렇게 대답해 줬어.
“‘화평’이란 의미는 좋은데, 이름으로 하기엔 ‘하’가 좀 더 예뻐서? 뭐.. 그랬던 거 같애~”
엄마의 애매한 답변에 난 오히려 더 의문이 들었어. 그리고 그 의문은 내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지. 그래서 난 나름 젊은 나인데 미간에 흉터처럼 선 같은 주름이 희미하게 그어져 있나 봐. 젠장, 주름마저 애매하네 난.
근데, 애매한 게 나쁜 게 아니잖아? 상위권도 아니고, 하위권도 아니고. 상위권이면 얼마나 부담스러워?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버텨라’라는 말이 있잖아? 낮은 곳에서 떨어지는 거보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게 훨씬 아픈 거 알지? 떨어지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니. 그렇다고 하위권은? 하위권은 올라가려고 애써야 하잖아. 사실 올라가지 않아도 되지만, 올라가려는 의지마저 보여주지 않으면 혀 끌끌 차면서 한심하게 보는 사람들이 한 둘이니. 그러니 중위권! 애매한 게 좋다는 거야. 떨어지지 않으려고, 올라가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잖아? 애매한 게 행복한 거야. 난 그렇게 믿어!
“우리 딸 사랑해!"
“나도 사랑해!”
우리 집 룰이야. 자러 들어가기 전 꼭 사랑한다고 서로 이야기해 주는 것. 오늘은 아빠가 날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인사를 해주네. 괜스레 기분이 좋아져. 나도 아빠를 한껏 웃으며 바라보고 사랑한다고 했어. 정말이지, 사랑이 넘쳐나는 기분이라 으쓱해지기까지 해.
아빠는 직접 방까지 날 바래다주고 내가 침대 위에 누워서 이불을 덮는 것까지 확인을 해. 그리고는 상냥하게 불까지 꺼주지. 내가 놀랄까 봐 방문까지 천천히, 살살 닫아준다니까?
그리고 아빠가 나가면 난 숫자를 세.
‘구십팔.. 구십구.. 백..’
숫자를 백까지 셌는데도 잠이 들지 않는다면, 난 눈을 떠. 그럼 새까만 천장이 보이지. 그거 알지? 어둠 속에서 눈을 팍! 뜨면 처음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잖아. 하다못해 내 손을 눈앞에서 막 흔들어도 실루엣조차 보이지 않아. 사라지고 있는 기분이야. 그러다가 조금씩 형태가 보이지 시작하지. 다시 태어나고 있는 기분이야. 그 기분을 느끼고 있으면 간사한 내 뇌는 더 기분이 좋아지고 싶어 해. 바로 도파민을 찾지. 그럼 다시 태어난 난 어디서 배운 건지 슬며시 내 머리맡에 있는 핸드폰으로 손을 뻗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사람치곤 강력한 도파민이 어디서 나오는지 수상하리만큼 잘 알고 있지. 아무튼, 핸드폰 화면을 켜면 내 뇌에서 나오고 있는 도파민만큼 강력한 빛에 내 눈을 강타해. 아, 내 눈... 그래서 서둘러 화면 밝기를 낮춰. 눈 상하면 안되잖아. 아니 사실은, 거실에 있는 엄마 아빠한테 들키면 안 되잖아.
화면 밝기를 낮춘 것도 모자라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써. 살짝 숨이 막히긴 하는데 괜찮아. 좁고 아늑한 것이 마치 엄마 뱃속 같거든. 엄마 뱃속을 기억하냐고? 전혀. 내 나이가 몇인데. 근데, 이렇게 한껏 웅크리고 있었을 것 같아. 그리고 내 심장소리를 느끼는 거지. 쿵.. 쿵.. 쿵.. 쿵.. 지금은 좀 더 빨리 뛰는 것 같아. 아늑한데 심장이 왜 그렇게 빨리 뛰냐고? 이게 다 도파민 덕분이지. 아, 엄마 뱃속이랑은 다르겠구나? 거긴 핸드폰이 없으니까. 난 10달 동안 핸드폰도 없이 거기서 어떻게 살았데? 지금은 아늑한데 도파민까지 솟아오르니, 이야! 이게 사는 거지! 근데, 갑자기 왜 이렇게 숨통이 탁! 트이지? 신선한 공기가 내 콧속으로 들어오는데? 마치 엄마 뱃속에서 10개월 만에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처럼.
“나와”
아뿔싸.. 태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죽게 생겼네. 참고로 우리 아빠는 거대한 골룸 닮았다? 골룸 알지? ‘마이 프레셔스~’ 거리는 삐쩍 마르고 눈 엄청 큰! 안타깝게도 우리 아빤 마르진 않아서 눈 큰 것만 골룸 같아. 가만히 있어도 눈빛으로 뭐든 잡아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 아빠가 눈을 크게 뜨기 시작했거든? 그 말은 뭐다? 난 큰 일 났다는 거지 뭐. 차라리 진짜 골룸이랑 마주치는 게 낫겠어. 걘 조그맣고 삐쩍 말랐으니까 어떻게 덤벼볼 수 있지 않을까? 근데 우리 아빤 거대한 골룸이야. 어림도 없다는 거지. 그래서 난 저항할 생각도 못하고 곱게 나가. 한 발 한 발 나가는데, 진짜 시간이 1초가 1시간처럼 느껴진다니까?
체감상 5시간이 지났으니까 불과 5초가 지난 거겠지? 아빠는 날 바라보며 딱 한마디를 해.
“내놔”
아까 사랑한다던 사람 맞냐고? 맞아. 원래 엄마 아빠들은 매시간 매초 바뀌는 거 아니야? 사랑했다가 협박했다가.. 익숙해질 법도 한데 전혀 익숙해지지 않아. 내가 방금 말했지? 우리 아빤 거대한 골룸 닮았다고. 저 말에도 저항할 생각도 못하고 고분고분 내 핸드폰을 넘겼어. 그리고 아빤 내 핸드폰을 스윽 쥐고 느끼더라.
“뜨겁네?”
핸드폰만 뜨거워? 내 속도 뜨거워. 심장이 어찌나 빨리 뛰는지 피가 그렇게 빨리 돌 수가 없더라니까? 뜨거운 만큼 내 등엔 땀 한 줄기가 타고 내려가기까지 해. 부정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어. 내 몸 마저 이렇게 솔직한데, 핸드폰이라고 솔직하지 않겠어? 내가 사용한 만큼 얘는 더더욱 뜨거워지더라.
그리고 아빠는 위협적으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어. 평소에도 마음에 안 들었다느니, 폰 중독이라느니.. 아니 평소에 마음에 안 들었으면 마음에 안 든 티라도 내던가. 정말 황당해. 아니 그리고, 내가 몰래 핸드폰 하는 게 그렇게까지 핏대 세우며 화낼 일일까? 아빠는 손이 심심한지 뭐라도 쥐려고 하고, 그 모습을 본 엄마는 하지 말라며 소리를 지르지. 하지만, 흥분한 아빠는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어.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거지.
난 이미 알고 있었어. 아빠는 내가 몰래 핸드폰 해서 화난 게 아니란 걸. 만약 내 자식이 몰래 핸드폰을 하다가 걸렸더라면, 난 화가 나기보단 안타까웠을 거야. 몰래 그러는 게 지 손핸 걸 지가 모르는 거니까.
자, 이렇게만 봐도 얼마나 황당한 일이야? 사랑한다고 다정하게 말하고 이렇게 소리를 지르기까지 불과 30분이 걸리지 않았어. 봐, 우리 집은 이렇게 지루할 틈이 없어. 매일, 매시간, 모두 예측할 수 없으니까.
“쾅!”
무슨 소리냐고? 아빠가 내 핸드폰 집어던지는 소리야. 본인의 화를 이기지 못한 아빠는 내 핸드폰을 던져버렸어. 어이쿠.. 죽어버렸네. 매끈했던 내 핸드폰 화면은 순식간에 거미 10마리가 합심해서 집을 만든 것처럼 금이 쩍쩍 갈라져버렸어. 아무렇지도 않냐고? 아니, 난 서둘러 도망갈 곳을 찾고 있지.
“쾅!”
이건 또 무슨 소리냐고? 우리 엄마가 내 동생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가는 소리. 골룸에게 금방이라고 먹힐 것 같은 자식보단 한 발짝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식 살리는 게 좀 더 쉽잖아? 엄마는 동생을 데리고 안전지대로 들어가 버렸어. 그리고 거실엔 아빠와 나만 남았지. 난 이제 어디로 도망갈 수 있을까?
도망가기 못했어.
난 떡을 좋아해. 송편, 절편, 백설기 모두 가리지 않고 떡이라면 다 잘 먹어. 심지어는 콩떡까지 좋아해서 급식에 콩떡이 나오면 모두 내 몫일 정도야.
“딸, 이거 무지개떡 같다”
어찌나 떡을 좋아하는지 난 내 종아리에도 떡을 달게 됐어. 어젯밤 이후로 달게 됐으니까 신상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러데이션으로 조금씩 파래지는 신제품 파란 무지개떡. 어때? 먹어보고 싶어? 엄마는 내 다리에 달린 떡을 보고 깔깔깔 웃기 시작했어. 이렇게 맛없어 보이는 떡은 처음이라며. 처음으로 싫어하는 떡이 생겼어.
난 무지개 떡이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