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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히 Dec 06. 2019

<나의 미친 페미니스트 여자친구>를 읽고

다음 날 민낯으로 카페를 갔고 아무렇지 않았다.




코감기에 걸려 콧물이 시도 때도 없이 흐른다. 예기치 않은 비눗방울 쇼를 보여줄까 봐 숨 쉴 때마다 특히, 대화를 할 때 신경이 무지 쓰인다. 노브랜드 보습 티슈를 쟁여놓은 덕에 풀어대는 콧물에 비해 코가 많이 헐진 않았다. 어제는 선크림도 바르지 않은 얼굴에 마스크를 하고 외출했다. 지난봄, 미세먼지가 요란일 때 쟁여놓았던 황사마스크다. 퇴사한 뒤부터는 미세먼지가 심한 날엔 집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그만이었기에 쓸 일이 없었다.


어제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지만 책을 반납해야 하는 날이라 외출이 불가피했다. 내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없는 맑은 콧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 요즘 마스크를 하고 다니니 너무 좋다는 남자 친구의 말이 떠올라 오랜만에 마스크를 꺼내 들었다. 춥다고 마스크를 써본 게 언제였더라. 아주 어린 시절,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면 마스크를 썼던 기억이 전부다. 근데 이게 웬일인가. 전날 병원 가는 길만 해도 뚫린 콧구멍 속으로 휘몰아치던 바람을 마스크가 완벽 차단을 해주는 것이 아닌가. 귀는 빨갛게 얼었는데 얼굴은 태연했다. 강풍에 모자에 달린 털이 이마를 간지럽히는데 눈 밑으로는 미동도 없었다. 신세계였다. 마스크 하나로 평소엔 엄두도 못 냈을 도보 30분의 여정을 무사히 마쳤다.





책 3권을 반납하고 4권을 빌렸다. 언젠가 신착 도서가 놓인 서가에서 신유진 작가의 <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를 발견한 경험이 있어 이번에도 득템을 하겠노라며 서가를 뚫어질 듯 살폈다. 역시 기대는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책방에서 배송 온 책 정리를 하다 눈에 들어왔던 오은 시인의 <왼손은 마음이 아파>를 발견했다.


한 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바로 옆에 있던 '한국 소설' 서가로 갔다. 오 마이 갓. 지난여름엔가 제목을 듣자마자 호기심이 생겼던 <나의 미친 페미니스트 여자친구>를 발견했고 바로 밑에 지금 내 관심사에 꼭 맞는 브런치 수상작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가 있었다. 신이 나 속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셀프 대출 기계로 향했다. 또 뭐가 없나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반납한 책들이 놓인 트레이에 <문학하는 마음>이 놓여 있었다. 걸을 때마다 패딩에 미끄러지는 빈 에코백이 거슬려 아무 책이라도 채워와야겠다 생각했는데 이게 웬 횡재냐. 에코백에 가지런히 담긴 책 4권과 마스크로 그날의 행복 할당량이 다 채워졌다.





<나의 미친 페미니스트 여자친구>를 가장 먼저 읽었다. 내가 책을 이렇게 빨리 읽는 사람이었나. 유치함과 친근함의 경계에 있는 문체에 매료돼 단숨에 읽었다. 무엇보다 4년 만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회한 남자와 여자의 티키타카가 꼭 나와 내 남자 친구를 보는 느낌이 들어 더 몰입했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상황이 어렵지 않게, 어디선가 본 것처럼 머릿속에 그려졌다. 어떤 부분에서는 남자가 처한 그 곤란한 상황에 내가 같이 있기라도 한 듯 '어떡해...' 하는 짧은 탄식이 나오기도 했다.


연애 초반, 남자 친구에게 가장 많이 한 말 중 하나는 "네가 왜? 내가 해"였다. 내 짐을 대신 들어준다거나 무거운 걸 대신 들어준다고 할 때, 위험하거나 어려운 걸 본인이 대신해주겠다는 말에 자동반사처럼 튀어나왔다. 밀당하려고 했던 말도 아니고 떠보려고 했던 말도 아니다. 내가 주체적으로 한 판단과 결정에 남이 끼어든다는 게 싫었다. 내가 아닌 남의 도움이 필요했으면 애초에 부탁을 했겠지. 그래서인지 4년 사이 180도 달라져버린 여자 친구를 본인이 노력하면 어떻게든 돌려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승준의 의도적인 행동과 독백에 갑갑함을 느꼈다. 내 남자 친구는 내 입에서 '남의 일'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서운해하는 눈치였지만. 승준처럼.





마음이 단단해진 느낌이었다. 알 수 없는 용기도 생겼다. 소설을 읽었을 뿐인데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변화가 생겼다.


집 앞 카페를 갈 때도 기본 화장은 했다. 팩트로 원래의 피부를 감추고 숱도 많으면서 모양을 내기 위해 눈썹을 그렸다. 자기만족이 아니었다. 닭장 같은 원룸에 하루 종일 있기에는 답답해 집은 아니지만 집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집에서 할 일을 하기 위해 근처 카페를 가는데 누가 화장할 필요성을 느끼겠는가. 편안한 옷차림은 괜찮았지만 민낯은 불편함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스로 정해놓은 최소한의 예의를 지킨 것이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눈총 받는 게 싫었다. 자극에 민감한 나는 받을 수 있는 자극을 하나라도 줄여야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는데, 다수의 사람들과 비슷하게 치장해 눈에 띄지 않아야 '시선'이라는 자극 하나라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화장을 하고 마스크를 쓰는 건 정말 찝찝한 일이다. 아무리 조심해도 하얀 마스크에 누런 팩트가 묻어난다. 가끔은 누런 색 옆에 빨간 립스틱이 같이 묻기도 한다. 화장과 마스크 중 하나를 포기해야 했다. 마스크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한 이상 마스크는 포기할 수 없었다. 로션을 듬뿍 바르고 마스크를 끼고 집을 나섰다. 카페에 들어와 마스크를 벗었다. 막상 해보니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제 혼자 편하게 다닐 땐 화장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엄청난 변화다.




덧,


사람들은, 나는 왜 책을 읽을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좋은 책을 읽고 난 뒤 이번엔 그럴듯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하며 떠올리는 질문이다. 지금까지의 생각을 뭉뚱그려 말하자면 책을 읽고 난 후 내 모습이 좋아 책을 읽는다. 생겨 먹은 대로, 지금 처한 상황에 맞게 흘러가기보다 좋은 건 더 좋게 좋지 않은 건 덜 좋지 않게 변화하려고 하는 내 모습이 좋아서. 음식을 잘 소화하면 건강한 빛깔을 띈 유형의 결과물이 배출되고, 활자를 잘 소화하면 무형의 단단한 생각과 긍정적인 행동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 같다. 나에게 '좋은 책'이란 이러한 작용이 활발히 이뤄지게 하는 책이며, 나에게 책은 배움의 끈을 놓지 않게 하는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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