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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나무 Jun 20. 2022

카레라이스의 추억

  생애 처음 먹었던 카레를 기억한다. 여덟 살 가을 즈음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어느 오후, 엄마가 국물이 걸쭉한 노란 음식을 밥과 함께 접시에 담아주었다. 노란 음식은 그 색상만으로도 낯설었다. 희거나 붉거나 푸릇푸릇한 음식은 흔했지만 노란 음식은 그때까지 단무지와 달걀노른자 말고는 거의 본 적 없었다. 묘한 냄새가 났고 맛은 매웠다. 고추와는 다른 매운맛이었다. 싸 놓은 보자기에서 조금씩 풀려 나오는 것 같은 은근한 자극이랄까. 노란 것이 매울 것이라고 생각지 못한 뇌의 혼란이 보자기 역할을 한 것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보자기가 풀어지면서 흘러나온 냄새는 무척 독특했다. 지층에 퇴적된 흙이나 바위, 나무 같은 것에 과일이 농익어 섞여 든 것 같은 냄새. 그 속에 들어간 감자와 양파, 당근, 달걀은 또 늘 먹던 것이어서, 친숙했던 사람이 낯선 모자를 쓰고 나타나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그런 맛이기도 했다. 카레라이스야. 엄마는 그렇게 음식 이름을 알려주었겠지. 그날의 카레를 상세히 기억하는 건, 처음 보는 음식의 노란색과 독특한 맛도 한몫했겠지만 '달리기' 때문이었다.               


  그날 학교에서 달리기 시합이 있었다. 정식 시합은 아니고 운동회를 앞둔 총연습 같은 거였다. 흙으로 다져진 운동장엔 하얀 가루로 커다란 원이 그려졌다. 아이들은 운동장 가장자리에 몰아져 반 별로 줄 지어 앉아 있었고, 담임선생님들은 대표 선수들을 추려냈다. 각 반에서 대여섯 명 정도씩. 거기에 내가 뽑혔다. 그땐 지금보다 학교에 학생 수가 많을 때였다. 한 학년 거의 여덟 개 반에 각 반 학생 수는 60 명가량 되었던 것 같다. 그중 몇 반, 몇 번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담임은 중년 정도의 여자 선생님이었다. 많은 아이들을 죽 훑어보며 선수를 뽑아낸 그 기준이 무엇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보기에 날렵해 보이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일 학년 첫 운동회였다. 서로 간의, 그리고 스스로의 실력도 모를 때였다. 얼떨결에 선수로 뽑혀 나간 나는 각 반 선수들이 대기하는 줄에 가서 섰다. 갑자기 맡게 된 역할이었다. 어떤 것이든 예상하지 못한 것엔 당황부터 하여 머릿속 회전이 둔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어린 나는 그게 심한 편이었고, 지금까지도 그 성향이 남아 있다.              


  운동장에 그어진 하얀 원을 따라 뛰어야 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원은 하나로 이어져 있었지만 절반만 달려야 했다. 발선과 도착선 표시가 각각 절반 지점에 그어져 있었다. 도착선에는 남자 선생님이 팔을 길게 뻗쳐 화약총을 쥐고 있었다. 그 선생님 손에서 하고 울리는 총소리가 출발 신호였다. 출발선에 선 아이들은 한쪽 무릎을 땅에 댄 준비 자세를 취했다가 총소리와 동시에 몸을 일으키며 튀어나갔다. 여덟 명 정도 되는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얇게 그어진 하얀 선 하나를 따라 다투어 달렸다. 뭉쳐가다가 넘어지는 아이도 있고, 차츰 무리를 앞서는 아이도 있었다. 선 가까이 뛰는 게 유리해 보였다. 선두에 나서게 된 아이는 하얀 선을 혼자 차지하고 달렸다. 내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다. ', 소리가 나면 뛰어야 해.' 속으로 수없이 되뇌었을 것이다. 어떡하든 주어진 역할을 치러야 한다는 긴장에 심장은 빠르게 뛰었을 것이다. 온 정신을 모았을 그 와중에 머릿속에 반짝 불이 켜지듯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아주 신통한 생각. 나는 넘어지고 싶지도 않았고, 원에서 멀리 밀려나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아이들과 다투어 달리고 싶지 않았다. 내 차례가 되었다.   


   '준비, .'      

  총소리와 동시에 굽혔던 몸을 일으켰고, 나는 돌아섰다. 그리고 혼자 달렸다. 모두가 달려가는 반대쪽 원을 따라 열심히. 원은 내가 볼 땐 정확히 반으로 나눠져 있었다. 반대쪽 원을 따라 거꾸로 달려도 도착선까지 길이가 똑같았다. 도착하는 순간 순위를 가리는 데도 무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나는 도착선에 닿지 못했다. 담임선생님이 달려와 나를 제지했던 것이다. 그땐 알지 못했다. 내가 얼마나 이상한 짓거리를 한 것인지. 커서 가끔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면 비죽비죽 웃음이 나왔다. 생각지 못한 엉뚱한 사태에 담임선생님은 또 얼마나 당황했을까. 선생님은 그때 내게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 그냥 내 손을 잡고 데려가 반 아이들 틈에 앉혀 주었다. 야단을 치지도, 달리기를 중단시킨 까닭도 말해 주지 않았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 선생님에게 새삼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야단스레 굴지 않고, 그냥 내 손을 잡고 가서 말없이 아이들 틈에 앉혀 준 것이.    


   그날 오후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가 밥상에 놓아준 카레라이스는 어쩐지 내게 독립된 존재가 된 기분이 들게 했다. 넓은 접시에 하얀 쌀밥과 함께 예쁘게 담긴, 노란색의 한 접시 음식. 찌개 냄비를 가운데 둔 밥상 앞에 가족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것과는 달랐다. 카레의 새로운 맛보다 어쩌면 그것이 더 좋았다. 각자 저마다의 음식을 접시 하나에 단아하게 담아 먹는 것. 누구와도 겨루지 않고 혼자 달려갈 때 아주 홀가분했던 것처럼. 그렇게 자신을 알아가는 모양이었다. 어디에 끌리고, 무엇이 편안한지. 지금도 나는 한 접시 음식을 혼자 먹는 것이 좋다.             


   "맛 어때요?"    

  얼마 전 엄마가 산골에 와서 한동안 머물렀을 때, 첫 식사로 카레라이스를 만들어 드렸다.  

  "맛있지. 나 카레 좋아하잖아."   

   엄마가 카레를 밥과 함께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전 카레라이스가 흔치 않았던 시절, 우리에게 신기한 이국 음식을 선보인 엄마. 그 뒤로 엄마는 툭하면 카레라이스를 만들었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먹었던 것 같다. 가족 모두 대체로 잘 먹었지만 가장 좋아한 사람을 꼽으라면 엄마다. 아버지만 예외였다. 버지는 밥상에 반드시 된장찌개가 올라야 하는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아버지가 카레라이스를 드시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 당시엔 타지에서 근무를 하여 주말이나 집에 오셨으니 아버지 식성으로 인해 카레라이스가 밀려날 일은 없었다.   

  "엄마는 카레에 꼭 달걀지단을 넣어 줬어."   

  엄마 옆에 나란히 앉아 카레라이스를 먹고 있던 동생이 말했다.   

  "맞아. 나도 그래서 카레라이스엔 달걀지단이 들어가야 되는 건 줄 알았잖아.”   

   내가 말했다. 그랬다. 엄마의 카레라이스엔 큼직하게 깍둑썰기 한 감자, 당근, 양파와 함께 늘 두툼하게 부친 달걀지단이 들어가 있었다. 어느 정도 클 때까지 다른 곳에서 카레를 먹어 본 적 없었기에, 나는 노란 달걀지단이 카레라이스의 필수 재료인 줄 알았다.

  뭐 꼭 정해진  어딨어. 너네가 달걀은 잘 먹으니 부쳐서 넣은 거지.”   

  엄마가 말했다.    

 . 달걀지단 들어간 거 좋았어. 가끔은 프라이해서 올려 주기도 했잖아. 그것도 좋았고.”

  동생이 말했다.    

  "이것도 맛있다 얘. 달걀도 안 들어갔는데." 

  엄마가 말했다. 그날 내가 만든 카레는 '양파카레'였다. 물을 넣지 않고 양파를 잔뜩 볶아 그 국물에 카레 분말을 풀었다. 만들 때마다 다르지만 나는 주로 양파를 기본으로 감자나 당근, 병아리콩 따위 집에 있는 재료를 조금 첨가한다. 엄마가 오셨을 땐 마당 텃밭에 루꼴라가 넘쳐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날 카레엔 생루꼴라도 곁들였다. 그러니까 '루꼴라카레' 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다. 양파, 혹은 루꼴라 카레엔 달걀지단을 넣지 않았지만 엄마도 동생도 맛있게 접시를 비웠다.


  요리를 하다 보면 자기만의 방식이 생긴다. 특히 재료 선택 폭이 넓은 카레에 대해선 저마다의 레시피가 있을 것이다. 토마토나 버섯도 내가 즐겨 넣는 카레 재료다. 하지만 어떤 카레든 어린 시절 파란 철제 대문이 있던, 골목 세 번째 집에서 내가 처음 먹었던 카레만큼 특별할 수는 없다. 익숙한 유년의 골목을 벗어나 다른 세계의 틈으로 한 발 내디딘 것 같았던, 잊을 수 없는 그 카레라이스.



 

오랜만에 오신 엄마를 위해 카레를 만들고 있다


양파가 듬뿍 들어가고 루꼴라를 곁들인 카레라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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