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데미안"

『데미안』- (完)

by 연서
『데미안』은 내게 데미안이었고, 마침내 내 안으로 들어와 온전히 내가 되었다.


책에는 데미안 외에도 다양한 구도자들의 존재가 언급된다. 나는 싱클레어의 역사만을 보았지만 사실 그들 모두에게 각자의 역사가 있었을 것이다. 길은 하나가 아니다. 살아있는 데미안을 친구로 두고, 닿을 수 있는 에바 부인을 곁에 둔 채로 구도자가 될 수 있는 길이 있을지 모른다. 구도자라면 그 정도는 찾아야 한다고 본다. 이제 원문으로 돌아가 보자.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무너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나라는 새는 투쟁할 것이다. 알껍질의 성분은 아직 알 수 없다. “세계를 무너뜨려야 한다.” 무너뜨리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세계 없이는 나도 존재할 수 없다. 만일 무너진 껍질 뒤에 새로운 세계가 있다면 그곳이 내가 살아갈 세계다. 내가 원하는 세계이며, 그곳이 어떤 모습일지는 나만이 정할 수 있다. 그곳은 원래의 세계에서 내가 원하는 것들만 골라 남겨 둔 형태일 것이고 거기에는 데미안도 에바 부인도 멀쩡히 살아서 내 곁에 있을 것이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압락사스는 선이며 악이고, 인간이며 짐승이고, 모든 것이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다. 정의할 수 없고,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그를 숭배하고 찬양하지 않는다. 그는 나에 의해서만 정의된다. 내가 나에 이른 존재가 되었을 때 압락사스는 내가 된다.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형태로 살아가더라도, 이미 구도자인 나는 스스로 압락사스일 것이다.


결론이 났다. 나는 싱클레어도, 데미안도, 헤세도 아니다. 내가 구도자가 되는 방법은 나만이 알고 있고, 그것이 달성된 순간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구태여 고통스러울 필요도 없다. 나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서두를 수도 없다. 나는 이미 지난 일 년간의 고통으로 나의 길에 들어섰다. 이 세계는 기존에 나를 가둬 두었던 불확실하고 흐릿했던, 냄새나고 어지러웠던 세계와는 분명 다르다. 나는 스스로 그것을 깨고 나왔다. 구도자 단계의 초입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다만 몇 단계가 최종인지는 아직 알 수 없고, 지금이 최종장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고 있다. 따라서 이대로 간다. 나는 나에게로 가는 길을 걷고 있다. 내 세계는 앞으로도 무너지겠지만 그 과정은 고통스럽지만은 않아도 될 것이다.




"나의 표적, 나의 문양은 어떤 형태일까. 나의 데미안은 어디에 있을까. 지금, 헤세의 『데미안』이 나의 첫 데미안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데미안』에 이끌렸고, 어렵고 지겨워 스스로 한 번 밀어냈고, 고통의 시간을 보낸 뒤 자연스럽게 다시 찾았다. 그리고 완독함으로써 그를 내 안에 넣었다. 굳이 책을 통째로 외울 필요도 없다. 그것은 이제 내 안에 깊게 침잠하여, 거울을 들여다보면 그곳에 『데미안』이 있다.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자신의 안에 받아들여 스스로 완전해졌듯이, 나도 나의 데미안을 받아들였다.


이곳은 초보 구도자의 그런 책방이다. 나를 받아들이는 것은 여러분의 선택이다. 나의 글 중 어느 하나라도 여러분에게 닿아, 내가 당신의 데미안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22.12.04. 연서



23.05.04.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지금도 저는 완전한 구도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브런치 작가는 되었네요. 느리더라도 계속 걸어 봅시다.




p.s. 제 견해입니다만, 데미안을 읽었다고 해서 갑자기 깨달음을 얻고 구도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책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이미 싱클레어와 비슷한 과정을 겪고 자신의 길에 발을 들여놓은 이들이 완독 후에 ‘아, 나는 이미 구도자였구나.’하고 자각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끔찍한 고통을 딛고, 알을 깨고 나온 후에야 비로소 데미안에 몰입하고 전율할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스스로 데미안을 읽을 준비가 되었음을 문득 깨닫는 순간이 오면, 그때 책을 펼쳐 보시길 당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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