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얼굴을 가진 사회
여유로운 주말 아침,
가끔 거울을 보며 생각한다.
부스스한 머리, 목 늘어난 티를 입은 이게 나일까?
드라이로 잘 정돈된 머리, 유행 타지 않는 나만의 패션으로 꾸민 내가 진짜 나일까?
거울 속엔 하나의 얼굴이 있다.
하지만 반쯤 돌리면, 또 하나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 사회는 마치 아수라 백작과 같다.
하나는 웃고 있지만, 다른 하나는 이를 갈고 있다.
겉으로는 조화와 화합을 외치지만,
속에서는 끊임없이 서로를 경계하고, 혐오하고, 밀어낸다.
이 땅의 출산율이 끝없이 추락하는 이유를,
단순히 돈이 없어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정말 돈 때문인가?
정말 아이를 키울 경제적 여력이 부족해서만일까?
우리는 한 번쯤 이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인도 신화에 나오는 아수라는 다양한 얼굴과 팔을 가지고 있으며 정의를 위해 끝없는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살아남기 위해 싸우고, 끝없이 전쟁을 벌인다.
우리 사회도 그렇다.
끊임없이 서로를 갈라치고, 분열하고, 증오한다.
여성과 남성이, 기성세대와 청년이, 기업과 노동자가,
서로를 이해하기보다는 상대가 더 나쁘다고 손가락질하는 데 익숙해졌다.
이는 ‘Time will tell(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듯, 시간이 지날수록 본인들이 생각하는 정의를 내세워 다른 한쪽을 죽이고 있다.
언젠가부터 ‘우리’라는 개념은 희미해졌고,
‘나’만 살아남으면 된다는 논리가 지배하게 되었다.
연애는 귀찮고, 결혼은 리스크이며, 아이를 낳는 것은 미친 짓이 되었다.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도생이 미덕이 되어버린 사회.
감성에 젖은 글은 오글거리는 글이 되어버렸고 사회적으로 약속된 도덕적, 윤리적 가치관은 ‘선비’가 되어버렸다.
이 사회에서 누가 감히 새로운 생명을 품겠는가?
사회라는 벼랑 끝으로 그 누가 자기 자식을 내 몰 수 있겠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수많은 연애 예능을 즐겨 시청하지만, 그저 대리만족의 수단이 되어버렸고
사람들은 사랑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서로를 밀어내고 있다.
아수라 백작의 또 다른 얼굴은 ‘백작’이다.
품위와 질서를 상징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결혼을 장려하고, 아이를 낳으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정작 연애, 결혼, 육아의 모든 부담을 개인에게 떠넘긴다.
사회는 개인에게 말한다.
“가정을 꾸려라, 부모가 되어라. 희생이란 절대적이다.”
그러나 정작 책임은 개인이 짊어져야 한다.
국가는 방관하고, 기업은 외면하고, 사회는 무관심하다.
아이가 줄어드니 아이 장려 정책은 없고 노인 기준 나이를 올리는 미래 없는 이상한 정책만 난무한다.
그러니 선택은 뻔하다.
“그냥 안 한다.”
“내 자식이 모든 걸 짊어지라고요? 안 낳고 말죠”
사람들은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
오히려 더욱 고립되고, 더욱 분열되며, 더욱 타인을 밀어낸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존재는 결국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이대로 분열과 혐오를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라는 개념을 다시 회복할 것인가.
출산율을 끌어올리는 정책을 고민하기 전에,
우리는 서로를 혐오하고, 밀어내고, 무관심한 사회가 되어버린 현실을 먼저 직시해야 한다.
사람들이 가정을 꾸리는 것을 위험한 도박처럼 여기게 만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돈을 퍼부어도 변화는 없다.
매일 마주치는 편의점 점원에게
“감사합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한마디를 건네고,
집주인 어르신께
“어머님, 날씨가 춥네요. 여기 핫팩이라도 챙기세요.”라고 말하며,
전화 상담 중에도
“정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상담사님.”
이런 작은 말들이 쌓일 때,
서로를 향한 벽은 조금씩 허물어진다.
우리는 모두 아수라 백작처럼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경계하고 밀어내는 얼굴, 그리고 손을 내밀 수 있는 얼굴.
지금 이 순간에도,
아수라 백작의 얼굴은 점점 하나로 굳어져 가고 있다.
우리는 어느 얼굴을 선택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