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돈이 생기면 행복해질 거라 생각한다. 로또에 당첨되면, 하늘에서 돈이 뚝 떨어지면 하늘을 날아갈 듯 행복해질 거라 생각한다. 만약 돈이 있는데도 행복하지 않다면 가진 돈이 적지 않은지 생각해보라는 말도 있을 정도다. 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비록 막연한 생각이지었지만 돈이 생기면, 조금 더 많이 생기면 내가 행복해질 줄 알았다.
주식이 크게 오른 이후, 남편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 돈을 벌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해주며 주식의 꽤 많은 부분을 증여해 주었다. (세무사 사무소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하여 내 통장에 10억원어치 주식이 생기게 되었고, 이제는 남편의 계좌가 아니라 내 계좌에서 돈이 날 뛰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내 통장에 10억이 들어 있다니!
나는 단숨에 증권사 VIP가 되었다. 무슨무슨 수수료가 전부 면제되었고 증권사에서 말도 없이 선물을 보내주기도 했다. 이 돈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했다. 서울로 이사를 갈 수도 있지 않을까? 나 빼고 다 있는 것 같은 샤넬 가방을 살 수도 있지 않을까? 백화점 VIP가 되어보면 어떨까? 예쁜 외제차를 사볼까? 월세를 받는 건물을 사거나 배당주에 투자하고 은퇴를 해도 되지 않을까? 이 많은 상상을 전부 실현 시키고서 행복해졌으면 좋았으련만. 나는 그 무엇도 실현시키지 못했고, 급기야 우울해졌다.
......아프기도하고 심리적으로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없어서 계속 미루다가 더 미루면 안 될 것 같아서 시간을 내어 자리에 앉았다. 청소하고 정리하고 싶은 욕구가 계속 생기는 걸 보니 내 스스로 내 주변이 혼란스럽다고 느껴서 정돈된 상황, 통제가능한 상황을 만들어 내고 싶어하는 것 같다. 힘을 빼면 물 위로 천천히 떠오를 텐데 잘 되지 않는다. 물 속에 잠긴 기분. 일단 갑자기 큰 돈이 생겼으니까 공부를 해야지. 공부를 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니까 당장 급한 일은 조금 내려놓자. 수없이 많은 할 일에 압도되는 중. -모년 6월 9일 일기
......주식이 또 올랐다. 세상에. 또 다시 마음이 급해지려한다. 빨리 이 돈으로 무언가를 해야할 것만 같다. 나는 내가 언제나 준비되어 있기를 바란다. 돈을 이렇게나 벌었고 앞으로도 벌 예정인데 기뻐하기는커녕 자꾸만 그 다음을 생각하려한다. 일단 벌었으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충실하게 축하하고 즐기고 누리고 정리해야 하는데. - 모년 6월 26일 일기
한창 주식이 오르던 시절에 썼던 일기였다. 나는 돈을 원했지만 정작 그 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여실히 느꼈던 시기였다. 좋기는 했지만 심하게 놀란 나머지 내과에서 처방 받은 심계항진증 약을 먹어야 했다. 생각이 많아지니 잠이 오지 않았고, 이 돈을 잃지 않고 효율적으로 투자하거나 잘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짓눌렸다. 남편은 직장인으로서, 나는 아이를 키우는 주부로서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며 살았으나 결국 한 방에 찾아오는 큰 행운을 이길 수는 없다는 생각, 또한 이 행운이 온 것처럼 빠르게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무력감도 느꼈다. 사람들이 왜 영끌이니 한방이니하는 것에 매달리는지 이해하면서도 고통스러웠다.
누군가는 갑자기 생긴 돈을 반기고 기뻐했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나는 겁이 많았고, 나에게 돈이 생겼다는 사실을 남편 외의 사람에게는 함부로 공유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두렵고 힘에 겨웠는데 이럴 때에 어떻게 해야하는지 물어볼 곳도, 조언을 구할 곳도 없었다. 세상 무던한 남편은 그 돈이 있든 없든 별로 신경조차 쓰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해 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외로웠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나는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도서관에 쌓여 있는 수 많은 책 중에서 '갑자기 돈이 많이 생겨서 놀란 때 마음을 진정시키는 방법'이나 '갑자기 생긴 큰 돈 현명하게 저축하고 소비하는 방법' 따위의 책은 없었다. 물론 내 상태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이 있었지만 내가 발견하지 못했던 걸지도 모른다. 당시의 나는 지나치게 들뜨고 초조한 나머지 천천히 도서관의 책을 살펴볼 여유가 없었으니까.
나, 갑자기 돈이 되게 많아졌는데 어떻게 해야해요?
세상을 향해 묻고 싶었다. 나는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어제처럼 오늘도 살아가고 오늘 역시 내일처럼 살아갈 것이라 여기며 느리지만 차근차근 준비하며 나아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돈이 생겼으니 서울에 아파트, 외제차, 명품 가방을 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돈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평생 돈이라고는 써본 적도 없는 나는 백화점의 밝은 조명과 화려한 물건들의 향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
올영 세일을 즐기려고 노력해 보았다
백화점 쇼핑도 즐기려고 노력해 보았다
조급한 마음에 재태크 컨설팅을 해준다는 광고를 보고 연락을 했다가 엉뚱한 곳에 투자할 뻔 하기도 했다. 겁도 의심도 많은 나는 혹시 몰라 자세한 개인정보나 재산 상황을 알리지 않았는데, 서너 번쯤 '수업'이라는 걸 진행한 뒤 컨설턴트가 내게 100% 원금이 보장되면서 수익률까지 높은(무려 연 복리 20%이상) 투자처를 알려주었다. 어디에 투자해서 어떻게 수익을 발생시키는지 설명서하는 문서도 없고, 투자사의 재무 구조나 투자 현황도 알려주지 않고 그저 덜렁 투자금 대비 수익률과 100%원금 보장이라는 그림 한 장만 보내주며 수천만원을 투자하라 권했다. 그는 서너달 안에 미국이 금리 인하를 할 것이니 지금 투자하지 않으면 곧 수익률이 내려갈 것이라고 확언하기까지 했다.
세상에, 미국이 금리 인하를 한다니! 날고 기는 경제학자들도 확신하지 못하는 걸 그는 어찌 그리 확신했는지 모르겠다. 반드시 그렇게 될 거라는 확신이 나 같은 쫄보를 더욱 두렵게 한다는 걸 그는 몰랐다.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몇 달 뒤의 일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나는 주식이 미친듯이 뛰어오르는 모습을 보며 내가 세상 일을 절대 예측할 수 없음을 너무도 잘 알게 된 인간이었다.
어쨌든 당시의 나는 '압도되었다'는 표현에 아주 걸맞는 사람이었다. 예쁜 장난감을 선물 받았는데 이걸로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안절부절하다가 그냥 울어버리는 어리숙한 어린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살면서 여러 번 우울증을 크게 앓았다. 여러 번 상담 치료를 받았고, 나름대로 극복하며 살고 있었지만 이대로라면 다시 그 질척하고 어두운 우울과 무기력과 불안의 늪으로 빠져들 판이었다. 무엇이든 해야했기에 나는 자꾸만 밖으로 나갔다. 남들이 좋다는 것들을 하나씩 해나갔다. 차 마시며 책 읽는 건 집에서도 할 수 있는 데 왜 굳이 밖에서 해야하는가에 의문을 품지 않고 카페에서 좋아하는 책을 읽었다. 화장품이라는 건 어차피 다 상술에 불과하니 생긴대로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을 깨고 로션을 샀다. 일기장을 꺼내서 내가 돈이 생기면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나씩 적어나갔다.
나에게 찾아온,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행운일 것이 분명한 일을 겪고서도 우울증에 걸리는 바보같은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내가 이 상황을 타개해야겠다고 생각한 가장 큰 이유는 가족이었다. 나는 남편이 고생해서 벌어다 준 돈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싶었고, 아이들에게 뜻하지 않는 변화를 현명하게 극복해내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내 손으로 행복을 만들어야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