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아침부터 눈은 쉴 새 없이 내리고 있었다.
바람에 흩날린 눈발이 얼굴을 스쳤고,
밟은 발자국은 금세 묻혀 사라졌다.
온 거리가 하얗게 덮여도, 사람들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남자는 지방 유치원 난방 공사를 맡아, 며칠째 지하 보일러실에 묻혀 지냈다.
벽에는 습기가 맺혔고, 철관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장갑 속 땀 냄새가 손끝에 밴 채,
숨을 들이쉴 때마다 쇠비린내가 목에 걸렸다.
오늘로 공사는 끝이었다.
저녁이면 서울로 돌아가야 했다.
“야, 오늘 진짜 끝나냐.”
동료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남자는 웃으며 대꾸했다.
“안 끝나면 그냥 여기 눌러앉자.”
짧은 웃음이 스쳤다가 금세 눅눅한 공기에 묻혔다.
그 순간,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며칠 사이 교실 앞을 오가며 몇 차례 스쳐 지나간 얼굴.
창문 너머로 보이던 미소가
희미한 빛처럼 마음에 남았다.
그때, 틈새로 아이들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드릴 소음이 귀를 때릴 때조차
그 웃음이 겹쳐 들렸다.
창문 너머 그녀는 아이들 사이에서 누구보다 쾌활했다.
노래를 따라 부르며 손을 잡아주고,
아이들의 눈을 맞출 때마다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그러나 아이들 무리가 흩어지고,
타인의 그림자가 스치면 그 활기는 금세 사라졌다.
짧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거나,
어색한 듯 시선을 피하곤 했다.
남자는 그 변화를 오래 바라보았다.
짧은 인사에 붉어진 볼을 보고,
정작 눈을 피한 건 자신이었다.
그녀 앞에서는 일꾼의 손이 유난히 거칠어 보였다.
농담을 잘 던지던 입도
그녀 앞에서는 번번이 막혀버렸다.
그녀 또한 눈길이 마주칠 때마다
가슴이 미세하게 떨렸다.
웃음을 거두고 잠시 숨을 고르며,
자신도 모르게 말을 아꼈다.
아이들과 있을 때는 밝고 환했지만,
그의 그림자가 문가에 닿는 순간
마음 어딘가가 흔들렸다.
공사가 끝나고,
남자는 가방을 둘러메고 곧장 떠날 채비를 했다.
교실 앞을 두세 번 오가며 인사를 해볼까 망설였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창문 너머로는 아이들 노랫소리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볼까…
아니야, 괜히 어색해지겠지.’
그는 몇 번이나 발을 뗐다가
결국 한숨과 함께 돌아섰다.
택시 창문에 머리를 기대자
눈송이가 쉼 없이 부딪혔다.
유리 위로 번진 얼룩마다 교실 창문이 겹쳐졌다.
아이들과 웃던 얼굴,
낯을 붉히며 고개 숙이던 모습.
‘다시는 못 볼 수도 있겠구나.’
그 생각이 묘하게 가슴을 눌렀다.
금세 따뜻해지던 손끝이
다시 서늘해졌다.
그녀는 아이들을 보내고 교실을 정리했다.
작은 책걸상들을 제자리에 밀어 넣고,
장난감 상자를 덮어두었다.
아이들이 흘린 크레파스 한 토막이
책상 모서리에서 굴러 떨어졌다.
정리를 마친 뒤, 그녀는 복도로 나섰다.
양쪽 끝을 두리번거렸지만 어디에도 인기척은 없었다.
발소리만 조용히 울렸다.
적막이 오히려 더 크게 번지는 듯했다.
그 순간, 원장이 흘끗 보며 무심히 말했다.
“공사하던 분들? 아까 다 끝내고 서울로 갔어.
나한테만 인사하더라고.”
그 말이 그녀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손끝이 얼어붙듯 굳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정말 그냥 가버린 거야?’
숨이 막히듯 가슴이 조여 왔다.
망설일 틈도 없이 외투를 걸치고 문을 열었다.
눈발은 거세졌고,
발은 눈 속에 잠겨 무겁게 느려졌다.
차가운 공기 사이로 먼 커피 향이 희미하게 스쳤다.
눈발 사이로 들려오는 매캐한 연기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그의 흔적이라도 찾을까,
눈 속 길을 따라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마음은 눈보다 먼저 녹아내리고 있었다.
버스 터미널에 닿았을 때,
그녀는 더 이상 다리를 내디딜 수 없을 만큼 지쳐 있었다.
젖은 신발 속 발가락이 얼어붙은 듯 저릿했고,
손끝에는 차가운 바람 대신
아직 식지 않은 마음이 남아 있었다.
온몸이 오직 ‘늦기 전에 닿아야 한다’는 마음 하나에 매달린 듯했다.
터미널 안에는 휘발유 냄새와 젖은 천 냄새가 섞여 있었다.
바닥의 고무 타일은 미끄럽고 차가웠다.
매표소 유리창 너머로 하얀 김이 뿜어 나왔다.
그러나 출발장은 이미 비어 있었다.
버스가 떠난 자리엔 매캐한 매연 냄새만 남아
공기 속에 천천히 흩어지고 있었다.
덩그러니 놓인 의자와
깜빡이는 안내판 불빛만이 남아 있었다.
곧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서울행 막차, 방금 출발했습니다.
금일 기상 악화로 인해 남은 배차는 모두 취소되었습니다.”
멀리서 울려오는 메아리처럼,
귀에 와닿지 않는 소리였다.
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버스가 떠난 자리, 그 빈 공간이
자신을 향한 대답처럼 느껴졌다.
눈은 끝없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삶은 끝내 쌓이지 못했다.
며칠 뒤, 유치원으로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안에는 아이가 두고 간 낡은 크레파스 한 토막이 들어 있었다.
짧은 메모에는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봄이 오면.”
그녀는 편지를 오래 쥔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겨울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지만,
그 문장은 희미한 불빛처럼
가슴 깊은 곳을 조용히 덥혀 주었다.
그녀는 창가에 편지를 올려두었다.
눈은 여전히 내렸지만,
그녀의 마음에는
눈보다 먼저 봄이 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