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UIUX 디자이너 현실

스타트업이라서, 라는 말이 덮는 것들

by 연니

나는 UIUX 디자이너로 입사했다.

화면을 설계하고, 사용자 흐름을 고민하는 일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제 UI는 AI가 다 하지 않나요?

어느 날부터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 말 자체는 틀리지 않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 말은 기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디자이너의 필요성을 낮추는 방향으로 사용된다. AI는 도구인데, 그 도구가 사람을 줄이는 명분이 된다.



역할은 확장되는 게 아니라, 무너진다

기획을 하고, 개발을 하고, 퍼포먼스 마케팅을 배운다. 여기까지는 “스타트업이라서”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역할이 확장되는 조직은 각 역할의 목적이 명확하다.


역할이 무너지는 조직은 비어 있는 일을 그때그때 채운다. 누군가는 해야 하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일들이, 가장 손이 닿기 쉬운 사람에게 쌓인다. 그 과정은 종종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이 서비스는 00님이 제일 잘 알아야 해요

겉으로 보면 기대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 말에는 전제가 빠져 있다.


왜 한 사람만 그래야 하는가.


스타트업에서 서비스 이해는 팀 전체가 가져가야 하는 것이다. 그 책임이 특정 개인에게 집중되는 순간, 그건 기대가 아니라 책임의 전가다.


결정권은 위에 있고, 책임은 아래에 있다. 그 사이에서 ‘총 책임’이라는 말은 생각보다 가볍게 사용된다.


PM은 있는데, 책임은 아래로 흐른다

우리 팀에는 PM님이 계신다. 하지만 역할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 역할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방향은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고, 의사결정은 끝까지 책임지지 않는다. 그렇게 정리되지 않은 일들이 실행 단계로 그대로 내려온다. 그리고 그 일들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흘러간다. 누군가는 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과정이 일시적인 게 아니라 반복된다는 데 있다. PM이 해야 할 정리와 판단의 영역이 점점 아래로 내려오고, 결국 실행하는 사람이 그 역할까지 함께 떠맡게 된다.


그렇게 되면 역할은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겹쳐진다. 디자이너는 디자인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획을 보완하고, 흐름을 정리하고, 때로는 결정되지 않은 방향까지 대신 판단해야 한다.


이건 다양한 경험을 한다는 의미의 ‘확장’과는 다르다. 원래 존재해야 할 역할이 비어 있고, 그 공백이 특정 개인에게 반복적으로 쌓이는 구조에 가깝다.




스타트업이라는 말이 모든 걸 설명하지는 않는다

역할이 없는 것, 기준이 없는 것, 방향이 없는 것까지 “스타트업이라서”로 덮어버리는 순간, 그건 환경이 아니라 방식의 문제가 된다.


나는 지금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기 위해 일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이미 대체되어도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서 무언가를 처리하고 있는 걸까.


오늘도 나는 디자인에 대해 고민하기보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