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제 9개월쯤 지난
미뤄도 너무 미뤄둔 글을 이제야 써서 좀 멋쩍지만, 친구들과 각자 또 함께 여행한 기억이 애틋할 만큼 소중해서 그 시간을 추억할 겸 마치지 못했던 글을 완결하기로 했다.
그런데 내가 부산여행을 언제 다녀왔더라...?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갤러리를 뒤졌다. 2022년부터 쭈욱 내려왔다. 그리고 겨우 찾아냈다.
2023.7.7~2023.7.9.
지금은 2024.3.30.이다. 하하. 기억을 되살려 지난 여름으로 잠깐 다녀오기로 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이 여행이 시작된 계기. 바로 사직야구장. 부산이 고향인 친구 A의 사랑, 롯데 자이언츠를 응원하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야구장은 처음이라서 기대되면서도 떨렸다. 사람이 와글와글, 응원가와 함성이 고막을 채우는 공간을 내 몸이 견딜 수 있을지 걱정됐다. 근데 뭐, 안 해보면 모른다. 친구들과 직관, 나도 너무너무 가보고 싶었기 때문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경기가 다섯 시 시작이라, 우리 셋은 네 시 반쯤 야구장 앞에서 모이기로 했다. 재밌는 점은 모두가 각자 시간을 보내다가 야구장에서 보기로 한 것. 보통 여행지에 친구와 함께 있다면 같이 움직이기 마련인데 우리는 줏대 있게 각자 할 일 하다가 만났다. 이것도 너무 좋았다.
서울에 살면 바다를 볼 일이 없다. 그래서 서울촌년인 나는 바다를 꼭 봐야만 했다. 역시나 비가 내렸지만, 첫째날 만큼 쏟아진 건 아니라서 이동에 큰 불편은 없었다.
나의 계획은 이랬다. 해운대 쪽으로 나가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브런치를 먹고, 광안리 쪽 책방에 들렀다가 야구장에 가기. 결론적으로는 계획을 모두 이룬 알찬 하루였다.
아침 무렵,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바다. 흐린 하늘엔 해가 뜨지 않아 흐릿하고 공기는 무지근했다. 해변을 따라 숙소에서 미리 찾아놓은 브런치 카페로 걸어가며 무거운 바다냄새를 맡았다. 카페 앞에 도착하고는 잠깐 멈춰 서서 바다를 봤다. 바다는 어쩜 이렇게 커다랄까. 지나치게 큰 나머지 모든 존재를 다정히 감싸줄 것만 같다. 맑은 날씨에 윤슬이 화려하게 빛나는 바다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까만 밤바다도, 비가 내리는 날의 무거운 바다도 모두 좋아한다. 압도되는 느낌이 두렵지 않고 평안하다. 얕은 비를 맞으면서 나와 똑같이 얕은 비를 맞고 있는 바다를 바라보다가 카페로 들어갔다.
바다를 바라보며 식사할 수 있어 좋았다. 맛도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바깥으로 나오면서 건물의 외관을 다시 한 번 힐끗 살펴보다가 내가 다소 끔찍해하는 문구를 발견했다. ‘노 키즈 존’. 바다는 모든 이를 포용할 수 있을 만큼 너른 품을 가지고 있는데, 그 앞의 사람들은 어떤 존재는 배제한다. 노 키즈 존인 줄 알았으면 안 왔을 텐데, 에잇. 그러나 이미 나는 그곳에서 밥을 먹고 나온 후니 어쩔 수 있나.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고.
나는 책방으로 가기 전에 친구들을 만나면 건넬 소소한 선물을 사러 해운대 인근의 편집샵을 몇 군데 돌았다. 솔직히 다 그저 그랬지만 꼼꼼히 살피며 친구들과 어울릴 만한 스티커 따위를 하나씩 발굴했다. 소품샵을 나와서는 택시를 타고 책방으로 향했다.
책방의 이름은 ‘우연한 서점’. 이곳에선 ‘나이책’을 판다. 아마도 사장님이 직접 큐레이팅했을 책장 한 편에는 크래프트 포장지로 싸여 아무런 정보도 확인할 수 없는 책들이 줄 서있다. 대신 숫자가 하나씩 적혀 있다. 19, 25, 30, 34.... 나이에 따라 책을 고르면 어떤 책이 나올지 두근대는 마음으로 포장을 풀어본다. 참 재미있다. 선물하기에도 좋다. 실은 멀리 사는 친구에게 줄 선물을 사러 이곳까지 왔다. 30, 나는 30을 골라 손에 쥐었다. 어떤 책이 그에게 닿을지, 궁금했다.
우연한 서점이 좋은 또 다른 이유는 책을 읽을 공간이 마련되어있다는 점이다. 당시 나는 매달 도서 리뷰를 써야 해서 책을 항상 지니고 다녔다. 그날도 마찬가지. 나는 약속시간 전까지 조용히 책을 읽을 수 있는 장소를 찾고 있었는데, 굳이 움직이지 않아도 되었다. 차를 한 잔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책을 읽었다. <마이너리티 디자인>. 책에 대한 리뷰도 브런치에 업로드되어 있으니 한 번 살펴보시길. 좋은 책이다.
약속시간이 다가와 사직야구장으로 이동했다. 인파가 어마무시했다. 친구들 찾기도 쉽지 않았다. 우리는 닭강정을 사서 들어가 먹기로 했는데, 비가 내려 닭강정이 포장된 상자는 젖어들고, 정신없이 자리를 찾아갔는데 당연히도 좌석에 물이 흥건했다. 뭔가 엉망진창인 느낌이라 더 재미있었다. A와 B는 만날 때마다 선물을 소매넣기하는 못된(?) 습관이 있는데 역시나. 그들은 자리에 앉아 주섬주섬 선물을 꺼냈다. 나도 아주 작은 선물을 건넸다. 우산, 비, 좌석 사이로 지나다니는 사람들. 그 혼란함 속 다정함이 웃음을 이끌어냈다. 인상깊은 장면이다.
야구는 확실히 직접 보니 더 재미있었다. 여기저기 볼거리가 잔뜩이라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르게 휙휙 지나갔다. 그런데 이제.... 경기력이 좋지 않아서 우리는 경기장의 분위기를 즐기다가 중간에 빠져나왔다. 사실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도 많이 나왔다.... 여담이지만 나는 올해 롯데를 응원하기로 했다. 롯데 자이언츠 파이팅! 여하튼 우리는 경기장을 나와서 유니폼을 입고 네컷 사진도 찍었다. 참으로 귀여운 친구들이다.
우리는 또 쿨하게 각자의 길을 갔다. 나는 곧장 숙소로 갔다. 행복한 하루였지만 몸이 지치는 건 별 수 없다. 편의점에서 간식거리를 사서 방으로 들어간 뒤, 바로 씻고 나와 침대에 누웠다. 그 안락함, 편안함, 그리고 충만함이란. 나는 책을 조금 읽다가 잠을 잤다.
여행을 끝마칠 시간이 왔다. 서울에 너무 늦지 않게 도착해야 퇴근길 인파에 치이지 않을 것 같아 점심 표를 끊었다. 부산에서의 마지막 끼니를 무어로 채울까 고민하다가 또 다시 초밥을 먹기로 했다. 바다 왔으면 생선 먹어주는 게 나름의 관습 아니겠는가. 오마카세가 한창 유행이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오마카세로 나오는 음식의 반쯤은 남길 것 같아서 오마카세 초밥집에 갈 돈으로 회전초밥집에 갔다. 비싼 접시만 쏙쏙 골라 먹었다. 열 피스 정도 먹고 나와 계산을 했는데, 저렴한 가격대의 오마카세와 비슷한 금액이었다. 만족스러웠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먹을 수 있었으니. 주인장이 내주고 싶은 대로 먹는 것보단 역시 내가 먹고 싶은 대로 먹는 게 적성에 맞았다.
열차를 타기까지 시간이 떠서 나는 마지막 날에도 책을 읽을 만한 조용한 카페를 찾았다. 그런데 마치 운명처럼 부산역 건너편에 ‘창비 부산’이 있었다. 창비에서 운영하는 서점이랄지, 도서관이랄지. 옛 백제병원 건물 2층에 자리한 널찍한 공간에 들어서니 기분이 무척 좋았다. 창비 회원가입만 하면 이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책을 읽다가 열차를 타러 갔다.
열차에서는 눈을 감고 있다가 책을 읽다가 했다. 옆자리에 초등 저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탑승했는데, 아주 멋진 공룡 모형을 가지고 있었다. 되게 큰 모형이었다. 품에 공룡을 안고서는 스마트폰으로 생물에 관한 다큐멘터리 같은 것을 보고 있었다. 말을 걸어보고 싶었는데, 아이가 집중해서 영상을 보고 있기도 했고, 혹여나 부담스러울까 입을 닫았다.
아이와 가족이 내릴 때쯤이 돼서는 아이가 부모님에게 스마트폰을 반납했다. 할 거리가 없어진 아이가 공룡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보다가 눈이 마주쳐서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고 꼭 하고 싶었던 말을 한 마디 했다. “공룡이 엄청 멋지네요!” 그러자 아이가 반색하며 의기양양하게 공룡 모형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책을 무려 백 육십 권이나 읽어서 스스로 쟁취해낸 공룡이었다. 열차가 정차하고 아이가 자리를 나서는 마지막 순간에 그에게 대단하다고 말하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아이와 웃으며 인사했고, 옆 자리는 고요해졌다. 아이와 대화할 수 있는 기회는 귀하다. 몽실몽실 행복한 마음으로 부산여행을 마무리했다.
여행에서의 사진들을 돌아보며, 그때 적었던 메모들을 읽으면서 글을 쓰니 그때의 감정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기분이다. 충만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느낌이다. 글을 쓰는 지금 마음이 충만해졌다. 추억은 이렇게 그 다음의 시간을 충만하게 만든다. 여행기를 마무리하길 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