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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비 Dec 28. 2018

그레이트 오션 워크 5

트레킹 5일 차 (8월 4일)


: 리얀스 덴 캠핑장 - 렉 비치 주차장 11km    


길은 바로 지금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지금 딛고 서 있는 이 자리, 이 현실이 길의 시작점이다. 바로 지금 내가 처한 처지와 입장이 출발의 토대이다. 현실을 직시하고 여기서부터 길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때가 아니었기에 그저 생각만 했던 꿈들. 첫 발을 내딛는 순간 그 꿈이 실현된다.    

아침 해가 밝아온다. 이곳은 계절상 겨울이라 7시는 되어야 해가 뜬다. 화장실에 앉아서 정면의 사각 프레임 창으로 바라보는 일출이 한 폭의 그림이다. 훈제오리 덮밥으로 아침 요기를 하고 커피 한잔을 내려 마셨다. 오리의 느끼함을 원두커피가 완벽히 잡아준다. 이번 여행의 커피 담당이셨던 김 교수님이 워낙 커피 애호가라 여러 가지 커피를 다양하게 준비해오셨다. 덕분에 호주에 와서 맛 좋은 커피를 즐긴다.     


- 오늘도 나는 걷는다 -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 오늘도 화창한 날씨로 하루를 시작한다. 호주의 겨울 날씨는 정말 매력적이다. 미세 먼지의 ‘미’ 자도 만날 수 없다. 코끝에 닿는 공기는 알싸하고 드맑다. 발바닥에 닿는 대지는 부드럽고 촉촉하다. 걷기에는 최적의 환경이다. 눈앞의 전경도 시원시원하다. 고개를 들면 검푸른 바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 망망대해. 눈을 돌리면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푸른 초원, 지평선. 그 아름다운 길을 오늘도 나는 걷는다.   

  

오늘 걷기 여행의 목표 지점은 렉 비치(Wreck Beach) 카 파크. 걸어야 할 거리는 대략 11 km. 반나절 거리밖에 되지 않는 짧은 거리다. 단 텐트와 침낭을 모두 지고 걸어야 한다는 점이 부담이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리얀스 덴(Ryans Den) 캠핑장과 데블스 키친(Devils Kitchen) 캠핑장은 도로 접근이 어려운 곳. 여러 가지 방안들을 놓고 머리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고민을 거듭했다. 방법 1은 6.6km를 왔던 길로 돌아가서 짐을 맡기고 되돌아오는 것. 왕복 13km가 추가된다. 방법 2는 그냥 배낭을 메고 11km를 전진하는 것.   

  

다음 날도 문제였다. 데블스 키친에서 야영할 경우, 다음 날 렉 비치 카 파크까지 되돌아갔다 오는 왕복 5km를 일정에 추가해야 한다. 결국 채택한 최종 방법은 렉 비치 주차장에서 그냥 하루 노숙하고, 다음 날 짐을 모두 짐차에 맡기고 가벼운 채비로 마지막 목표지점 12 사도 바위까지 걷는 것이었다. 멜버른으로 돌아갈 픽업 차량과는 오후 2시에 만나기로 되어 있어 시간에 맞출 수 있을지 남은 거리가 부담이었지만 짐이 없다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그리하여 오늘은 렉 비치까지만 걷고 예약된 ‘악마의 부엌’ 캠핑장이 아니라 렉 비치 카 파크에서 야영을 하기로 했다. 이거야말로 길 위에 머무는 진정한 비박 노숙이다. 결코 ‘악마의 부엌’이 무서워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하하. 배낭은 무거웠지만 가야 할 거리가 짧아서 마음이 여유롭다. 걷다가 벤치가 나타나면 놀며 쉬며 걷는다. 달빛 머리(Moonlight Head)라는 곳을 막 지난 지점에서 왈라비와 다시 한번 조우했다. 서로 노려보며  눈싸움을 벌이다가 조심스럽게 다가가며 사진기를 들이대는데 왈라비는 관심 없다는 듯 겅중겅중 어디론가 가버린다. 잘 가라, 왈라비!     


- 우리의 보물창고 -    


여행은 스포츠가 아니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가장 많은 이윤을 남겨야 하는 장사가 아니다. 기록을 단축해야 하는 의무도 없고,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 조바심을 낼 필요도 없다. 여행의 미완성은 미완성인 채로의 의미를 갖는다. 길을 돌고 돌다가 설령 길을 잃게 된다고 하더라도 하등 슬퍼할 까닭이 없다. 그로 인해 여행은 분명 더욱 값지고 특별한 추억으로 남게 될 테니까. 인생도 여행처럼 가끔은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흘러가는 대로 두고 볼 필요가 있다.     

게블스 카 파크(Gables Car Park)를 지난다. 이곳은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절벽 위에 전망대(Gables Lookout)가 있어 관광객들이 더러 찾는 곳이다. 이제 렉 비치까지 남은 거리는 1.2 km. 급할 게 없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길을 나선 끝에 드디어 렉 비치(Wreck Beach) 카 파크에 도착했다. 여름에는 렉 비치에 놀러 오는 관광객들이 제법 많다고 한다. 사실 주차장이라기보다는 막다른 길이라 차를 돌려나가는 회차지에 더 가깝다. 겨울이라서인지 다른 차들은 전혀 보이지 않고 우리 보물창고만 덩그러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물을 끓여 점심부터 해 먹었다. 우리가 캠핑장도 아닌 이곳에서 야영할 용기를 낸 것은 모두 물이 확보되어 있는 덕분이다. 우리 보물창고는 짐차이면서 우물이고 냉장고다. 장비며 물이며 식량이 그 안에 다 있다. 라면을 맛있게 끓여먹고 렉 비치 산책에 나섰다. 오늘의 걷기 여행은 모두 마쳤다. 오후에는 해변에서 마음껏 놀고 쉬면서 시간을 보내면 된다.   

  

- 추억 한 조각은 남았으니 -  

  

렉(Wreck)은 난파선이라는 뜻이다. 이곳 바닷속에는 암초가 많아 해안을 지나는 배들이 난파하는 경우가 많아서 ‘렉 비치’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물이 빠지면 바위에 박혀 있는 난파선의 커다란 닻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파도가 제법 거세다. 물은 거의 만조에 가깝다. 파도가 밀려오다가 저 앞에서부터 바위에 부서지며 포말을 일으킨다.     

주택 씨는 자연산 전복을 잡아보겠다며 바위를 뒤지고 다니고, 신 단장님과 김 교수님은 다시마와 해초를 뜯는 일에 몰입해있다. 나와 성철님과 이장님은 모래사장에 돗자리를 펴고 누워 망중한을 즐겼다. 지금 서울은 폭염에 이글이글 끓고 있다지. 우리는 겨울 나라에 와서 겨울 바다를 보며 바닷가에 누워있다. 지구 반대쪽에서 즐기는 멋진 피서 여행이다.  

   

렉 비치에 황혼이 진다. 잡아온 다시마와 해초 그리고 보말 비슷하게 생긴 고동을 손질했다. 단장님이 열심히 씻고 다듬어 냄비에 담아낸다. 호주의 바다 생물에서는 무슨 맛이 날까? 한참을 끓이다가 맛을 본다. 기대보다 맹탕이다. 간이 맞지 않다. 교수님이 숙소에서 챙겨 온 야채수프 건조 조각 세 덩이를 풍덩풍덩 넣어버린다. ‘에구, 한 개만 넣으시지.’ 이제 너무 짜다. 짜서 혀를 댈 수가 없다. 망했다. 고동을 빨아보니 모래가 씹힌다. 해감을 안 한 탓이리라. 렉 비치에서의 수고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들 어떻고 저런 들 어떠랴. 잊을 수 없는 추억 한 조각은 남았으니 그걸로 족하다.       

해초와 다시마는 건져내서 저녁 메뉴인 육개장에 넣어먹었다. 즉석 건조 육개장의 건더기가 풍성해진다. 고사리와 어울린 해초의 씹는 맛이 아주 일품이다. 얼큰하고 시원한 육개장 국물에 속이 확 풀어진다. 저녁을 먹고 나서는 할 일이 없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은 일찍 일어나서 새벽에 일찍 출발해야 한다. 마지막 밤이다. 벌써 마지막이라니. 그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이대로 며칠 더 걸어도 좋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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