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뭔지 모르겠지만 감정이 요동쳐서 잊고 자려고 누워도 그 요동침이 점점 커져서 불안이 나 외로움이나 슬픔이라는 단어로 연결되는 날. 진짜 감정은 그게 아닐 텐데 무언가 힘든 일이 있었나 보다 싶은데 확실히 무언가를 정의 내리지 못하는 그런 날 말이다.
그럴 땐 나는 그대로 앓는다. 어떠한 정의를 내리지도 않고, 끝나겠지 하며 잠을 못 자서 밤을 세기도 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하루를 살아도 마음속은 괜히 공허해서 집에 와서 운 적도 있다. 참다 참다가 생각나는 사람이 있으면 전화를 해보지만 막상 내가 지금 이런 상태라고 말은 하지 않고 간단한 안부가 전하고 끊거나, 연결이 되지 않을 때에는 지금은 혼자 앓아야 하나보다 하고 넘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결국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혼자 앓아야 하는 일이라는 걸 매번 알게 될 뿐이다.
2.
아침저녁 선선한 바람이 느껴지는 걸 보니 가을이 드디어 가까이 왔다 싶다. 낮은 여전히 덥고, 습하지만 불어오는 바람 속 약간의 선선함이 계절의 변화를 알게 하는 것 같아서 괜히 마음이 살랑살랑 거린다.
가을은 내가 항상 좋아하던 계절이었다. 아니 지금도 가을이라는 계절이 좋아서 가을에 꼭 해야 하는 리스트 같은 것들이 있을 정도이고, 누군가에게 나는 가을이었기도 하고, 어떤 이는 나에게 가을이기도 했다. 딱히 강렬한 기억 따윈 몇 개 없지만 왠지 모르게 가을은 항상 꽉 차있는 기분이 들어서 매번 기다리고 즐기는지도 모르겠다.
왜 이렇게나 가을일까?
생각해 보면 가을은 나에겐 한 템포 쉬어가는 계절이었던 것 같다. 몸은 바쁘더라도 마음은 쉴 수 있는 계절.
더위도 한 풀 꺾이고 너무 덥지도 너무 춥지도 않은 그 선선함이 주는 상쾌함이 있으니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도 좋고, 사람들을 만나도 항상 좋았던 기억이 가득하기도 했으니까.
물론 너무 혹독해서 힘들었던 기억의 가을도 있어 몇 해 동안 가을이 되면 몸이며 마음이며 앓아서 고생을 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가을이 오는 이 길목이 좋은 걸 보면, 이번 가을은 좋은 일만 가득하지 않을까 싶어 괜히 기다려지고 좋기만 하다.
3.
엄청 신나고 즐거운 글들을 쏟아내고 싶은데, 막상 내 삶은 너무 잔잔해서 마냥 신나고 즐거운 무언가를 쏟아내기엔 역부족인가 보다 싶다. 일기를 쓴 지도 너무 오래되기도 했고, 막상 일기장을 펼치면 써야 할 이야기가 뭐가 있나 생각해 보느라 시간을 다 보내기도 한다.
삶은 감사하게도 평온하고 잔잔하다. 자잘한 문제는 누구에게나 있으니 신경 쓰지 않고 현재에 집중하며 사는 그 평범하고도 어려운 걸 요즘하고 산다. 가끔 무기력해져서 침대와 한 몸이 되어 뒹굴거리기도 하거나, 감정이 요동치는 날을 보내기도 하지만 전반적인 삶 자체가 잔잔함 그 자체다.
웃음은 원래 많았는데 더 많아지기도 했고, 그만큼 눈물이 많아진 것이 나름 문제라면 문제이지만. 잔잔함이 익숙해져서 다가오는 어떤 일들 앞에서 무너지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힘들어도 웃고, 슬퍼도 괜한 웃음으로 넘어가고 참는 것보다 표현하고, 명확하게 혹은 명확하진 않더라도 나를 보호할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신나고 즐거운 일들도 올 것이고, 아프고 쓰린 일들도 오겠지만 적어도 눈을 감을 때 '행복했다.'라고 스스로 되뇔 수 있기를 바란다. 적어도 나의 끝이 허무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