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구들아, 내가 먼저 암환자가 되었네 / 1부 : 일단 버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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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저녁 식사를 마친 후, 큰 딸이 갑자기 엄마 아빠에게 밀크티를 만들어주겠다고 하더군요. 식사 시간 내내 엄마에게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아빠의 방사선 치료 기간 중에, 엄마 대신 집 안 일을 꼼꼼히 챙겨야 하고, 반려견도 잘 신경 써 줘야 한다는 잔소리 같은 당부를 들었음에도 말이죠. 이제 성인이 되고 철이 들어서인지, 의식적으로 더 잘하려는 모습이 기특했습니다.
딸은 주방 서랍에서 홍차 티백을 꺼내 놓고는 한참을 이리저리 만지다가 저에게 선택권을 주었어요.
"세 종류가 있으니 아빠가 어떤 향이 좋은지 맡아보고 골라주세요."
저는 연기하듯 다소 과장되게, 하나씩 들어 코에 대고 맡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커피 광고 모델처럼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답했죠.
"음, 역시 향기 좋네 ~"
순간, 아내가 놀라고, 이어 딸도 멈칫했어요. 아차 싶은 표정이었어요. 얼굴에 미안함이 역력했어요. 며칠 전 알게 된 사실을 잠깐 잊었던 모양이에요. 뭐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음을 잘 알기에, 웃으며 괜찮다고 했습니다.
초보 암환자 가족의 흔한 실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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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은, 수술을 집도했던 신경외과 교수님을 만나는 첫 번째 외래 진료일이었어요.
수술이 잘 되었다는 말씀과 함께 간단한 경과 설명을 들은 후, 조심스럽게 지난 한 달 여 동안 내내 궁금했던 걸 질문했어요.
"그럼, 제 후각은 아예 잃게 되는 건가요?"
신경외과 의사 선생님은 감정을 싣지 않고 사실대로 답해주셨습니다.
"네, 이제 후각은 없습니다. 제가 다 잘랐어요.",
"뇌에서 나오는 신경은 모두 12개인데요. 각 각 번호가 붙어있어요. 그중 후각신경은 맨 앞에 있는 1번이고 쌍으로 되어있는데요. 이번 수술에서 제가 둘 다 잘라냈습니다."
"휴..."
"그럼, 미각은 어떻게 되나요? "
"미각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데, 평소에 느끼는 미각이라는 게 후각이 포함되어 있는 감각이에요. 그래서 미각 자체를 상실한 것은 아니지만, 평소에 느꼈던 미각 중에서 후각과 관련된 부분이 없어지니까, 본인 스스로는 미각도 없어진 것으로 느낄 수는 있어요. "
암세포가 발생한 곳이니 제거하는 것이 당연하겠죠. 제 상식으로도 그러니까요. 예상을 못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충격은 꽤 컸습니다.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시킨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아쉬움은 컸습니다.
얼마 전 본, 한 의사분의 인터뷰가 떠올랐어요.
수술 시 완벽한 종양 제거가 정말 중요하지만, 환자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지 않게 하기 위한 코 기능의 보존도 중요하기에, 이비인후과 교수와 신경외과 교수가 수술 중에도 끊임없이 함께 논의하고 고민한다고 하더군요.
저 역시 유능한 이비인후과 교수님과 신경외과 교수님 덕에 뇌를 열지 않고 코를 통한 내시경 수술로 종양을 제거할 수 있었고, 긴 시간의 재건 수술을 통해 이전과 큰 차이 없는 외모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담당 교수님들께는 너무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 저의 상태에 대해서도, 이 정도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후각 상실의 아쉬움은 또 다른 문제더군요.
인간의 주요 감각은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이고, 그것을 '5감'이라고 하지요. 저는 이제 불완전한 '4감' 인간이 되었습니다. 5감 중 하나인 후각이 사라졌고, 또 다른 하나인 미각은 불완전한 상태가 되었지요. 후각이 없다는 건, 가스 누출, 화재 등의 위험 상황을 감지할 수 없고 상한 음식을 가리지 못해 식중독에 이를 수 있는 등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지요. 꽃 향기, 음식 향기처럼 좋은 향기를 느낄 수 없는 건 물론이고요.
물론 제가 생각해도, 시각, 청각 상실에 비하면 훨씬 덜 고통스러운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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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된 이성으로 아쉬움의 감정을 삭여가던 어느 날, KBS 다큐멘터리 <자연의 철학자들>이란 TV 프로그램을 통해 한 스님을 알게 되었어요. 산에서 38년간 수행하고 있는 육잠 스님이신데요, 스님은 현재 경상북도의 깊은 산골, 10평 남짓한 작은 암자에서 홀로 기거 중이셨어요.
그곳에서 스님은 먹고, 입고, 생활하고, 뭐든 자급자족하며 살고 계셨어요. 암자 앞 텃밭에서 배추, 무, 시금치, 고구마 등 온갖 채소를 키우고, 그것으로 식사를 하시고요. 겨울을 앞두고는 김장을 담그고, 땔감을 준비하고, 창틀에 창호지를 바르는 일을 모두 직접 하시네요. 바느질하고 있는, 소매 자락에 덧댄 흔적이 가득 한 승복은 입은 지가 한 20년은 됐을 거라고 얘기하십니다.
쉬지 않고 일하며, 대부분 자급자족하며 수행하는 스님의 삶 속에서 제 눈에 띈 장면이 있었어요. 스님은, 바닥이 거의 드러난 쌀 독을 보며, "한 다섯 되 정도 있나?, 그래도 석 되 보다 부자잖아요." 하며 허허 웃으시더군요.
후각 상실과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각 상실 걱정에 괴로워하는 저 들으라고 하는 말 같았어요.
암자 벽면엔 이런 글귀도 적혀 있었어요.
'불편한 대로, 없는 대로'
스님은 이런 말도 덧붙이셨어요.
"비우고 살면 훨씬 사는 게 쉬워요. 채우다 보면 자꾸 채우려 하는 본능이 생깁니다. 계속 채우다 보면 그냥 무게에 못 견뎌가지고 쓰러진다니까. 그 무게에 못 견뎌가지고."
맞습니다. 스님 말씀대로, 제가 잃어버린 것에 미련을 갖는 건 본능이겠죠. 하지만 본능에 매몰되어선 다시 쓰러질지 모릅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삶을 살아야겠죠? 미련을 갖지 말고.
� 많은 걸 잃고도,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라고 한 이순신 장군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