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구들아, 내가 먼저 암환자가 되었네 / 1부 : 일단 버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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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의사는 병을 치료한다.
하지만 위대한 의사는 그 병을 지난 환자를 치료한다.
윌리엄 오슬러 (William Osler ; '현대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미국 존스 홉킨스 병원 설립에 기여한 4명의 교수 중 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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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선 치료 31회를 마치는 날, 정장을 제대로 차려입고 병원에 방문했습니다. 다른 날은 외모에 전혀 신경 쓸 여력이 없었죠. 떡진 머리에 두꺼운 패딩 점퍼 하나로 '개근'만 신경 썼으니까요. 하지만 이 날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아니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의미 있는 날이었으니까요. 전 이날을 '항암대학교 방사선과 졸업식'으로 이름 붙였습니다.
제 생애 이런 졸업은 없었어요.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마쳤다'는 후련함이 이렇게 큰 적은 처음이었어요.
방사선 치료를 마쳤다고 암이 완치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저 스스로 '졸업'의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칭찬도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간 힘들었지?, 고생했다. 이제 힘차게 새 출발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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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선 치료는 시작부터 고난이었어요. 창피한 얘기지만 중간에 낙오할 뻔했습니다.
시작 전에는 방사선이란 용어 자체에서 오는 두려움이 크긴 했지만, 저보다 고령이신 분들, 이미 체력적으로 많이 쇠약해진 분들도 다 하는 치료이니 당연히 잘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방사선은 아프거나 따가운 것도 아니고 엑스선(X-RAY) 촬영처럼 아무런 느낌이 없는 치료예요. 그냥 CT나 MRI 촬영하듯이 방사선 치료기 위에 누워 있으면 되죠. 대기실에서 만난 대부분의 분들도 잘 이겨내고 계셨어요. 그런데 문제는 저만 예외였어요.
방사선 치료실에 들어서는 순간 답답해지는 가슴이 진정이 되지 않았어요. 보통 10분, 20분이면 마치는데, 그걸 참지 못하고 몇 번이나 중간에 멈추어야 했어요. 초반엔 1시간 30분이나 걸리기도 했어요.
따지자면 저에겐 다른 환자들과 조금 다른 부분이 있기는 했죠.
치료 며칠 전 모의 치료 단계에서, 저는 얼굴 전체를 감싸는 마스크를 제작해야 했어요. 모양은 펜싱 투구처럼 생겼어요. 플라스틱 같은 재질이고요. 머리, 얼굴, 목 부위의 치료를 받는 경우 마스크를 만든다고 하더군요. 이는 방사선 조사 중에 생길 수 있는 움직임을 예방하고 정밀한 치료를 하기 위해서라고 해요. 그 목적에 따라 움직일 수 없도록 얼굴 크기에 딱 맞아야 했어요.
사실 치료는 간단해요. 사전 모의 치료와 치료 계획 단계를 통해 방사선 조사 부위와 조사량 등이 이미 정해져 있으니까요. 치료하는 날에 와서, 병원 지하에 위치한 방사선 치료실 앞에 대기하고 있다가, 순서가 오면 들어가서 치료기 위에 누워요. 그리고 자기 마스크를 쓰고, 마스크를 기계에 고정시켜요. 머리가 움직일 수 없도록이요. 그리고 치료기 속으로 들어가 가만히 이십 여 분간 누워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저는 치료 기계에 누운 후, 바닥에 마스크를 고정하는 단계에서 '딸깍' 하고 채우는 소리만 나면 문제가 생겼어요. 그때부터 숨이 안 쉬어지고 가슴이 답답해져 왔어요. 마스크가 목을 조르는 것 같았어요. 그때마다 손을 들어 치료사분들에게 'SOS'를 보내야 했어요. 그렇게 중간에 내려와 다음 환자와 순서를 바꾸기도 하고, 몇 번씩 마스크를 썼다 벗었다를 하며 겨우 겨우 치료를 받았어요.
'공황장애'일 수도, '폐쇄공포증'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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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치료 초기에는 너무나 힘겨웠어요. 마음도 힘들었지만 의료진들에게 너무 미안했고 창피했어요. 무엇보다 이런 모습의, 나 스스로가 너무나 한심했어요. 그래서 더 괴로웠어요.
옆에 있던 할아버지, 할머니 환자 분들도 다 이겨내는 걸, 저만 바보같이 못하고 있었죠. 누가 봐도 열등생이었어요.
다행히도 이 힘든 시간을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넘길 수 있었습니다.
치료 중간에 나와 대기실에 다시 앉으면, 하교 길에 오줌을 싸버린 초등학생처럼 너무 참담했어요. 다 큰 어른이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 흘리며 자책하고 있는 그때, 다가와 토닥토닥 제 등을 쓸어준 간호사 분 덕분에,
지금 못하겠으면, 뒷사람이 없어서 급하지 않을 맨 마지막 타임에 다시 한번 해보자고 말해준, 그리고 마스크가 갑갑하게 느껴져서 그럴 수 있으니 마스크의 눈과 입 부분에 구멍을 뚫어주겠다고 따뜻하게 말해준 방사선 치료사들 덕분에,
약물로 자면서 치료받게 해 달라는 저에게, 한번 수면으로 하기 시작하면 끝날 때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고, 그러면 더 힘들어질 수 있다고, 조금만 참고 몇 번만 더 시도해 보라고 조언해 준 당직 의사 덕분에,
면담 시간마다 반복되는 저의 하소연에도, 정신과 교수님처럼 묵묵히 듣고, "네, 힘드실 거예요. 그래도 잘하고 계시다고 들었어요"라며 이해해 주고, 차분히 해결책을 알려주신 방사선종양학과 교수님 덕분에,
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옆에서 모든 걸 함께 해주고, 심적으로 흔들리던 많은 순간마다 내 손을 꽉 잡아 주고, 포근히 안아준 아내 덕분에,
할 수 있었습니다.
고마운 의료진들 덕분에, 고마운 아내 덕분에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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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터널이었고, 그곳은 정말 어두웠습니다.
이 터널은 중간에 무지개 조명도 없었습니다.
계속 사이렌 소리만 귀청이 떨어지게 울렸습니다.
앞 차도, 뒷 차도 보이지 않는 외롭고 긴 터널이었습니다.
하필 쓸쓸한 겨울이었습니다.
그래도 달리다 보니, 어느덧 출구에 섰습니다.
봄과 함께 끝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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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선 치료가 다 끝나고 몇 달이 지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 보면 그렇게 힘든 건 아닌데, 그땐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이랬습니다.
시작 전부터 방사선이란 용어 자체에서 오는 두려움이 있었고, 혹시라도 방사선이 눈에 쪼이면 큰 일 난다는 공포가 컸었죠. 결국 이게, '하기 싫다'는 잠재의식에 영향을 미쳤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치료를 남이 시켜서 하게 된 것처럼, 내 선택이 아닌 것처럼 착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회피하고 싶었고, 도망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마음이 치료에 거부감을, 공포심을 일으켰을 것 같아요.
냉정하게 말하면, 의료 기술을, 의료진을, 나를 모두 믿지 못했던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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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하면 떠오르는 사진 한 장이 있습니다.
한 경제 잡지에서 봤는데요. 그 사진에는 외줄 타기 곡예사 찰스 블론딘이 자신의 매니저였던 해리 콜코드를 등에 업은 채, 지상 48미터 높이의 나이아가라 폭포를 밧줄을 밟고 건너고 있는 모습이 찍혀 있습니다.
1859년, 블론딘이 세계 최초로 시도한 나이아가라 외줄 타기 곡예 현장에는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밧줄 위를 걸어 폭포를 건너는 데 성공한 후, 블로딘이 관중에게, 이번엔 내 등에 업혀 이 폭포를 건널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아무도 답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의 매니저 해리 콜코드가 나섰고, 결국 이 두 사람이 함께 이 폭포를 건넜다고 합니다.
자신의 목숨을 파트너에게 맡길 수 있는 그 믿음은, 제 상식을 넘어선 충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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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환자들을 위한 여러 권의 책을 내고, 스스로를 마음을 치료하는 의사라고 설명하는, 암 전문의 이병욱 박사는 책 <<암을 이겨내는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투병이 시작되면 의사, 환자, 보호자는 서로 발을 묶고 2인 3각 경기를 하는 것처럼 완치를 향해 함께 전진하는 관계가 됩니다. 이 세 명의 화합과 균형이 중요한데, (중략) 환자가 따지려 들고 믿지 않으려 하면 의사도 환자를 피하게 됩니다. 반대로 의사를 완전히 신뢰하고 기대면 의사들도 더욱 책임감을 느끼게 됩니다. 환자 입장에서는 좋은 의사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사를 먼저 신뢰해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합니다. '
우리나라 암 치료 성적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합니다. 의료진에게 나의 치료를 맡기기로 했다면, 믿음을 갖고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모르겠지만요. 또한 기왕 암을 치료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강건하게 계속 전진해야 합니다. 그 누구가 아닌, 내가 정한 것이니까요.
무엇보다 내 판단을, 나 자신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희망이 따라옵니다.
� 지금까지 살면서 겪은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이었나요? 어떻게 이겨내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