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나,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아주 많이 걸었다. 여름을 시작하는 교토의 5월은 이미 덥다. 낮부터 쏟아지는 태양에 대적하느라 다리는 이미 너덜너덜하다. 여러 줄에 매달려 흐느적거리는 꼭두각시 인형 같다. 눈을 감았다 뜨면 식당 앞이기를 소망했고, 눈동자는 방향을 잃은 지 오래고, 심연에서 올라오는 꼬르륵 소리는 이미 멈추는 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린 것 같다. “저기 버스가 와. 뛰어!”내가 말한다. 버스를 타야 한다. 버스를 타기만 하면 밥집에 금방 도착할 것이다. 다리의 근육들은 도드라지고 아직 힘이 남아있는 것에 스스로 놀란다. 전속력으로 달려 정차한 버스를 타려고 하니 이미 길게 늘어선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보인다. 줄의 맨 끝으로 달려가려고 몸을 왼쪽으로 확 꺾는다. 누군가가 나를 휙 잡아당기는 것처럼, 세상의 중심이 요란스럽게 뒤죽박죽이 된다. “아니, 거기서 왜 방향을 바꿨어?”그녀가 나를 일으켜 세우며 말한다. “몰라” 나는 짧게 툭 내뱉는다.
‘니시노토인’ 바람에 살랑거리며 나부끼는 흰색 면 가리개를 걷고 들어가니 갖가지 향기로운 냄새가 코를 휘감고 스쳐간다. 훤히 내다보이는 주방 앞에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가정식 요리들이 즐비하다. 진한 간장 국물이 끼얹어져 있는 윤기나는 고등어구이, 맛깔스럽게 쪄내어 깊게 팬 고른 결들의 가지, 몰랑몰랑 연 두부, 양배추 위에 자리 잡은 바삭바삭 크로켓, 된장의 구수한 풍미가 입맛을 다시게 하는 미소 된장국, 각종 나물 반찬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고 입안 가득 감미로운 침이 솟아난다.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흰밥에 고등어구이 한 점 올려 먹는다. 달콤한 닭강정에 오돌오돌 씹히는 미역 조림도 궁합이 좋다. 입안에 넣는 순간 그대로 녹아 사라져버리는 계란찜에 구수한 미소 된장국 한 스푼은 포기할 수 없는 맛이다. 일본 가정식 요리는 재료 각각들이 제 목소리를 내지는 못하는 밋밋한 맛이지만 서로 어우러지면 마음을 녹이는 맛이다.
유명하다는 라멘집을 찾아가도 맛이 짜서 반을 남겼다. 그들이 좋아하는 함박스테이크를 한 입 베어 먹어도 마찬가지다. 그녀와 나는 소화력도 그리 좋지 않아서 여행지에서의 먹거리를 신중하게 고민한다. 따사로운 봄날을 보내고 청명한 여름이 오는 계절 오월에, 그녀와 내가 즐겼던 음식은 지금 이 순간을 빛내는 작은 오아시스다.
우리는 밥 한 공기를 쓱싹쓱싹 비워내고 이제야 서로 마주 보며 미소 짓는다. " 역시 검색 너무 잘 했어. 대만족이야! 참 언니, 발은 괜찮아? 어디 보자. 나 파스 있어. 파스 줄까?"
하루 전, 우리는 교토에 도착했다. 북적이고 생기 넘치는 공항을 출발해 교토로 가는 기차를 타기까지 우리 계획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착착 진행되었다. 그녀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익숙한 듯, 낯선 풍경을 보고 있다가 내게로 무심히 얼굴을 기울였다.
“어제 잠을 잘 못 잤어.” 그녀가 말했다.
“여행 간다고 설레었어?” 내가 물었다.
“낯선 곳으로 가려니 두려움이 생겨. 그리고 언니랑 또 싸울까 봐”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순간이었다. 싸운 순간이 있었나. 내가 줄곧 참은 것 같은데. 묘하게 무르익은 주먹밥 속 참치 냄새가 기차 칸을 가로지르는 것 같았다.
“날씨가 흐린데 우산을 가져가야겠지?” 8층에 위치한 숙소에 무사히 도착을 했고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외출할 계획이었다. 그녀는 등을 돌린 채 말했다. “우산을 가져가려니 손에 들고 가는 짐이 많은데 어쩌지? 잠시 나갔다 오는데 가져가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그녀는 창문을 열어보고 날씨를 살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가져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내가 말했다. “그렇겠지? 그런데 날이 조금 쌀쌀한 것 같은데 긴 바지를 입을까?” 대답을 해줄 사이도 없이 그녀는 스스로 묻고 곧장 답했다. “그래도 비가 올 수 있으니 그냥 반바지에 크룩스를 신어야겠어. 나가볼까? 오늘은 뭘 하기로 했어? 내가 예약한 숙소 너무 괜찮지? 나는 역시 숙소를 너무 잘 잡는 것 같아.” 날씨 변화에 적응력이 떨어지는 그녀는 만반의 준비를 하려니 생각이 많다. 어디까지 대답을 해주어야 할까? 무심히 흘러가는 방 안 공기를 잡아보려 하지만 그것은 손안에서 자꾸만 사라진다. 마음의 불안을 쏟아내는 그녀 앞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행지의 날들에는 들뜨는 마음도 있지만, 내가 아는 익숙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도 있다.
그녀와 나, 여행 메이트 기간은 이미 3년째이고, 그동안 다닌 해외여행지는 대여섯 군데이다. 오십 대 여자 둘만의 자유여행은 모험가적 기질을 뽐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우리는 각자의 지역에서 오랜 기간 수학과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고, 방 한 칸을 내어 집안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같은 업계 종사자라 통하는 것이 많았다. 여행은 인생의 여러 페이지를 넘겨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가치관도 통했다. 가치관은 맞지만 여행지에서는 가치관만 가지고는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mbti는 istp, 나는 esfj, mbti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는 모두 정반대이다. 여행 오기 2주 전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그녀는 내게 날씨 알림을 주었다. 3박 4일 일정을 하루별로 나누고, 그 하루의 일정도 플랜A, 플랜 B까지 마련하는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가야 할 장소와 근처의 맛집을 종이에 꾹꾹 눌러 적던 그녀의 볼펜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에 비해 나는 여행에 집중하는 시기는 딱 일주일이다. 숙소는 미리 잡지만 일주일만 몰입해 준비를 하는 편이니 사실 그녀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넘긴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녀의 플랜 B는 미지의 그것들에 대한 두려움과 새로움이 공존하는 여행지에서 많은 길잡이 노릇을 해 주었다. "이쪽 길이야!"라며 성큼성큼 앞서가는 나에게 눈이 나쁜 그녀는 늘 감사하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우리의 취향과 입맛과 건강 상태가 집결되어 잭팟을 터뜨리는 것이 여행지에서의 '음식'이다. 중년의 여행이란 음식과 사람,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은 모두 제각각의 맛을 지니고 있다. 강한 풍미를 발산해야 될 때도 있지만, 어우러지는 향기로 녹여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녀와 나는 또 뚝딱거릴 것이다. 그녀는 불안해하고 나와의 감정적 미묘한 싸움을 할까 봐 걱정을 할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맞춰주어야 할지, 단호하게 말해야 할지 손을 가만두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교토의 니시노토인'을 넘어설 다른 밥집을 찾아 함께 여행지를 검색할 것이며, 이방인이 되기를 자처한 모험가가 되어 함께 길 위에 설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여행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