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역사에서 여성이 왕위에 오른 예는 그리 많지 않다. 장자 상속의 오랜 전통 속에서 여성들이 왕관을 차지할 기회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안 되는 영국의 여왕들 가운데는 역사상 가장 알려지거나(엘리자베스 1세), 가장 오랜 기간 제위에 있거나(엘리자베스 2세), 정치적으로 가장 성공한(빅토리아) 군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영국의 역사에 잠시라도 통치권을 가졌던 여성 군주는 모두 8명이다. 그러나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른 여왕은 메리 1세 이후로 6명이었다. 이 글에서는 메리 1세 이전의 두 여성 통치자를 함께 다루고자 한다.
1. 마틸다 (Matilda, 1102~1167)
마틸다는 잉글랜드 역사 상 최초의 여성 통치자로 헨리 1세와 스코틀랜드 출신 마틸다 왕비와의 사이에 장녀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이름을 물려받은 그녀는 1114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5세와 결혼하였으나 1125년 남편이 사망하자 잉글랜드로 돌아와 1128년 프랑스 앙주(Anjou)의 백작인 조르푸아와 재혼한다. 모드 황후(Empress Maud)라고도 불리는 그녀는 아버지인 헨리 1세에 의해 왕위 계승권을 갖게 되었지만 1135년 헨리 1세 사후 혼란을 틈타 사촌인 스티븐(Stephen)이 왕위를 찬탈하였다. 1139년 앙주에서 귀국한 마틸다는 그와 왕권을 놓고 전쟁을 벌이게 된다. 결국 1141년 스티븐을 생포해 통치권을 장악했지만 이후 스티븐이 풀려나고 왕권 투쟁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성에 의한 통치를 원치 않던 귀족들과의 대립하였고, 재혼한 남편 조프루아가 프랑스 인이었으므로 잉글랜드의 국민들은 그녀를 군주로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전세가 불리해지자 마틸다는 노르망디로 피신하였고 이후 다시는 잉글랜드로 돌아올 수 없었다. 하지만 조르푸아와의 사이에서 나은 아들 헨리가 노르망디와 앙주에서 세력을 키워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한다. 헨리는 스티븐을 압박하여 그의 왕위를 인정하는 대신 자신을 잉글랜드의 왕권 계승자로 지정토록 하였다. 그는 1154년 스티븐이 사망하자 헨리 2세로서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프랑스에 머물던 마틸다는 1166년 세상을 떠났다.
2. 귀공녀 제인 그레이(Lady Jane Grey, 1537~1554)
왕권 다툼이었던 잉글랜드의 장미 전쟁은 붉은 장미를 문장으로 사용하던 랭커스터(Lancaster) 가문의 승리로 끝이 나고 헨리 7세가 즉위함으로써 튜더 왕조가 시작된다. 이후 그의 아들 헨리 8세는 궁정의 시녀였던 앤 불린과 사랑에 빠져 스페인 공주 출신의 첫째 왕비 캐서린과 이혼하려 한다. 하지만 유럽의 강대국이었던 스페인의 압력으로 로마 교황청이 이혼을 허락하지 않자 로마와의 관계를 끊고 오늘날 성공회의 전신인 영국 국교회(Anglican Church)를 선언한다. 헨리 8세는 캐서린 왕비와의 사이에 딸(Mary)을 두었고 둘째 부인인 앤 불린과도 딸(Elizabeth) 하나를 두었는데 결국 아들을 낳지 못한 앤은 런던탑에 갇혀 죽음을 맞는다. 헨리 8세는 또다시 새로운 왕비를 맞이해 마침내 아들을 얻게 되었고 그의 사후 이 아들이 왕권을 계승해 에드워드 6세가 된다. 하지만 고작 아홉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가 6년 만에 죽자 왕위 계승 순서에 따라 첫 번째 부인에게서 난 메리가 여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어있었다. 하지만 도셋(Dorset) 후작 헨리 그레이(Henry Grey)와 그의 부인이었던 헨리 8세의 생질녀 레이디 프란세스 브랜던 (Lady Frances Brandon) 부부가 자신들의 딸인 제인 그레이를 왕위에 올리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들은 영국 국교회의 성립과 함께 힘을 갖게 되었으므로 독실한 로만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와는 대립 관계에 있었다. 결국 제인이 왕위에 오르지만 1553년 7월 19일 왕녀 메리 1세가 런던에 입성하자 반역죄로 몰려 런던탑에 갇히고 만다. 즉위한 지 9일 만의 일이었다. 제인은 1554년 2월 열여섯의 나이로 참수당한다.
3. 메리 1세(Mary I, 1516~1558)
메리 1세의 어머니 캐서린은 사실 헨리 8세의 형이었던 아서의 부인이었다. 아서가 이른 나이에 요절함으로써 차남이었던 헨리 8세가 왕위에 올랐고 당시의 관례에 따라 형의 부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메리는 앤 불린과 사랑에 빠진 아버지에 의해 어머니를 잃고 그녀 자신도 수많은 박해를 당하게 된다. 헨리 8세는 형의 아내였던 캐서린 왕비와의 결혼은 근친상간이므로 무효라고 주장함으로써 메리는 자연 사생아의 신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후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사이가 멀어지자 다시 왕위 계승권을 되찾게 된다. 결국 헨리 8세의 사후 제인 그레이 세력을 물리치고 1553년 왕위에 오른 그녀는 어머니 시절의 로만 가톨릭과의 관계 회복을 추구하였다. 따라서 신교도들을 잔혹하게 박해하였고 이로 인해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당시 영국의 귀족들은 영국 국교회 성립에 따라 몰수된 가톨릭 사원의 재산을 차지하여 부를 누리고 있었으므로 새로운 여왕의 종교적 성향은 그들에게 큰 위험으로 다가왔다. 따라서 그녀는 귀족들과 심각한 대립 상태에 놓이게 된다. 또한 당시 의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조국 스페인의 필리페 2세와 결혼함으로써 의회의 반감을 사기도 하였다. 더구나 그녀는 국민들의 바람과는 달리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여 유럽 대륙의 유일한 교두보였던 프랑스 내의 영국 영토 ‘칼레’마저 상실하고 만다. 헨리 8세의 시대에 오랜 핍박의 세월을 살아왔던 메리 1세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쇠약해진 상태에서 1558년 제위 5년 만에 사망한다.
4.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1603)
앤 불린의 딸로 태어나 어머니가 간음했다는 누명을 쓰고 처형된 후 엘리자베스는 숨 막히는 궁정 생활을 견뎌야 했다. 특히 이복 언니인 메리 1세가 왕위에 오른 뒤에는 그야말로 인고의 삶을 살아야 했다. 몇 차례의 정치적 음모의 위험을 치르면서도 결국 그녀는 살아남아 후세 없이 세상을 뜬 메리 1세의 뒤를 이어 1559년 26세의 나이로 여왕의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1603년 죽을 때까지 무려 45년간이나 영국의 통치자로서 군림하게 된 것이다. ‘처녀 여왕’(Virgin Queen)이라는 별칭으로 알려진 그녀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처녀로서 왕위를 지켜냈다. 그녀는 ‘영국이라는 나라와 결혼해 영국인이라는 자녀를 두었다.’라는 말로써 오로지 국가와 국민만을 위한 군주로서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의 시대는 영국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번창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메리 1세 여왕 시절 종교적 갈등을 목격했던 그녀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함으로써 종교적 관용의 시대를 열었고, 상업과 무역의 확대로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여 사회적 만족을 이루어냈다. 또한 영국의 해군력을 강화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는 등 유럽 최강의 해군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 시대는 꿈과 열정이 가득한 역동의 세월이었다. 특히 영국의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해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뛰어난 작가들의 활동으로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운 시기이기도 하였다.
5. 메리 2세(Mary II, 1662~1694)
영국의 ‘청교도 혁명’(1642~1660)으로 찰스 1세가 단두대에 목이 잘리고 크롬웰을 중심으로 한 청교도 공화국이 세워졌으나 혁명 정부의 엄격하고 과도한 종교 정치는 국민들의 큰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크롬웰의 사망과 함께 공화국은 설립된 지 불과 10년 만에 막을 내리고 프랑스로 망명했던 찰스 1세의 아들이 귀국해 찰스 2세로 즉위함으로써 왕정의 복고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찰스 2세와 그의 뒤를 이은 제임스 2세는 가톨릭 신자였던 까닭에 신구교 간에 심각한 종교적 갈등이 계속되었다. 결국 의회는 제임스 2세를 추방하고 왕의 맏딸인 메리와 네덜란드 출신인 그녀의 남편 윌리엄을 맞아들여 영국의 새 왕으로 세웠다.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했고 무혈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이른바 명예혁명이다. 이로써 1689년 메리와 윌리엄 부부는 영국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는 즉위 직후 의회가 내놓은 ‘권리 장전’(The Bill of Rights)에 서명하였고 영국은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The king reigns but never rules.)라는 입헌 군주제의 전통을 시작하게 된다. 메리 2세는 국민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으며 남편의 조국인 네덜란드적 취향으로 영국의 도자기 제조, 조경 및 실내장식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망명한 아버지에 대한 생각으로 늘 가슴 아파했던 여왕은 1694년 32세의 나이로 천연두에 걸려 사망하였다. 남편 윌리엄 3세는 그녀가 죽은 뒤에도 왕위에 있었으며 그의 사후 메리의 여동생 앤(Anne)이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
6. 앤 여왕(Queen Anne, 1665~1714)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가 후세 없이 세상을 뜨자 1702년 메리의 여동생 앤이 왕위를 잇게 된다. 그녀는 영국 역사에서 그다지 존재감이 크지는 않았지만 치세 동안 영국에는 몇몇 중요한 사건들이 발생하였다. 앤 여왕은 윌리엄 3세 이래 계속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마무리하고 그 결과 지브롤터 해협을 차지함으로써 영국의 해군력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후 스코틀랜드를 완전히 영국에 복속함으로써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첫 통치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녀는 의회 내에 휘그(Whig) 당과 토리(Tory) 당 사이를 교묘히 오가면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기도 하였으나 휘그 당 편이었던 말보로 공작부인 사라 처칠을 가까이했다가 그녀가 토리 당 소속 귀족들을 실각시키려 하자 그녀와 결별하였다. 그러자 사라는 여왕과 그녀의 시녀 에비게일이 레즈비언이라는 루머를 퍼뜨려 앤 여왕을 비난하기도 하였다. 영국 역사상 가장 비만한 군주였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젊어서부터 뚱뚱했던 앤 여왕은 평생 건강이 좋지 못했다. 1708년 남편의 사망 이후 그녀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고, 마침내 1714년 어전 회의 중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사망한다. 스튜어트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앤의 사후, 왕위계승법에 따라 제임스 1세의 외손녀 소피아 공주의 아들이며 하노버 공국의 선제후*였던 조지 1세가 영국 왕으로 즉위함으로써 하노버 왕조가 시작되었다. 조지 1세는 영국 왕실의 먼 친척이긴 했으나 독일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영국에 대한 정치적 지식은커녕 영어조차 할 줄 몰랐다. 이에 그는 정치를 대신들과 의회에 전적으로 맡겼는데 이로써 내각책임제가 싹트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 선거후(選擧侯)로 번역되기도 하며, 세습 군주국이 아니라 선출 군주국이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최고위직 제후들을 말한다.
7.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 1819~1901)
빅토리아 여왕은 1837년 즉위한 이래 1901년 사망할 때까지 무려 64년 간 영국을 통치한 여왕이었다. 그녀는 1819년 조지 3세의 넷째 아들인 에드워드와 독일 하노버 왕가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난 이듬해에 사망하고 그녀는 어머니의 보호와 통제 속에 성장한다. 조지 3세가 세상을 떠난 뒤 첫째 삼촌이 조지 4세로 즉위하고 그의 제위 기간 중 둘째 삼촌이 사망한다. 조지 4세가 세상을 떠난 후 셋째 삼촌이 65세의 나이에 윌리엄 4세로 왕위에 오르나 6년 후에 사망하자 직계의 후손이 없는 상태에서 빅토리아 여왕이 18세의 나이로 여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빅토리아 여왕의 치세는 영국의 최고 전성기로 불린다. 세계 각국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성장시킨 군주이기도 하다. 그녀의 치세에는 영국의 가장 현명한 재상들인 디즈레일리와 글래드스톤이 각각 보수당과 자유당의 대표로 선의의 경쟁을 벌이면서 양당 체제의 의회 민주주의를 확립해 나가기도 하였다. 특히 디즈레일리는 1876년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의 여황제’라는 직함을 헌정하기도 하였다. 그녀의 치세 중 크리미아 전쟁과 아편전쟁에서 승리를 거뒀고, 산업혁명을 이끌어 서구 세계에 새로운 경제의 패러다임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빅토리아 여왕은 1840년, 외사촌인 앨버트 공(Prince Albert)과 결혼한다. 여왕은 독일 출신이지만 인자한 인품과 뛰어난 교양의 소유자였던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그랬던 앨버트 공이 여왕의 어머니가 사망한 1861년 케임브리지를 방문하고 돌아온 후 장티푸스로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자 빅토리아 여왕은 깊은 슬픔에 잠긴다. 앨버트 공의 사망 이후 여왕은 평생 검은 옷을 입고 지내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정무에서 손을 떼고 오로지 윈저 궁에 칩거했던 빅토리아 여왕은 1887년 즉위 50주년 행사인 골든 주빌리(Golden Jubilee)를, 1897년에는 영국 역사상 최초로 60주년을 기념하는 다이아몬드 주빌리(Diamond Jubilee)를 성대히 치른다. 그리고 20세기의 첫 해인 1901년 1월 22일 장남 에드워드 7세(Edward VII)가 지켜보는 가운데 82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다.
8.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 1926~2022)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2022년 9월 8일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1953년 2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70년 간 영국을 통치한 최장수 여왕이었다. 그녀의 백부인 에드워드 8세(Edward VIII)가 미국인 이혼녀와의 스캔들로 하야하게 되자 부친인 조지 6세가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 조지 6세에게는 두 딸이 있었고 엘리자베스는 큰 딸로서 왕위 계승 서열 1위가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덴마크와 그리스 귀족 가문 출신인 필립 마운트배턴 공과 1947년 결혼한다. 1951년 이래 조지 6세의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자 그녀는 아버지를 대신해 영연방 국가를 포함한 해외 순방 길에 나서기도 하였다. 1952년 조지 6세가 사망하자 그녀는 마침내 영국의 새로운 여왕으로 탄생한다. 그녀에게 주어진 공식 직함은 '엘리자베스 2세, 신의 가호 아래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그리고 그녀의 모든 소유지의 통치자, 영연방의 수장이며 신앙의 옹호자‘였다. 대관식은 1953년 6월 최초로 전 세계에 TV로 중계되는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당시 영국의 수상이던 윈스턴 처칠은 전후 위축된 영국의 대외적 위상과 영국인들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대규모의 대관식을 준비하였던 것이다.
영국의 40번째 군주인 엘리자베스 2세는 국가수반으로서 의회를 소집하고 해산하며 선거에 의해 선출된 수상을 임명할 권한을 누렸다. 여왕은 영연방 54개 회원국의 수장이며 많은 영연방 국가들의 여왕이기도 하다. 여왕의 자리는 상징적인 것을 넘어 국내의 정치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다. 그녀의 자매와 자식들에 관한 여러 차례의 스캔들과 일각의 왕실 폐지론에도 불구하고 버킹엄 궁의 주인으로서 영국의 왕실을 지켜온 것은 엘리자베스 2세가 갖추고 있는 겸허함과 청렴성에서 비롯된다. 그녀의 검소함과 신중한 처세는 영국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슬하에 4 남매를 둔 여왕은 2022년 9월 8일 영면하여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재위 70년의 긴 세월 동안 그녀는 영국과 영국민에게 헌신한 뛰어난 여왕으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