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의 아픔을 겪은 지도 이미 여러 해가 지나갔다. 하지만 아직도 그 어린 우리의 아들딸들이 마지막 순간 얼마나 당혹스럽고 무서웠을까를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 죽음을 직감한 그때 그들은 얼마나 엄마와 아빠를 간절히 찾았을까. 돌이켜 생각하기조차 두려운 순간이다. 그리고 생각한다. 인간이 얼마나 무책임해질 수 있는가를. 그 절박한 순간 자신만 살겠다고 배에서 기어 나온 그 어른들. 그들은 어디선가 그 죄 값을 치르고 있겠지만 그들의 행위는 극한의 순간 인간은 어디까지 배신을 행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폴란드 출신 영국 소설가 조셉 콘래드(Joseph Conrad)는 “우리가 배신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양심뿐이다 “라고 말했다. 하지만 배신이 만들어내는 양심의 가책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배신을 당한 상대가 있기 때문이다. 배신은 결국 그 이전에 믿음이 있음으로만 가능하다. 믿었던 연인, 믿었던 친구, 믿었던 누군가, 믿었던 무언가의 배신. 믿음은 배신의 어머니이다. 그래서 인간은 믿음에 대한 불신에 빠진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불신을 넘어서 자신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스스로에게 배신당한 경험 때문이다. 꿈의 배신, 능력의 배신, 건강의 배신, 돈의 배신... 무수히 이어지는 배신의 행렬 속에서 우리는 자문한다. 인류의 역사는 배반의 역사인가?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예수를 세 번 배신했던 베드로, 은화 30냥에 스승을 판 유다, 그 배신의 역사는 반복되는가? 로마의 공화정 말기, 시저는 자신에게 항거했던 브루투스를 사면하고 그에게 높은 관직을 준다. 그러나 공화국의 이상에 빠져있던 그는 시저가 황제를 꿈꾼다는 이유로 그를 살해한다.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시저의 마지막 부르짖음은 배신에 대한 절망의 절규였다. 오늘의 우리는 배신의 역사를 이어받고, 배신의 시대를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포기하는 불신의 늪에 빠지고 만다.
사람에 대한 배신과 그에 따르는 고통스러운 가책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 콘래드의 ‘로드 짐’(lord Jim)이다. 배의 항해사였던 주인공 짐은 순례 길에 나선 이슬람교도들을 가득 실은 낡은 화물선에 승선한다. 항해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화물과 승객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배의 낡은 철판이 휘어지고 물이 새어들기 시작한다. 800명에 가까운 승객을 태웠던 배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인 것이 분명했다. 생존의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잠들어 있는 승객들을 깨워 위험을 알린다면 그들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배는 아비규환의 상황이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자 선장과 승무원들은 승객을 버리고 자신들의 목숨이라도 구하기로 결정한다. 선장의 결정에 반대하여 승객과 더불어 최후를 맞으려 했던 항해사 짐 역시 마지막 순간 승무원들이 타고 있던 구명정으로 뛰어내린다. 승객들의 생명에 책임이 있던 승무원들의 배신이다. 그리고 생명의 위험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해지고 비겁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침몰하리라 믿었던 낡은 배는 기적적으로 지나가던 프랑스 군함에 구조된다. 그리고 배를 버린 채 도망했던 승무원들은 세상의 극심한 비난에 직면한다. 짐은 그러한 비난과 저주를 애써 피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비열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판을 받고, 투옥당하고, 형기를 마친 뒤에도 그는 죄책감과 수치심에 사로잡혀 일상의 삶을 회피한다. 고립감과 절망 속에서 방황하던 짐은 우연히 말레이의 파투산이라는 오지로 들어간다. 그는 그곳에서 미개한 부족을 도와주고 그들에게 문명의 빛을 보게 하여 그들로부터 '로드(Lord)'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그렇게 문명 세계와 죄의식에서 벗어나 평화로움을 누리던 어느 날, 몇 명의 백인들이 총으로 무장한 채 그 섬을 침범한다. 짐은 백인과 원주민 사이의 타협을 통해 평화를 유지하려 하지만 탐욕에 빠진 백인들은 짐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족장의 아들을 살해한다. 이미 배신을 통한 가책의 고통을 겪었던 짐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은 채, 아들의 죽음에 분노한 족장이 쏜 총에 맞아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인간은 누구나 타인의 신뢰를 배신할 수 있다. 그만큼 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 배신에 대한 가책으로 고통받는 사람은 흔치 않다. 나의 배신조차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그리하여 자신의 배신에 대해서 조차 무감각해진 우리들이다. '내 탓이요‘(mea culpa)의 정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배신이 제도와 관행이라는 핑계로 면죄부를 얻고 또 다른 배신이 서슴없이 저질러지는 세상에서 오늘의 우리는 배신의 가책과 그 고통의 무게를 느끼지 못한다. 죄와 가책의 고통을 지고 가는 로드 짐은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배신에 무감해진 우리는 서로의 배신을 깨닫지 못한다. 그저 자신의 양심만을 속이고 더럽히고 있을 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