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슬픈 짐승>이다
나른함과 달콤함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이 낯선 감정을 슬픔이라고 하는 엄청나게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러도 좋을지 나는 망설인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의 첫 문장이다.
열일곱 소녀는 처음으로 슬픔과 마주한다.
그리고 인사를 건넨다.
안녕, 슬픔
지금 내가 말하려고 하는 이<슬픔>은 외부에서 우연히 날아드는 폭력과 같은 슬픔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나 질병, 궁핍이나 외로움 때문에 생기는 슬픔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어쩌면 어렴풋이 짐작은 하지만 확실하지 않은 슬픔이다.
원인 없이 결과만 있는.
인간이면 누구나 태어나면서 가지고 나오는...
마치 원죄와도 같다.
허무와 권태, 쓸쓸함과 상실이라는 말들과 혼동될 수 있지만 전혀 다르다.
치유될 수 없는 <슬픔>을 말한다.
단지 슬픈 감정을 말하는 것 또한 아니다.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애哀와 같은 감정도 아닌 듯하다.
영화나 소설 속에서는 항상 슬픔이 넘쳐나지만
현실 속에는 이 슬픔이 잘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 정체 모를 슬픔을 잘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슬픔은 언제나, 어디에나 숨어있다.
고고학자가 조심스럽게 과거의 유물을 발견하듯이
어떤 이의 슬픔은 우연히 발견된다.
너무 깊이 묻혀있어
평생 자신의 <슬픔>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대부분 자신의 슬픔을 발견한다.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에서의 '나'처럼
우리는 모두 슬픈 짐승이다.